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성숙은 왜 사진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까?
1925년 9월 1일 북경의 내우2구 구역의 경사(북경)경찰청에서는 한국인 김성숙 등이 사진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아 상세한 조사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냅니다. 관련당안 * 문서명 : 京师警察厅内右二区分区表送韩国人金星淑等不遵令呈交相片请核办一案卷 한국인 김성숙 등이 사진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아 경사(북경)경찰청 내우2구 분구에서 상세히 조사를 요구하는 공문서 * 소장처 : 북경시당안관 * 당안번호 : J181-019-46084 * 생산일자 : 1925.09.01 * 종료일자 : 1925.09.01 한국인 김성숙... 혹시... 독립운동가 김성숙 선생님이 아닐까요?!!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 (출처: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자료를 찾아봅니다(타닥타닥... 급히 검색을... 기대기대) 1923년 일본경찰의 탄압이 심해지자 젊은 승려 5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입학하여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일하였다. 또한, 장건상(張建相)·양명(梁明)·김봉환·이낙구(李洛九)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을 발간하여 사회운동단체의 종파적 분열을 반대하는 운동을 폈으며, 신채호(申采浩)·유우근 등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가담하였다. 1925년에는 문학단체를 결성하여 잡지 『황야』를 펴내기도 하였으나, 그 해에 북경 정부의 추방을 받고 광둥[廣東]의 중산대학(中山大學)으로 옮겼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성숙(金星淑))] (👉🏻 링크연결) 핫! @_@!!! 김성숙 선생님은 1919년 양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시다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5년까지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럼 북경시당안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기록과 연관있는 분이 바로 독립운동가 김성숙 선생님이 아닐까요?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1898-1969)선생님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어릴 때 이름은 성암(星巖), 호는 운암(雲巖), 성숙(星淑)은 법명입니다. 19세 때 용문사에서 출가해 1919년 양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의 형을 받았습니다. 1922년 승려의 신분으로 사회주의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중국에서 항일투쟁 하실때의 모습 (출처: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1923년 일본경찰의 탄압이 심해지자 25세 때 스님 신분으로 중국 북경에 유학한 뒤 조선의열단에 가담하게 됩니다. 1925년에는 문학단체를 결성하여 잡지 『황야』를 펴내기도 하였으나, 그 해에 북경 정부의 추방을 받고 광둥[廣東]의 중산대학(中山大學) 정치학과로 옮겨 1927년 졸업하게 됩니다. 이후 상해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국립제1중산대학 학적표(출처: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였으며, 다음 해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합니다. 1938년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이 되었습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였으며,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환국하여 여운형(呂運亨)과 같이 좌우합작을 지지하였습니다. 이후 이승만 정권과 5·16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혁신정당의 지도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성숙(金星淑)) 1964년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자신보다 남을 돌보던 운암 김성숙 선생님이 말년에 가난과 병고로 지내는 것을 안 지인들은 선생님을 위해 11평짜리 방 한 칸을 마련합니다.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 ‘비나 피하라’는 뜻으로 피우정(避雨亭)이라 명명하였습니다. 피우정 집터 그림 (출처: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운암 김성숙 선생님은 1969년 4월 12일 서거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다시 당안으로 돌아와서, 이 당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김성숙이 맞다면, 1925년 9월 1일 무슨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현재 북경시당안관에서 온라인으로는 원문을 공개하고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렵습니다. 혹 이 기록을 보신 분이 있으시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관련링크]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 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