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인 기부릴레이의 뜨거운 심장은 단연 '이끔이'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일회성 기부금을 쾌척하는 후원자를 넘어섭니다. 스스로 먼저 나눔을 실천하고, 5월 한 달 동안 매일 한 명씩 새로운 주자를 이어 달리게 만들며, 일상의 공간에서 성평등의 가치를 정성스레 전파하는 사람. 한국여성재단의 이끔이는 모금자이자 전도자이며, 가치와 가치를 잇는 연결자였습니다.
2003년부터 2021년까지 19년이라는 유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이끔이가 릴레이 바톤을 쥐고 달렸습니다. 주자를 모으는 방법은 각양각색이었고 그들이 남긴 연대의 궤적은 저마다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온기 가득한 이야기들을 들여다봅니다.
이끔이들이 한 달 동안 31명의 주자를 모아 완주 고지를 밟는 방식은 개성과 성향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집니다.
2003년 첫 기부릴레이의 돛을 올린 이래 2012년까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끔이로 헌신한 위대한 영웅들이 있습니다. 김효선(여성신문사 사장), 故 박영숙(미래포럼 이사장), 신창재(교보생명 회장), 오한숙희(여성학자·방송인), 이길여(가천길재단 총장), 故 이희호 여사, 조흥식(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명예교수) 등 일곱 분이 그 주인공입니다. 특히 박영숙, 신창재, 이길여, 조흥식 네 분은 10년 내내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없이 릴레이를 무결점으로 완주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1999년 재단 창립 배분위원부터 이사까지 오랜 시간 동행한 조흥식 교수는 가장 친밀한 가족과 친척에서 출발해 친구, 제자들로 스펙트럼을 넓히는 정공법을 완주 비결로 꼽았습니다.
“100인 기부릴레이는 참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이다. 모금의 결과가 모두 성평등 사업에 사용되기 때문에 릴레이에 하나의 연결고리만 되어도 성평등사회를 만드는 데 동참하게 되는 결과다. 더불어 사는 사람이라면 기쁘게 실천하는 당연한 의무가 기부다.”
— 조흥식 교수, 10년 연속 완주 이끔이역대 100인 기부릴레이 역사상 단일 이끔이로서 가장 많은 주자를 결집한 전설적인 기록의 주인공은 유한킴벌리 최규복 대표이사 이끔이입니다. 그는 2014년 캠페인에서 무려 759명의 주자를 모으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는 2013년 자신이 세운 기존 최고 기록(741명)을 스스로 갈아치운 위대한 스퍼트였습니다.
최규복 이끔이는 "전년도 기록을 넘어선다면 본인 명의로 매칭 기부금을 더 얹겠다"는 과감한 공약을 내걸어 임직원들의 잠재력을 깨웠습니다. 회사 사내 인트라넷을 통한 전방위적 홍보와 임원진들의 솔선수범, 그리고 충주·대전·김천 등 전국 생산 공장 노동자들의 뜨거운 동참이 어우러져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이는 이끔이 개인의 선의가 어떻게 조직 전체의 건강한 나눔 문화로 복제·확산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 기업 파트너십의 교과서적 사례입니다.
100인 기부릴레이의 연대기에서 가장 가슴 벅차고 투명하게 빛나는 페이지는 단연 청소년 이끔이들의 서사입니다.
이슬아 학생은 2012년 서울대 사범대 부설여중 2학년(14세)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이끔이에 도전했습니다. 첫해에는 완주 요건을 채우지 못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매년 출사표를 던졌고, 마침내 2014년 완주를 거머쥐었습니다. 같은 해 최윤정(인수중 3), 이가윤(역삼중 2) 학생도 청소년 이끔이 대열에 합류해 당당히 완주를 스코어링했습니다.
