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성공회 1892년, 워너 사제의 한강 물길 여행 이야기
1892, 워너 사제의 한강 물길 여행 이야기 <이야기를 시작하며> 1892년 가을, 조선선교회의 코프 주교는 워너 사제가 한강 물길을 탐방하여 강을 이용한 선교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9월 1일부터 약 두 달간 진행된 이 물길 답사 이후, 조선선교회는 마포나루 근처 동막에 선교센터를 마련하는 등 선교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워너 사제가 쓴 이 여행기를 모닝캄에서는 1893년에 발행된 37호, 39호, 40호, 42호, 모두 4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워너 사제의 여행길은 1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1925년 을축년 대홍수 같은 자연재해나 충주호나 소양강댐과 같은 인위적 개발로 인해, 지금 우리가 아는 한강의 모습과는 다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그때는 사람이나 물류의 이동 시 강이나 바다를 이용한다는 것은 지금의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과 같았기에, 강이나 바다를 이용하여 선교하겠다는 생각은 선교 전략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차나 기차를 이용하는 이동방식의 변화와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국토 분절 등으로 인해, 강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는 매우 달라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롭고 중요한 자료이기에 이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번역했습니다. 그림. 워너의 첫 번째 물길 답사 여정(김예인 그림) 워너 사제의 여행길은 서울 한양도성에서 떠나 한강-송파-광주(남한산성)-마재-(남한강 지역)-한여울-여주-흥원-생개(샘개)-가흥-목계-북창-탑두리-충주-오강(황강)-청풍-단양-죽령-풍기-영천-안동-영춘-(북한강 지역)-가평-신양감-춘천- 낭천을 답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간단히 도면상에 나타내면 그림과 같습니다. 참고로, 이 글 안에서 지명은 < >로 표기하고, 당시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있으면 주석을 달아 이해를 돕고자 했습니다. 우리 <모닝캄 아카이브 사업팀>이 이 여행보고서를 번역하면서 여기서 나타나는 여러 지명이 지금의 지도에서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조선후기(1860년대)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옛 지도를 참고하여 그 대강의 경로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료를 만드는 과정에 많은 분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특히 자세한 당시의 사회 풍속과 어떤 행위에 따른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역사 전문가인 역사유랑 이미경, 홍철의 선생님의 도움으로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워너 사제의 일기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워너 사제의 이번 여행의 목적과 범위에 관해 알리는 데 편지 지면을 좀 쓰고 싶습니다. 지도를 보면 조선에 강줄기들이 풍부하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강들이 뻗는 방향들을 볼 때, 이 강을 따러 배를 타고 다닐 수 있다면, 장차 우리의 선교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중부 지방의 강들이 이곳의 복음화 노력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워너 사제를 두 달 동안 파견하여 한강의 남쪽 갈래와 북쪽 갈래를 탐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남쪽은 부산으로 해서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강인 낙동강의 북쪽 한계가 어디인지를 알아보고, 서울 북쪽으로 흐르는 임진강의 동쪽 한계가 어디인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워너 사제는 삼판(당기는 배)을 빌리고 세 명의 승무원과 함께 그리고 시중꾼을 데리고 여권을 단단히 챙긴 뒤 출발했습니다. 9월 1일에 출발했으니 ‘모든 성인의 날’(11월 1일)에 우리가 재회하게 될 것입니다. 정규 우편이란 게 없는 지역을 여행하기 때문에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별 소식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1893년 2월에 발행된 모닝캄 32호에 있는 코프 조선성공회 초대주교(The Right Rev. Charles John Corfe, 한국명 고요한)의 편지에서 발췌) 워너 사제의 물길 여행 1 워너 사제의 물길 여행 2 워너 사제의 물길 여행 3 워너 사제의 물길 여행 4 워너 사제의 물길 여행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