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호] ZOOM 2 | 크레딧 없는 사랑, 노동을 지속하는 케이팝 팬덤
웹진<한류NOW>
작성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문화교류연구센터 게시일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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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웨이브(Wavve)에 〈팬덤스테이지〉라는 전례 없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공개됐다. 지오디(god), 빅뱅(BIGBANG), 샤이니(SHINee), 엑소(EXO), 몬스타엑스(MONSTA X), 세븐틴(SEVENTEEN), 데이식스(DAY6), 트와이스(TWICE), 투모로우바이투게더(TOMORROW X TOGETHER), 라이즈(RIIZE)까지 열 개 팬덤에 속한 팬들이 얼굴을 공개하고 출연해 실제 팬 활동에 밀착한 미션으로 경쟁을 벌이는 시리즈다. 콘서트 티켓팅부터, 러닝머신 위에서 오류 없이 응원법을 외치거나, 앨범이 담긴 택배를 빠르게 ‘택배깡’하는 미션까지. 프로그램이 비춘 팬들의 활동은, 그동안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사실 노동이었음을 시청자들이 체감하게 했다. 팬들이 몸에 새기듯 익혀온 감각과 순발력, 그리고 팬덤이라는 집단이 쌓아온 노하우가 마침내 경쟁 종목이라는 이름을 얻은 셈이다.

이러한 노동은 비단 예능 미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이돌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리어 하이*로 이어지고, 아이돌을 향한 논란의 사실관계를 가리고 스스로 바로잡는 문화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팬은 필연적으로 너무 많은 노동을 하느라 소모돼야만 했다. 다만, 최근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팬이 소비자를 넘어 문화를 함께 만드는 주체로 작동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팬은 정말 ‘공동 생산자’로서 기능하고 있을까? 몇 가지의 사례를 통해 동시대의 팬덤이 몰입하는 일을 들여다본다.
* 커리어 하이(career-high): 개인의 경력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낸 시점 또는 그 성과


(좌) <팬덤스테이지> 포스터, (우)웨이브(Wavve) 프로그램 소개 페이지
(출처: 웨이브(Wavve))
 

 

글로벌 시대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2019년쯤, 빅히트 뮤직(BIGHIT MUSIC)의 아티스트·콘텐츠 마케팅 전략 직군 채용 사이트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다. 당시 해당 직군의 사전 과제는 ‘방탄소년단(BTS) 해외 시장 성과와 그 이유를 발표자료로 만들어 설명하시오’였다. 2019년은 방탄소년단이 그래미 어워즈의 ‘최우수 알앤비(R&B) 부문’ 시상자로 초대되며 ‘글로벌’과 ‘K’라는 단어가 뒤얽히기 시작한 해였다. 빅히트 뮤직 소속으로 그해 3월에 데뷔한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또한,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활동하는 건 예견된 공식 중 하나였다. 실제로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데뷔 앨범 〈꿈의 장: STAR〉은 빌보드 200에 140위로 진입하며 그 공식을 증명해 보였다. 케이팝 아티스트의 데뷔 앨범이 빌보드 200에 진입한 건 투모로우바이투게더가 처음이었다.
 


2019년  ‘제 61회 그래미 어워즈(61st GRAMMY Award)’ 행사에 참여한 방탄소년단
(출처: 빅히트엔터데인먼트)

 

이런 성취들에 회사, 아티스트, 팬덤의 기여도를 가리는 건 큰 의미가 없다. 팬덤이 가장 원하는 바는 세 축이 이뤄내는 시너지다. 그러려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운동장이 기울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다시 ‘방탄소년단의 해외 시장 성과와 그 이유’라는 과제를 떠올려보면, 회사와 팬은 서로 다른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풀어감에 있어 완전히 다른 기승전결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회사는 이 성과를 치밀한 프로모션 전략과 축적된 데이터를 동원하며 설명하지만, 팬의 입장에서 이는 지난 몇 년간 투표, 스트리밍으로 대표되는 여러 전통적 노동을 통해 쌓아 온 구체적 실천의 결과였다. 물론 아티스트는 버블(bubble with STARS) 메시지, 음악방송 1위 소감, 라이브 방송에서 ‘이 모든 게 팬들 덕분이다’라며 수고를 알아준다. 그러나 정작 그 노동을 기획하고, 집계하며, 시장 성과로 환산하는 회사는, 팬을 성과의 근거로만 인용할 뿐 함께 전략을 짜는 협업의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결국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회사와 팬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엇을 이뤘는가’라는 결과만 공유할 뿐 ‘어떻게 이뤘는가’의 과정은 함께 나누지 못한다.

