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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장수통

    일제강점기 오늘날의 부산 광복로 일원은 개항 전후 부산으로 유입된 일본인이 '긴 길'이라는 뜻의 '장수통(長手通)'으로 불렀다. 장수통에는 일본인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판매하는 상점이 밀집해있었고, 각 상점마다 판매상품을 안내하는 깃발을 걸어두었다.

  • 대경성의 신풍경 - 용산역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16장 세트 중 용산역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다. 본래 용산역은 일제의 철도 노선망 계획에 없던 곳이었으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일제가 경의선 부설을 추진하며, 철도교통의 중요 관문으로 떠오른다. 그 결과 1906년 기존의 간이역을 신축한 역사가 신축되었는데, 본 사진그림엽서 속 모습이 2대 용산역의 모습이다. 2대 용산역은 1906년 개통한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경부선 서울역의 보조역으로 이용되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 대경성의 신풍경 - 창경궁 유리온실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제작 및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16장 사진그림엽서 세트 중 창경궁 유리온실의 모습을 수록한 기록이다. 유리온실 혹은 대온실로 불리는 창경궁 내 근대 서양식 정원은 1909년 11월 1일 개관한 곳이다. 1905년 외교권 박탈과 1907년 군권 강탈 등 일제는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했다. 이에 1909년 사실상 창덕궁에 유폐된 순종을 일제가 위로하고자 창경궁을 유원지로 개조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창경원으로 이름을 격하시켰다. 이때 춘당지 북쪽, 관덕정 서쪽 일원에 대규모의 식물원 가설을 추진한다. 설계는 일본인 원예학자 후쿠바 하야토가 맡았고, 시공은 프랑스의 한 업체가 진행했다. 1년 정도의 공사를 거친 후 대온실이 개장했고, 개장 당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면서 동양 최대 규모였다.

  • 대경성의 신풍경 - 조선은행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제작 및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16장 사진그림엽서 세트 중 조선은행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은 대한제국 시기 근대적 경제체제가 유입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대한제국 차원에서 중앙은행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간섭과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실패했고, 1907년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 제일은앻 경성지점이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엔화를 대한제국 내에서 기축통화처럼 통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자본시장을 유린했다. 이후 1909년 10월 대한제국이 한국은행을 설립하며 중앙은행 체제를 갖추려했으나, 이미 외교권 등의 정부의 권한을 일제에 빼앗긴 상황과 일본 제일은행의 화폐경제 유린 등으로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환원하면서 중앙은행도 조선은행으로 변환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으로 격하시키면서 일제의 식민지 통화정책의 중추 기관으로 적극적인 식민통화정책을 시행한다.

  • 대경성의 신풍경 - 조선신궁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제작 및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16장 사진그림엽서 세트 중 조선신궁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다. 일제는 1919년 남산 중턱에 일본식 신사인 조선신사(朝鮮神社)를 건립한 것을 시작으로 남산 일대를 일본 왕실의 성역화했다. 1920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 신궁(神宮)으로 격상했다. 조선신궁은 일제의 신토시설 중 최상급 대우를 받았던 공간이고, 아마테라스와 명치 일왕을 제신으로 봉안하고 모신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통치시설이었다.

  • 대경성의 신풍경 - 장충단 공원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제작 및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16장 사진그림엽서 세트 중 장충단 공원 모습을 담은 기록이다. 장충단(奬忠壇)은 본래 고종이 1900년 일본군과 맞서다 순국한 홍계훈 등의 장병을 기리기 위해 제단과 사당을 지어 배향했던 곳으로 대한제국을 위해 순국한 선열을 기리는 신성한 장소였다. 그러나 일제는 11909년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암살당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한 전국민추도회를 장충단에서 개최하며, 순국선열을 기리는 장소의 의미를 훼손시켰다. 실제로 1932년 이등박문을 기리는 박문사를 건립하는 만행까지 자행했다. 본 사진그림엽서 속 언덕 위에는 박문사의 지붕이 보이는 관계로 1932년 박문사 건립 이후 성역화 작업이 이뤄진 공간을 기록한 자료로 보인다.

  • 대경성의 신풍경 - 숭례문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제작 및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16장 사진그림엽서 세트 중 한양도성의 남문 숭례문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쪽 대문이라는 뜻의 남대문이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본래 수도 한성을 보호하는 성곽이 숭례문을 좌우로 잇고 있었으나, 1907년 황성(皇城)의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좌우 성곽이 헐렸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주변 지역이 개발되고, 남쪽에 지금의 서울역이 대거 확장되면서 철거될 위험에 놓였으나, 총독부와 일본의 지식인 사이에서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개선한 성문이란 이유를 내세우며 보존될 수 있었다.

  • 대경성의 신풍경 - 조선총독부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제작 및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16장 사진그림엽서 세트 중 조선총독부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된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로 본래 용산구 남산 일원의 조선통감부 건물에서 식민통치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점차 식민지배를 위한 효율적인 행정력 집행이 필요했고, 나아가 조선을 정복한 새로운 국가를 내세우기 위해 건축가 이토 주타(伊東忠太)의 주도로 경복궁 근정문과 광화문 사이의 부지에 총독부 신축이 결정되었다. 이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본 정체성이 서려있는 법궁 경복궁을 부수고, 새로운 일제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1912년 경복궁 개조를 시작한 총독부는 흥레문과 근정문, 영제교, 광화문을 철거 혹은 이전한 후 공사에 착공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서 총독부 설계와 청사진을 공개하였고, 대규모의 자금을 마련하여 건축비로 충당했다. 1916년 6월에 착공한 공사는 다수의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였고, 그 결과 10년 뒤인 1926년 마침내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광복 후 미군정청 청사로 활용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정부중앙청사와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1995년 문민정부에서 역사바로세우기 일원으로 총독부 청사 철거를 시작하여 오늘날 경복궁 복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대경성의 신풍경 - 경복궁 경회루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제작 및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사진그림엽서 16장 세트 중 경복궁 경회루의 모습이 담긴 기록이다. 경회루는 경복궁 근정전 서편에 위치한 누각으로, 왕이 신하에게 연회를 베풀거나 사신을 접대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의 대소사와 관련된 야외 행사를 진행하던 건물이다. 본래 1395년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1412년 태종 집권기에 소규모의 누각이 설치되었다가 1474년 오늘날의 규모로 증축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 전체가 소실되면서 이때 경회루도 터만 남기고 멸실되었다. 1867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진행하면서 경회루도 복원되었는데, 이때 복원된 경회루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인 점 등을 이유로 대대적인 훼손을 당한다. 이때, 경회루도 철거될 위험이 있었는데, 조선총독부의 각종 연회 등에 근정전과 함께 활용되며, 철거를 면하게 되었다.

  • 대경성의 신풍경 - 경성부청

    1930년대 대정사진공업사와 와카야마 인쇄소에서 제작 및 발행한 '대경성의 신풍경' 16장 세트 중 경성부청(現 서울특별시청) 모습을 담은 사진그림엽서이다. 오늘날 서울도서관으로 활용 중인 경성부청은 1926년 지금의 위치에 신축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