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비스트의 발견
문익환 목사의 옥중편지에서 발견한 윤동주 시인
아카이브센터
게시일 2022.08.22  | 최종수정일 2022.08.24

각자의 데이터로만 저장되어 있던 기록이 서로 연결점을 갖게 되면 새로운 의미와 지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키비스트의 발견>은 여러 아카이브에서 공개하는 기록과 콘텐츠를 살펴보면서 발견한 연결점을
새로운 맥락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코너입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문익환 목사의 활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부터 1993년까지 총 6차례에 걸쳐 11년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는 동안 세상 밖으로 801건의 옥중편지를 띄워 보냈습니다. 이 편지들은 부인인 박용길 장로에 의해 잘 간직되어 오늘날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문 목사의 옥중편지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절절한 심정으로 자주 호명되는 인물은 윤동주 시인입니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문 목사와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절친한 벗입니다. ‘윤동주(또는 동주)’로 검색되는 40여 건의 옥중편지 기록물을 통해 문 목사의 마음속에 윤동주 시인은 어떠한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동주가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나처럼 편지를 쓸 수 있었다면

 
<1979. 10. 31 몸과 마음을 하나되게 하는 요가> 중 일부 아카이브에서 보기
저는 ‘최악에서 최선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요. 얼마 전에 (윤)동주 생각을 했습니다. 동주는 일본의 후쿠오카(福岡) 감옥에 수감된 후 눈감기까지 그렇게도 그리운 어머니를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저처럼 우유, 계란, 사과를 마음대로 사 먹지도 못했어요. 많은 아름답고 값진 시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동주에 비하면, 저는 10을 살 사람이 5를 손해 보면서 +5를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주야말로 아무 보장이 없는 최악을 살다 간 거죠. 그런데 그 동주가 -10을 +10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100, +1000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값있게 사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보람찬 것이냐는 것을 죽음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겠어요. 어머님, 동주를 생각하시고 동주 어머니를 생각하세요. 부디 힘을 내세요.(1979. 10. 31 몸과 마음을 하나되게 하는 요가)

이 옥중편지는 문 목사가 1976년 3.1절을 맞아 민주구국선언 성명서를 명동성당에서 발표한 후 구속되어 22개월 만에 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가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폭로한 죄로 재수감되었을 무렵 어머니께 드린 편지입니다. 감옥에 갇힌 61세의 문 목사는 ‘최악에서 최선을’ 살려고 애쓰면서 27세에 일본 감옥에서 숨진 벗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처지는 똑같지만 ‘저처럼’ 우유, 계란, 사과를 사먹지도 못했던 벗의 마지막 순간을, 그의 아름답고 값진 시들이 빛을 보지 못한 채 땅에 묻힌 것을 통탄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값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하면서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동주를 생각하시고 동주 어머니를 생각하세요. 부디 힘을 내세요”라는 위로와 용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이후 네 번의 투옥생활을 하는 동안 문 목사가 쓴 옥중편지에서도 후쿠오카 교도소에 갇힌 윤동주가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수감 시절인 1991년 12월의 편지에는 “이번 들어와서 벌써 90통이나 되는 편지로 사랑을 그리움을 적을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요? 동주가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나처럼 편지를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리오. 통재라. 통재라. 통재라.” 하고 편지 한 장 주고받을 수 없었던 벗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의 편지에는 교도소 안에서 스스로 삭발을 단행하면서 “머리를 빡빡 깎은 유난히 크고 잘생긴 동주의 머리가 눈앞에 나타났어요. 민족해방을 못 보고 빡빡 깎은 머리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눈을 뜬 채 마지막 숨을 내쉰 동주가 바라던 민족해방이 아직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울컥해졌어요”라는 글이 담겨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문 목사는 윤동주 시인과 동병상련의 슬픔을 느끼는 동시에 그의 값진 죽음에서 용기를 낼 힘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 목사는 또 다른 편지에 그러한 심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동주가 없는 문익환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스물아홉 살 젊음으로 동주는 지금도 제 옆에, 아니 제 속에 살아 있습니다.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혼연일체가 된 그의 시정신이 그가 자리를 비운 이 역사를 살아가도록 늘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빌면서 지난 46년을 살아온 셈입니다. 동주와 함께, 동주의 몸이 되어, 동주의 마음으로.
(1990 6. 1 압축된 문익환의 자서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1986. 8. 5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싸움> 중 일부 아카이브에서 보기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읊조리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의 영혼도 끝까지 순금 같은 영혼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어두워 가는 조국의 역사를 빛내고 있는 것 아니겠소?(1986. 8. 5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싸움)
 
해환(동주)이는 한범이 앞에서 열등감을 느꼈고, 나는 그들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면서 자랐는데, 그들은 가고 제일 못난 제가 남아서 그들이 꿈꾸던 민족해방을 위해서 살려니 숨이 찹니다.(1986. 12. 9 너 나의 사랑 샛별아!)

