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하나되게 하는 요가

바우에게

 

네가 세상에 와서 벌써 1년이 지났구나. 첫 돌상을 받는 자리에 이 못난 할아비는 있어 주지 못했구나. 그래도 뭐 괜찮지? 안 그래? 그날 나는 네가 만지던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네 손의 따뜻한 온기를 매만지며 네 목련꽃 웃음소리가 내 온몸에서 피어나는 것을 보며 하루를 즐길 수 있었으니까. 너는 내 축복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구? 네가 몽땅 우리의 복덩어리니까. 우리 가정의 복덩어리에 멈추는 것이 아니고 온 겨레의 복덩어리로 태어난 것이니까. 네 목련꽃 맑은 웃음이 지금도 이 안양까지 들려오는구나. 웃어라, 웃어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웃음꽃을 피워라.

이 할아비는 요새 요가라는 것에 홀딱 빠졌다. 요가란 결국 네 잠 잘 때의 숨소리라고 하면, 뭐 그런 거 가지고 수선이시냐고 하겠지? 그래서 예수님은 어른들더러 도로 어린애가 되라고 하셨던 거지. 쌕쌕 깊이 잠든 네 숨소리에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나는 요새 가슴으로 느끼고 있거든. ‘그러면 하늘나라라는 것도 뭐 대단한 게 아니군요?’ 네 말이 맞는다. 그게 무슨 그리 대단한 게 아닌데, 어른들은 그걸 가지고 법석이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엎드려 자리 기도를 하고는 고요히 앉아서 네 숨소리를 따라 나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고요히 내뿜다 보면 그 고요한 숨소리가 네 숨소린지 내 숨소린지 모르게 된단다. 나는 그 숨소리만 듣고 있는 거지. 나는 어느 샌 지 땅의 숨소리, 하늘의 숨소리, 먼저 간 이들의 숨소리, 지금 살아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숨소리, 예수님의 숨소리, 석가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거란다. 그리고 그건 하느님의 숨소리이기도 하구. 문득 그건 또 이슬 머금은 풀잎의 맑은 숨결로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거지. 후끈하게 전신의 피가 뜨거워 오고 온몸의 세포들은 드르륵 드르륵 창문을 열고 묵은 먼지를 털어 내고 아침 햇빛을 맞아들인단다. 이 할아비가 말이다. 그러노라면 땅속 깊은 데서 새 노래가 울려 나오며 바위는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와짝 뜨고는 목련꽃 웃음을 날리고 창밖에선 비둘기 떼가 푸드덕 하늘로 날아오르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내가 무슨 허황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너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 거다. ‘할아버지, 그게 꿈이지 뭐예요?’ 그래, 네 말이 맞는다. 네 할아비는 환갑 진갑 다 지나고도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이런 꿈속에 곧잘 잠기곤 하지. 그러나 그게 바로 너랑 같이 사는 일이니 얼마나 좋은 일이니? 나는 그 순간이 제일 기쁠 때란다. 나는 그때 진정 하늘나라의 기쁨에 홀랑 빠져 버리는 거지. ‘할아버지, 정말 그렇게 행복해?’ 그래, 할아버지는 행복하다. 나는 이 행복을 네 목련꽃 웃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뿌려 주고 싶어 미칠 것만 같다. ‘나, 할아버지 그 미치고 싶은 마음 알 거 같아.’ 그래, 너만 내 마음 알아준다면 이 할아비는 금방 숨이 넘어가도 한이 없다. 이제 그만, 내일 아침 또다시 너랑 같이 숨 쉴 것을 약속하면서.

 

할아비 씀

 

바우 할머니에게

 

내가 나가면 요가 도장을 차리고 싶다고 말했던가요? 바우에게 잠꼬대 같은 말로 요가 이야기를 했지만, 요가란 별게 아니라오. 바우처럼(잠든) 순하게, 천천히, 무리 없이 배로 깊숙이 숨을 쉬는 거니까. 지금부터 시작하세요. 숨소리밖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기울여 그 소리만 들으면서 깊이 숨을 쉬는 것이 요가의 알파요 오메가라오. 요가란 ‘하나가 됨(union)’이라는 뜻인가 본데, 인도에서는 흐트러졌던 마음들이 하나로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요가는 정신 통일을 이룩하는 길이라고들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깨친 것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 그리고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숨소리’라는 것이오. 그리되면 물론 갈래갈래 찢겼던 마음도 하나가 되지요. 조국 통일을 우선 내 몸과 마음으로 시작하는 거지요. 내 몸과 마음에서 이룩하는 거라고 해도 되겠지요. 즉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죠.

