일제 시대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해방괌 함께 남한으로 내려와, 전쟁을 경험하고 살다간 한 사람에 대한 아카이브

김정숙은 일제 시대 만주 용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만주는 한반도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너른 벌판과 거기서 나는 농작물로 굶지 않고 자랐다고 한다.



선교사들이 만든 명신고녀라고 하는 지금의 여자 중고등학교를 다녔었고, 다니던 와중에 일제에 의한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귀축영미'라고 선교사들이 모두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다. 명신고녀를 다니던 시절 문익환 목사님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님께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문익환 목사님과 문동환 목사님, 그리고 그분들의 아버님인 문재린 목사님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정숙의 기억에 그 집안분들은 똑똑하고 특이한 분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일본어를 써야할 일이 있으면 영어를 쓰게 했다는 문재린 목사님을 기억하고 있다.



김정숙의 사진들에는 일제 시대 만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다. 당시 학교의 학예회에 걸려 있는 일장기와 만주국기, 사진에 포함되어 있는 연도 표기 중, 만주국왕 '푸이'의 연호, 태평양 전쟁 말기 공장에 근로하러 갔던 사진들과 근로를 위해 가는 출정식의 사진과 같은 것은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김정숙은 만주 양주장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던 고의수를 만나 결혼한다. 고의수는 김해 대저(현재는 부산 대저)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중국으로 넘어왔으며, 사촌 동생이 극동영화사 사장과 결혼하자 사촌 매제의 양조장에서 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방이 되고, 고의수와 김정숙은 함께 김해도 이주한다.



이후 김정숙은 국민학교의 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6.25 전쟁과 셋째인 고예경이 공수병(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려 사경을 헤매자 딸을 업고 살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딸이 다행히 낫고 이후에는 보육원에서 일을 한다. 해서 남긴 사진들에 보육원의 사진들과 고아들의 사진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역시 우리의 아픈 과거의 역사이다.



이후에는 보건소를 다니며 일을 했고, 막내 아들이었던 고승건이 고등학생 시절 급성 백혈병으로 먼저 죽은 것을 제외하면 남은 1남 2녀는 무사히 장성하여 가족들을 이루었다.



김정숙은 2009년 냉면이 먹고 싶다며 둘째인 맏딸 고유경과 이야기하고 함께 함흥냉면을 먹으러 식당을 다녀오고, 그날 저녁에 병원으로 가셨다. 그리고 약 사흘 정도 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김정숙의 장례식장은 슬픔보다는 행복하게 살다간 김정숙을 그리는 웃음이 넘치는 자리였다. 물론 아들, 딸의 슬픔은 컸지만 그래도 고승하가 만든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울음보다는 행복함을 나누는 장례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