동주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면서 살아갈 때, 그 다짐을 하고 그 다짐으로 살다가 죽은 동주는 그대로 양심인 거지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 거울 앞에서 너나없이 마음가짐, 몸가짐을 바로잡는 것 아닙니까?(1986.12.12. 고민과 함께 자라는 인생)

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며 살다가 한 점 부끄럼 없이 죽었습니다. 준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는다”며 살다가 우리 모두의 자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동수 군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벗어 버릴 수 없는 부끄러움을 뒤집어쓰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이미 뒤집어쓴 부끄러움을 얼마나 빨리 벗어 버리느냐는 데 있습니다.(1989. 8. 15 제3세계의 희망, 세계의 횃불이 될 한민족)

1986년 무렵 이후 문 목사의 편지에는 유독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서시」의 첫 구절이 자주 등장합니다. 1986년은 이동수 군을 비롯한 4명의 서울대생이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을 하거나 한강에 투신하는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었으며 1987년에는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죽음을 맞은 해로, 문 목사는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 ‘벗어버릴 수 없는 부끄러움을 뒤집어쓰고 말았다’고 토로합니다. 또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면서 죽은 윤동주 시인은 젊은이들에게 양심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라고 피력합니다. 한편 자신은 윤동주 시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자랐는데 “그들은 가고 제일 못난 제가 남아서 그들이 꿈꾸던 민족해방을 위해서 살려니” 숨이 차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심경 때문인지 1992년 문 목사는 꿈속에서 밤하늘에 별들이 모여서 커다란 십자를 이루는 모양을 보았는데 속으로 ‘저것은 동주의 별이구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문 목사에게 윤동주의 삶과 시는 어두운 시대 현실을 비추는 빛나는 별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주의 눈길 때문에 시를 포기할 수 없어

 
<1990. 5. 7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악순환을 청산한 곳에만 평화의 왕국이 가능하다> 중 일부 아카이브에서 보기
형은 시집 한 권 남기고 갔는데, 난 다섯 번째 시집을 내게 되었군요. 꼭 죄를 짓는 것 같은 심정이군요. 나같이 평범한 시인도 감옥에 들어오면 시가 쏟아져 나오는데, 형같이 타고난 시인이 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억울한 죽음을 날마다 숨 쉬며 얼마나 절절한 시들을 짓씹었을까? 그 시들이 살아나왔으면, 형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습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었을 텐데, 그 절절한 시들이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간 걸 생각하면 난 죽고만 싶은 심정이 된다오. (1991. 7. 20 통일–우리가 추구해야 할 민족적인 진실)
 
문익환 목사가 북한에 다녀온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전주교도소에서 복역할 당시 쓴 편지입니다. 73세의 문 목사는 옥중에서 다섯 번째 시집 『옥중일기』를 출간한 후 형(윤동주 시인)에게 죄스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지 않고 살았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습작에 지나지 않았을 거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유독 마지막 수감 기간에 쓴 옥중편지에는 윤동주 시인이 살아 있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자주 표출되고 있습니다. 문 목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그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윤동주 시인이었다면서 “네가 살았더라면 (…) 동주가 살아 있다면, 난 시인이 안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991. 8. 16 아! 동주가 살아 있었으면. 아! 준하가 살아 있었으면) 이 말을 뒤집어보면 목회자의 길에서 사회운동가의 길로 선회한 그에게 펜을 쥐어주고 시를 쓰게 한 장본인은 윤동주 시인이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만큼 윤동주라는 시인은 문 목사에게 존경과 의지의 대상이었습니다. 다음 옥중편지들은 문 목사가 윤동주의 시와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정말 가치 있는 소설은 그대로 실화여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실화를 가급적 그대로 전하면서 문학적인 색깔을 최소한도로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나 성근이가 하는 연극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 시대는 말로 하는 속임수에 진저리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넋두리 아닌 넋두리」는 실화이다. 동주의 「서시」도 실화니까 그렇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겠니?(1989. 5. 20 민족 문제로 아파한 어머니의 마음)

오늘 아침 누가복음 13장 33절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이 구절이 동주 「서시」의 한 구절이라는 걸 발견했군요.(1990. 5. 7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악순환을 청산한 곳에만 평화의 왕국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해보세요.” 이런 격려나 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전문가적인 분석과 비판이 있어야 다시 몸을 추스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시를 포기하고 싶어도 동주의 눈길이 있어서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1992.12.5. 동주의 눈길 때문에 시를 포기할 수 없어)

 
문 목사는 문화예술계에 종사하고 있는 두 아들 호근, 성근에게 윤동주의 「서시」와 같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야말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가 그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에 감동적이라는 뜻이죠. 그런가 하면 「누가복음」 성경 구절 속에서 「서시」의 7행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시 구절을 발견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옥중 생활 기간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는 요즘 시에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과 함께 ‘전문가적인 분석과 비판’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시를 포기하고 싶어도 ‘동주’의 눈길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다고 덧붙인 말에서 오래전부터 문 목사의 삶 속에 시인 윤동주가 함께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이와 같이 문 목사의 옥중편지 속에 담긴 윤동주 시인을 살펴보니, 자신의 감옥 생활은 윤동주 시인이 겪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슬픔, 윤동주의 「서시」는 시대의 양심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는 인식, 진정 아름다운 시는 윤동주와 같이 시와 삶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 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짧은 생을 마감한 벗에 대한 그리움과 부끄러움을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했던 문 목사의 의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문 목사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쓴 <마지막 시>라는 짧은 시에도 ‘동주’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쓴 시인지는 알 수 없으나 1978년 두 번째 시집 『꿈을 비는 마음』에 수록되었으며, 아카이브에는 박용길 장로의 붓글씨로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시   나는 죽는다 나는 이 겨레의 허기진 역사에 묻어야 한다 두 동강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 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 아- 그 말만 생각하자 그 말만 믿자 그리고 동주와 같이 별을 노래하면서 이 밤에도 죽음을 살자 늦봄 글 봄길 씀
마지막 시 전문 아카이브에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