오늘 아침에 성경을 읽는데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라는 예수님의 탄식 소리가 나오더군요.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몸과 마음의 찢김을 말하면서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고 했지 않았소. 이건 하느님의 마음이 몸이 되지 않은, 구원받기 전의 저주받은 상태가 아니겠소? 나는 요가를 하면서 상극 관계에 있는 몸과 마음을 하나 되게 하는 훈련을 쌓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오. 성육신(成肉身)의 신앙을 내 몸으로 터득한다고 할는지! 모든 불순한 것을 우선 내보내는 일이 중요하지요. 내가 깨친 대로는, 요가 호흡법은 숨을 다 내쉬는 것으로 시작되는 거예요. 그리고 신선한 공기, 맑은 마음을 뱃속에 한껏 들이마시는 거죠. 내게는 예수의 팔복 가운데서(여기까지 썼는데 바우 첫돌 사진이 들어왔어요. 아, 아, 아, 소리밖에 말이 안 나오는군요) 마음이 맑은 사람이 내게는 제일 찌릿 울려오는 것이라오. 맑음, 곧 순수가 나는 좋아요. 그래서 나는 누가 뭐래도 순수예술 주의자라고 자부하는 거지요. 그런데 요가는 마음과 함께 몸, 몸과 함께 마음을 맑게 해주는 걸 깨달았어요.

호근이가 담배를 끊는 건 참 잘하는 일이오. 니코틴으로 정신 차릴 수 없이 탁해진 세포들이 맑아지고 싶은 걸 마음이 알아서 담배를 끊을 뿐만 아니라 신선한 수유리의 공기를 한껏 마실 때, 몸이 얼마나 맑아지고 얼마나 좋아할까요? 요가란 이렇게 몸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알아주고 아끼고 떠받드는 상태에 이르는 거죠.

몸은 어떻게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의 맑음과 기쁨을 도와주는가요? 마음이 어떻게 몸에 메아리쳐서 몸의 기꺼운 반응을 받는가요? 머리가 흐리고 아파서 생각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안타까울 때, 몸은 ‘걱정 마세요’ 하면서 고르고 깊은숨을 쉬면서 가벼운 운동을 해주는 거지요. 그러면 금방 머리가 산뜻해지거든요. 마음이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위해서 몸을 좀 고생시켜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몸은 ‘걱정 마세요’ 하면서 그 고생을 아무 어려움 없이 거뜬히 겪어 내고는 그 보람을 마음과 함께 누리는 거죠.

그동안 기독교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못 벗어나고 몸과 마음을 적대 관계에서만 생각했던 게 아닐지? 몸은 영혼의 감옥이 되어 왔거든요. 몸과 마음은 상극이 아니라 합일, 조화, 협력 관계에 있어야 할 것이란 말이오. 억울한 일이었지요. 이렇게 해서 건강법으로 시작한 요가가 나의 인생이 되고 종교가 되어 가는군요. 그래서 요새는 마음이 숨 쉬는 건지, 몸이 숨 쉬는 건지, 몸이 움직이는 건지, 마음이 움직이는 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니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같이 숨 쉬고 같이 움직이는 상태에서 나를 완성해 가는 거요.

이렇게 이룩되는 합일은 우주 삼라만상과의 합일이요, 남과의 합일도 되는 거죠. “내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이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고 하시던 예수님의 세계를 번쩍번쩍 건너다보는 거죠. 예수의 세계가 내 세계를 번쩍번쩍 비추어 준다고 해도 되겠죠. 그래서 그런지 요새는 요가를 하면서 숨 쉬고 몸 움직이는 것이 퍽 정성이 드는 일이 되어 가는 것 같군요. 옛날 사람들이 아침에 동쪽 하늘에 불쑥 솟는 해를 향해서 두 팔을 높이 들었다가 경건히 숨을 죽이고 땅에 엎드리듯, 사제들이 제단 둘레를 숨죽이고 몸 움직임 하나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움직이듯, 때로는 은숙이가 십 리 밖의 절벽을 쩌렁쩌렁 울리다가는 낭떠러지 끝에 핀 진달래 꽃잎을 미풍이 살짝 건드리듯 노래 부르듯, 명필의 붓끝이 부드러우면서도 꿈틀 획을 내리 비끼듯 그렇게 숨 쉬고 몸을 움직이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 내가 도사가 다 된 것 같은데, 이제 그런 경지를 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오. 어떤 순간에는 그걸 느끼기도 하구요.

이런 요가의 깨침이 국토와 역사와 통일 문제에 어떤 조명을 던지느냐는 것을 쓰고 싶어도 이제 지면이 없군요. 어머님께도, 아버님께도 몇 말씀 올려야 할 테니까. 할아비 닮은 이마, 아비 닮은 귀를 가진 우리 손자 바우의 친구로서 바우의 웃음소리 속에서 당신의 몸과 마음도 기쁨과 보람 속에서 더욱더 발랄하게 피어나기를 빌겠소.