특히 이가윤 학생의 완주는 눈물겨웠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기신 오래된 동전 꾸러미에 자신이 저금통에 모은 동전을 보태 릴레이의 첫 마중물을 부었습니다. 교내 오케스트라 단원 친구들과 치킨 파티를 열어 동참을 호소했으나 또래들에게 기부 약속을 받아내기란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었고, 결국 어머니의 친구들과 친척들의 손을 빌려 완주를 일궈냈습니다.
알고 보니 가윤 학생의 어머니 황정혜 씨는 과거 딸의 첫 돌날, 호사스러운 돌잔치 대신 재단에 기부금을 전달하며 딸의 인생을 나눔으로 시작해 준 인물이었습니다. 기부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정확히 15년 만에, 아기가 자라 엄마의 뒤를 잇는 이끔이가 된 것입니다. 세대를 정교하게 관통하며 나눔의 유산이 대물림되는 경이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나눔은 단순히 불쌍해서 돕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리더십을 키우는 일.”
이윤정 교수(가천의대)와 딸 이슬아 학생의 '모녀 이끔이' 동반 참여 역시, 기부릴레이가 단순한 자금 조달 플랫폼을 넘어 가정 내에서 가부장성을 해체하고 성평등 가치를 물려주는 훌륭한 산 교육장임을 똑똑히 증명했습니다.
더불어 수많은 기관들의 집단지성도 빛을 발했습니다. 국군간호사관학교는 생도들과 교직원 전체가 똘똘 뭉쳐 참여하며 "고통받는 이들을 보듬는 간호인의 돌봄 정신과 재단의 나눔 철학은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깊은 소회를 전했습니다. 농협 서교점 박재덕 지점장은 창구에 내방한 일반 고객들에게까지 기부 팸플릿을 건네며 참여를 이끌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무엇보다 눈시울을 붉히게 한 것은 재단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경남여성회, 광주여성노동자회, 전국여성노동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 현장 파트너 단체들이 역으로 이끔이를 자처하고 나선 것입니다. 수혜 대상이었던 이들이 다시 나눔의 주체로 리턴하는, 이른바 '아름다운 자원의 선순환'이 광장에서 실현되었습니다.
100인 기부릴레이는 딱딱한 온라인 뱅킹 시스템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매년 봄이면 이끔이들이 한 공간에 모여 연대의 도약을 선포하는 성대한 발대식을 개최했습니다. 전년도 완주 이끔이를 향한 영예로운 시상식과 새로운 슬로건 발표는 서로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충전해 주는 축제였습니다.
이 열기에 감동한 기업들은 기부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또 다른 나눔을 보탰습니다. (주)클리오가 후원한 화장품 27,000개, 교촌에프엔비(주)의 치킨 교환권, 공연기획사들의 뮤지컬 티켓 등이 릴레이 주자들에게 리워드로 선물되었습니다. 기부자가 또 다른 기부의 혜택을 받는 이 즐거운 '나눔의 나눔' 이벤트는 캠페인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이 과정 이면에는 각 이끔이마다 전담 서포터(재단 간사)를 1:1로 매칭해 약정서 관리부터 진행 상황 점검까지 패밀리처럼 세심하게 케어한 재단의 숨은 행정적 헌신이 있었습니다.
19년간 수천 명의 이끔이들이 발바닥이 땀이 나도록 이어 달린 길 위에 남은 것은 장부상의 숫자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군가의 손을 잡고 기부를 권유했던 웅성거림 속에서 '성평등'은 금기어에서 일상의 따스한 대화 주제로 격상되었고, 소액의 돈을 이체하는 행위 자체가 성평등 사회를 지지한다는 당당한 주권자의 영리한 선언이 되었습니다.
“민간 여성공익활동에 순수한 뜻을 함께하는 일반 시민들과의 우정.” — 『여성의 미래를 펀딩하다』, 한국여성재단 20년의 기록 (2020)
모금이 아니라 우정이었고,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인간적인 연결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어 달린 19년의 인간 사슬은 한국 여성운동을 받쳐주는 가장 단단한 주춧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