 

크레딧 없는 노동: 나무위키에 써 내려가는 서사

꾸준히 아이돌 문화에 대한 소설을 써온 아사이 료(Asai Ryo)의 신작 소설 『인 더 메가처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된 9인조 보이그룹의 전략을 짜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중, 게임 업계 출신의 한 마케팅 전문가인 구니미는 ‘환각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강렬한 서사가 필요’하다는 걸 짚는다. 해당 도서에서는 지금 시대에 필요한 팬을 ‘제공된 서사에 기꺼이 올라타 몰입할 수 있는 사람. 서사와 자기 자신의 경계가 모호해질 정도로 공감 능력이 좋고, 무엇이든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 몰입한 나머지 스스로 시야를 좁혀갈 수 있는 사람. 나아가 자발적으로 그것을 퍼뜨리고 전파하기까지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케이팝 팬들의 상징이 된 응원봉
(출처: SM 엔터테인먼트)

 

이러한 사례가 가장 잘 드러나는 팬덤 노동은 아마 팬들의 ‘나무위키(namuwiki) 편집하기’일 것이다. 나무 위키 편집은 가장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서사에 밀접해 있는 형태의 팬 활동이다. 익명의 작성자는 어떤 정보를 작성할 때 나름의 팩트 체크를 거쳐 관련 자료를 하이퍼링크로 연동해 두는 건 물론, 논란의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운 사안은 ‘판단이 갈릴 수 있다’는 점까지 문서 안에 명시해 둔다. 실제로 나무위키의 편집 규정을 보면, 연예인 문서에서 팬덤이나 안티 팬덤과 관련된 논란·사건사고는 정해진 요건을 갖췄을 때만 중립적 관점으로 서술할 수 있도록 별도의 기준을 정해두고 있다. ‘아이돌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를 두고 팬덤과 안티가 실제로 규정 경계 너머에서 공존하는 공간이 바로 나무위키다.  

하지만 이 팬 활동 뒤에는, 정작 그 문서를 채워온 개별 팬들의 이름은 남지 않는다는 역설이 있다. 다른 팬 활동, 예를 들어 홈마(홈마스터)는 자신이 찍은 사진에 워터마크를 남기며 명예를 얻고, 총대는 예정된 프로젝트를 마친 후 소속된 팬덤으로부터 그 수고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나무위키 문서를 고쳐 쓰는 팬에게는 그러한 흔적과 대가가 남지 않는다. 익명을 보장하는 활동 특성상 본문을 한 명의 팬이 주도적으로 작성한 것인지 공동의 작업인지조차도 불분명하게 남는다.

즉, 익명성 기반의 ‘무크레딧(無credit) 노동’이 이뤄지는 이유는 팬에게 있어 아이돌에 대한 서사의 편집권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비 팬은 그룹의 이름을 포털에 검색해 마주하게 되는 나무위키 문서를 통해 기본 프로필, MBTI 뿐만 아니라 아이돌에 대한 논란까지 학습한 뒤에야 팬덤에 진입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만약 앞서 이 문서를 채워 넣은 팬의 부지런한 편집 노동이 없었다면, 신규 유입자에게 팬덤이라는 공론장은 애초에 발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적 인정조차 거의 없는 이 노동은 그래서 가장 순수하지만 강력한 형태의 서사 공동 편집이자 대가 없이도 계속되는 사랑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적인 3분을 공공재로 만드는 노동: 영통팬싸 영상 배포