 

당신의 사랑

 

바우의 증조할아버님, 할머님께

 

고국산천과 자식들과 친지가 그리워 돌아오시고 싶으시면서도 못 돌아오시는 아버님의 심정,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 오는 것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아버님과 함께 하느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 아버님과 함께 하느님 앞에 앉아 있으면 기도하는 조바심이 말끔히 사라지는 걸 느낍니다. 아버님의 기도에 전적인 신뢰를 걸고 귀를 기울이고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시간인지 아시겠어요? 너무너무 벅찬 감격입니다. 아무튼 속히 길이 열려서 다시 만나 뵈올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희 건강이 걱정되었는데,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에 정말정말 안심했습니다. 영환의 편지를 받아 보았으면 정말 기쁘겠군요. 지금도 하던 장사를 그냥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예학이는 병원에 나가구요? 영금이 속히 논문을 끝내고 성수의 공부가 다시 계속되어야 할 텐데.  문규 졸업 사진은 서울에서 받았어요. 이제 가을이면 대학생이 되는가요? 어느 대학에 진학? 모두 모두 보고 싶은 얼굴들. 그래도 눈만 감으면 환히 다 보이고, 마음으로는 서로 위하고 아끼고 기도로 밀어주고 있으니까 신앙이 고마운 게 아니겠습니까? 김(재준) 목사님께 각별히 문안드려 주십시오.

저는 오늘 아침 마가복음 12장을 읽다가 34절 “네가 하늘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꽝 하고 가슴을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신앙에 관한 바른 앎은 천국 문턱까지밖에는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문턱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행동은 무엇이겠습니까? “네 가진 것을 다 팔아서……”라는 예수님의 말씀, “네 부모 처자를 버리고……”, 또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뜻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때야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가치를 얻는다는 거죠. 특히 어머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주세요. 저희를 잃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그때에야 30배, 60배, 100배의 기쁨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잡수셔야 마음 가볍게 203장을 노래하면서 감사에 넘치는 삶을 사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저는 ‘최악에서 최선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요. 얼마 전에 (윤)동주 생각을 했습니다. 동주는 일본의 후쿠오카(福岡) 감옥에 수감된 후 눈감기까지 그렇게도 그리운 어머니를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저처럼 우유, 계란, 사과를 마음대로 사 먹지도 못했어요. 많은 아름답고 값진 시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동주에 비하면, 저는 10을 살 사람이 5를 손해 보면서 +5를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주야말로 아무 보장이 없는 최악을 살다 간 거죠. 그런데 그 동주가 -10을 +10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100, +1000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값있게 사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보람찬 것이냐는 것을 죽음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겠어요.

어머님, 동주를 생각하시고 동주 어머니를 생각하세요. 부디 힘을 내세요. 저는 이렇듯 뜻있게, 값있게, 보람 있게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뿌듯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동주와 같이 땅에 묻힌 아름다운 말들을 하나하나 그의 언덕에서 파내어 어설프게나마 불러 보고 싶은 마음이 때때로 눈물로 허물어질 때면 정말 죽고 싶도록 슬퍼지지만, 그래도 나와 (김)정우가 남았다가 동주의 가슴에서 울려오는 노래를 불러 주는 일이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동주의 무덤을 보러 가기 위해서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굳게 서 주세요.

아들

 

창근 엄마

 

동환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에 안심이 되오. 나는 금년 겨울 춥지 않게 지낼 것 같은데 동환이는 좀 고생이 되겠지만, 경험이 있으니까 처음 같지야 않겠지. 단전 호흡법보다는 요가가 좋은데. 외롭겠지만 잘 참으리라고 믿어요. 한국에 시집올 때는 본래 고생하러 온 것일 테니까. 창근이는 내년에는 도미(渡美)할 건가? 영미 그림 편지는 안 기다리기로 했어, 아버지에게 정성을 써야 할 테니까. 태근이 한빛교회 성가대원으로 활약 중이라면서? 건투를!

 

 

은희에게

 

네 건강 진단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별고 없으리라고 믿기는 하면서도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니? 박(영신) 박사와 같이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소식, 희소식 중의 희소식이 아닐 수 없구나. 박 박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한얼, 한터도 이젠 잘 적응하고 공부도 잘하겠지? 오빠는 건강한 가운데 더없이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하느님께 감사해다오. 영치금으로 사과, 계란을 사서 잘 먹는다. 누가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 전에 시간 있는 대로 자꾸 써서 발표하는 것이 자신의 발전에도 좋고 겨레를 위해서도 좋은 일 아니겠니? 너는 막내라서 맨날 어리게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이는 서 있는 게 아니니까.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오빠

 

 

호근에게

 

네 편지 좋았다, 철학에서. 민중문화에 관한 네 소신을 읽고 싶구나. 셰익스피어는 그 바쁜 연기 생활 틈틈이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너도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작품을 쓰도록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쓴다는 것은 습관이 되어야 하니까, 틈이 나야 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안 나는 틈을 내서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담배라는 습관과의 투쟁도 크지만, 시간과의 투쟁은 가장 큰 싸움 가운데서도 큰 싸움이다.

 

채원이, 몸조심뿐만 아니라 마음을 아름답게 가져야 한다. 생명의 신비를, 미지의 신비를 기다리는 시간의 기쁨이어라.

 

첫돌을 맞은 손자 바우와 아내에게 요즘 심취한 요가에 대해 얘기함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아버님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힘을 내시라고 격려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