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의 격변 속 용정의대 설립과 그 이후
강진욱
게시일 2022.06.09  | 최종수정일 2022.06.16

용정의과대학 설립 배경

해방 직후 만주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은 약 20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이들 중 상당수는 한반도로 귀환하였으나 삶의 기반이 있는 연변에 남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연변 지역에서의 조선인들의 중심지역은 연길과 용정이었는데, 용정에서는 해방 직후 45년 8월  20일 용정교육동맹을 조직하고, 8월 26일 용정개척의학원을 접수하여 관리하다가, 9월 12일 용정의과대학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1947년 4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용정의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용정의과대학은 이후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를 거쳤다가 하얼빈 의과대학으로 변경된다.


용정의대의 설립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지 3일 만인 1945년 8월 1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했던 소련군(紅軍)이 연변에 정식으로 진주하였다. 소련군이 들어오자 예전부터 줄곧 연변에 거주하였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곧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소련군의 허가를 받아 농민동맹·청년동맹·부녀동맹·교육동맹 등의 대중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교육동맹은 폐교되었던 학교를 접수하고 운영을 재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8월 20일 조직된 용정교육동맹은 해방 전부터 용정의 조선인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동흥·대성·영신·은진중학교 등을 운영하는 한편, 총회를 소집하여 용정개척의학원의 복교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8월 19일 용정개척의학원 출신 정규창과 임정근, 신경하는 소련군을 찾아가 10자루의 총을 수령해 학교를 지켰고, 9월 1일 용정의과대학 성립대회가 거행된다. 용정의대는 본과를 포함한 6년 학제였고,전기 2년, 후기 4년으로 나누었다. 최초 시험은 9월 27, 28일 양일간 치뤄졌으며, 300명 가까운 지원자 중 70명을 선발한다.

연변의대 전경 - 김정숙 앨범

해방시기 조선인은 연변 총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었고, 연변지역의 민주대동맹은 회원이 14만5,000명이었는데, 이중 13만7,000명(94.5%)이 조선인이었다. 용정의과대학은 조선민족이라는 요소가 상당한 힘을 발휘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즉 용정의과대학은 자신의 조국을 한반도라고 생각한 연변 조선인들이 설립한 의과대학이었다.

공립으로 전환과 개칭(혹은 중공에 의한 강탈)
45년 11월 12일 연안간부단이 연변에 도착한다. 이들은 모두 중국인이었으며, 기존의 중공 연변위원회를 해체시키고 연변지방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위원 7명 중 조선인은 2명 뿐이었다.이렇게 연변 최고 지도자들이 조선인에서 중국인으로 바뀐다. 그리고 행정권 역시 책임자들을 모두 중국인으로 뽑게되고, 그 전의 조선인들이 주축이었던 민주대동맹은 행정부로서의 기능이 중지된다.
용정의대는 이때부터 공립처럼 변경되고 학생들은 중공이 필요로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용정의대의 시작 시기 재정 상태는 굉장히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교직원들의 임금을 제대로 줄 수 없어, 교사들에게 개인적인 진료나 의원 운영을 허락하여 스스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으며, 겨울에는 학생들이 직접 땔감을 구할 정도로 재정이 곤란한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로 용정의과대학을 '길럼성립용정의과대학'으로 전환한다고 선포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국공내전으로 인한 어려움이 산적했던 길림성정부는 학교 경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으며, 47년 4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의학원으로 개칭하고 '용정의과대학'이라는 이름은 사라진다.
용정의과대학(출처: https://www.medhist.or.kr/)


이후 동북군정대학으로 흡수
동북군정대학으로 흡수되는 것을 조선인들은 반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합병 관련 토론에서 의견 통일이 힘들었다는 서술이 남아있으며, 합병 이후 일부 교사와 학생들이 편입을 반대하여 북한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군정학교는 중일전쟁기에 설립된 항일군정대학의 후신으로 해방 후 만주로 이전하여 동북군정대학으로 발족된다. 그리고 여기서는 중공의 방침과 정책을 학습하고, 조선인들이 군정대학 재학 중에 중공에 입당하였다고 한다. 즉 민족적 염원으로 탄생한 용정의과대학이 연변의 중공 영향력으로 귀속되었다고 봐야한다.
동북군정대학 의과대학 호사반(간호사반), https://news.moyiza.kr/26328/%EC%98%81%EC%9B%90%ED%95%9C%20%EA%B8%B0%EB%85%90%EB%B9%84-18-%E2%80%94%EB%8F%99%EB%B6%81%EA%B5%B0%EC%A0%95%EB%8C%80%ED%95%99%20%EA%B8%B8%EB%A6%BC%EB%B6%84%EA%B5%90

중국의과대학으로 흡수와 조선민족의 노력으로 다시 탄생하는 연변의과전문학교
국공내전의 심화로 인하여 중공은 만주에서의 역량 강화를 위하여 중국의과대학을 설립하고 만주에 4개의 분교를 설립한다. 용정의대는 이때 중국의과대학 제1분교로 내과 중심 대학이 된다.  이후 국공내전이 중공의 승리로 귀결되자 49년 1월 제1분교와 하얼빈 제2분교를 합병하여 하얼빈의과대학으로 건립하게 된다.
하얼빈의과대학(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ldlstn1109&logNo=50111702130)

용정에서 비어버린 의학교육을 다시 채우기 위하여 연변의 조선인들이 연변의과전문학교(연변의전)을 설립한다. 이는 국공내전의 종료로 중국인 간부들이 관내 지역에서의 국공내전에 집중하기 위해 떠난 것이 첫번째 이유이며, 두번째는 48년 한반도의 남북 각각 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족 의식 고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연변대학 의과대학
연변대학 의과대학 사진(출처: 두산백과)



연변의전은 연변대학 의학부의 공식적 전신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연변대학 역시 용정의대에 기반을 두고 토대로서의 역할을 제공했다. 45년 9월부터 시작되었던 연변 조선인들의 연변대학 창설 움직임이 바로 용정의대를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