코로나19 시기에 자리 잡은 영통팬싸(영상통화 팬사인회)는 본래 팬과 아이돌 단둘이 나누는 지극히 짧고 사적인 대화 문화이다. 팬은 제한 시간이 다 됐음을 알리는 알람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러나 팬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몇 분 남짓한 이 짧은 만남을 녹화하고 자막을 달아 SNS에 공유하는 것을 하나의 관행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지극히 사적인 1:1 소통이 팬덤 전체가 공유하는 공공재로 자리 잡게 됐다. 이러한 노동은 순발력, 센스, 말을 고르는 태도 같은 아이돌의 무대 밖 매력을 팬싸라는 테이블 너머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 재치 있는 답변을 내놓거나 팬의 요청을 주저 없이 들어주는 아이돌의 모습은 X, 인스타그램, 더쿠, 인스티즈 등의 커뮤니티에서 수만 번 공유되며 해당 아이돌의 이미지를 새롭게 빚어내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이 팬덤 노동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팬은 자신이 산 3분을 독점하지 않는다. 그 짧은 순간을 편집하고, 맥락을 설명하는 글을 덧붙이고, 다른 팬들이 볼 수 있도록 손수 배포한다. 이 역시 대가 없는 반복 노동이지만, 그 목적은 효율이 아니라 ‘내가 목격한 귀한 순간을 다른 팬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있다. 사적 소비의 순간을 공동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이 작은 편집 행위야말로, 팬이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공동 생산자로 거듭나는 순간을 보여준다.

여기서 편집, 배포, 맥락화라는 세 가지 능력은 단순한 곁가지 기술이 아니다. 팬덤 내부에서는 이 능력이 고맥락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짧은 표정 변화나 특정 멘트 하나에 담긴 의미를 팬끼리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아채지만, 그 맥락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몇 초짜리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점을 포착한 팬은 짧은 영상에 자막을 달고 자신이 아는 맥락을 덧붙여서 일상어로 풀어낸다. 이 저맥락화 작업이야말로 잠재적 팬을 실제 팬덤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관문 역할을 한다. 즉 오늘날의 팬은 아이돌이라는 대상을 소비하고 반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고맥락의 애정을 저맥락의 언어로 번역해 유입 장벽을 낮추는 편집자이자 큐레이터로서의 역량까지 갖춰야 하는 존재가 됐다.

 

팬이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면

다시 〈팬덤스테이지〉 이야기다. 프로그램의 첫 번째 미션은 제한시간 5분 내에 케이스포 돔(KSPO DOME)에서 인당 최대 2석의 좌석을 예매하는 것이었다. 티켓팅 미션은 주요 국내 티켓 플랫폼 중 하나인 예스이십사(YES24)에서 진행됐는데, 원하는 좌석을 선택했더라도 보안 문자를 입력하고 결제까지 완료해야 했다. 해당 미션에서 이 프로그램이 중요하게 포착한 것은 17시 00분 00초에 티켓이 오픈됐을 때 띄워둔 페이지 내에서 자동으로 ‘예매하기’ 버튼이 활성화 되는지, 혹은 팬이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의 여부였다. 참여자들중 최애 그룹의 공연을 예스이십사에서 예매해 온 마이데이(My Day, 데이식스 팬덤)는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팁을 다른 팬덤들에게 너그러이 알려줬다. 이는 놀(NOL)이나 멜론티켓과는 다른 예스이십사 만의 예매 방법이 존재하며, 팬덤마다 숙련된 노동의 방식이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팬덤스테이지〉의 티켓팅 미션
(출처: 웨이브(Wavve) 영상 캡처)

 

이 프로그램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동안 이름도 얼굴도 남기지 못한 채 익명으로 흩어졌던 노동에 처음으로 크레딧을 준다는 데 있다. 티켓팅을 위한 작은 팁조차도 ‘마이데이가 알아낸 노하우’ 로 명시되는 순간, 그동안 팬덤 내부에서만 돌던 암묵지였던 것이 처음으로 출처를 가진 지식이 된다. 다만, 방송이 무대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고 대결로 환산할 수 있는 부분인 속도, 정확도, 팀워크 같은 것들이다. 결국〈팬덤스테이지〉가 보여준 것은 산업이 마침내 팬의 노동에 유·무형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는 신호이자, 동시에 그 인정이 아직 극히 일부에게만 선택적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팬은 오래전부터 이미 공동 생산자였고, 산업은 이제야 그중 일부에게만 이름을 붙여주기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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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발행인 박창식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기획·편집 이소민, 김정현
디자인 디자인인트로
발행일 2026년 9월 23일
E-ISSN 2714-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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