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40일 기다린 보람으로 편지를 받는 기쁨, 그 편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 나의 기쁨이 겹쳐 나는 어제 정말 기뻤어요. 종이 한 장의 무게가 그토록 클 줄이야. 오늘 아침 히브리어로 시편 126편을 읽었더니 첫 절에 “꿈인가, 생시인가”라고 번역된 구절이 가슴에 왈칵 밀려왔소. 전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우리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가 되는 거죠. 그저께 겨울옷이 나왔고 내 문밖 복도에는 연탄난로가 열을 내고 있어서 오랜만에 사과 차도 끓여 먹는다오. 어제는 밤에 난로를 놓았는데, 날이 풀려서 피지를 않고 월말에 온다는 추위 때나 피우게 될는지? 침낭이 좋아서 영하 11도의 추위에도 내복을 다 벗고 가벼운 몸으로 잘 수 있어서 얼마나 개운하고 좋은지 몰라요. 지난밤도 열두 시에 자리에 들었는데, 단숨에 아침 기상나팔이 울릴 때까지 잘 수 있었소.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로 옆에서 사과 차가 열심히 끓고 있어요. 세타는 당신이 언젠가 짜주었던 꽈배기 세타 (녹색)가 있었지요? 그거면 꼭 좋을 것 같구만요. 그것이 없다면 그보다 좀 여유 있게 짜주면 좋겠소. 요새는 점심은 여기서 울면 등 중국요리를 사 먹는다오. 아주 맛있게 해 주어서 점심때를 더 기다리게 되는군요. 오늘은 간짜장이라고 해서 그만두었지만. 간짜장은 뜨거운 국물이 없거든요. 건강은 단식으로 줄었던 몸이 이젠 완전 원상회복이 되었소. 어제도 60분 잠시도 쉬지 않고 뛰었어도 조금도 힘든 줄 모를 정도였으니까. 12월 접견 때는 아주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리라고 자신하고 있어요.
어머님의 신경통은 아침녁으로 더운물 찜질을 해드리고 주무시기 전에 뜨거운 목욕을 하실 수 있으면 좋을 거요. 약보, 식보에 계속 마음 쓰도록 하시오. 잣죽도 마련해 드리도록 하구려. 당신 붓글씨가 많이 필력이 생긴 것 같아서 좋군요. 구슬같이 예쁜 글씨보다는 힘 있는 글씨가 좋다고 생각해요. 나의 「흰 뫼」 같은 시를 많이 쓰노라면 훨씬 씩씩한 글씨를 쓰게 되지 않을는지? 기완 님에게는 「나의 별들아」라는 소품이 퍽 좋은가 보지요? 「흰 뫼」를 더 좋아할 줄 알았더니만. 꼭 한 가지 충고. 내리긋는 획이 아직도 휘어 있어서, 힘이 빠지는 것 같군요. 내리긋는 획을 줄을 따라 곧게 내리긋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면, 많이 달라지리라고 생각되는군요.
요사이 나의 심정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대통령의 비극이 민족의 비극이요 서러움으로 점점 더 아프게 살을 파고드는군요. 이 나라 초창기 대통령들의 거듭되는 비극은 이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의 단적인 표현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국토 분단의 비극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도 정상적인 정치적 발전을 할 수 있었을 테고, 정치인들도 떳떳하고 보람 있는 생애를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속히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인 민족 분열, 국토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고마운 건 ‘국토’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이 모든 비극을 소리 없이 받아들여 속으로 삭이고, 그것을 거름으로 해서 봄만 되면 영락없이 새싹을 돋쳐 주고 꽃을 피워 주는 국토의 고마움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의 몸은 곧 국토라는 것, 국토의 정수의 정수라는 것을 나는 요가를 하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는 것이라오. 국토는 결코 절망하는 일이 없어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다시금 다시금 꽃을 피우고. 우리 집에는 바우를 태어나게 하고 키워 주면서 모든 비극이 기쁨으로, 한숨이 찬양으로 바뀔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 이 국토의 비극 속에 약속된 행복, 한숨 속에서 들려오는 찬양, 절망 속에서 빛나는 희망,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라는 걸 아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나는 특히 6·25의 비극을 생각하고 있어요. 6·25는 우리 민족사의 최대, 최악의 비극이었죠. 그때 죽어 간 수많은 겨레의 죽음을 우리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게 할 수는 없는 일이오. 나는 요새 그 아우성이 나의 살 속에서 들려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군요. 그 죽음들을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의 몸에서, 우리 개인들의 몸에서, 국토라는 이 겨레의 몸에서, 그것은 곧 조국의 평화로운 통일을 이룩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빛나고 값있는 문화를 창조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지금 서구 문명의 세기말적인 증상을 목격하고 있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근대화는 서구 문명을 뒤좇는 일이어서는 안 되어요. 서구 문명은 땅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땅을 착취하는 문명이지요. 땅에서 솟아나는, 땅을 사랑하고 아끼는, 땅의 마음에 어울리는 문화를 우리는 찾아야 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땅을 멸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땅에서 가장 천대받고 있는 것이 땅을 가는 농민들이라는 데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땅을 살찌게 해서 땅에서 무한한 힘이 솟아나게 하는 문화, 땅과 즐거운 노래로 화답하면서 이룩해 가는 기쁘고 즐거운 문화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화라는 생각이 이제 뺄 수 없게 내 가슴에 자리를 잡았소. 땅을 떠난 콘크리트의 문화가 아니라 흙 내음을 풍기는 문화를 우리는 지향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이런 생각과 요가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고 싶겠지요. 간단한 이야기요. 요가는 나에게 몸과 마음이 하나임을 실감 나게 깨닫게 해준 거거든요. 이를테면 몸의 값을 마음의 값만큼 올려놓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죠. 내 마음이 시름에 잠기면 한숨짓는 것도 몸, 슬프면 눈물짓는 것도 몸, 기쁠 때 뛰고 웃으며 좋아하는 것도 몸이 아니겠소.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는 몸으로 사랑하는 거구요. 모든 창조적인 일을 할 때도 물론 몸으로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몸이 곧 나다”라고 말해도 되는 게 아닐까요? 그 몸이 요새 나에겐 눈물 한 방울로 느껴지는 거지만. 그런데 이 몸이라는 게 신비한 것이어서 기막히게 아름답고 좋은 생각을 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대는 것이니! 조물주의 신비라고나 할지! 철저하게 물리적·화학적 법칙으로 살고 움직이는데 그 법칙을 초월하는 몸이 곧 문화 창조의 본체인 마음이라는 걸 신비로 느끼지 않는다면 이상하다고 해야지요.
내가 먹을 걸 남에게 주면서 진정 사람 된 기쁨을 맛보는 몸의 신비죠. 그런데 이 몸은 땅이 준 것이요, 땅이 길러 주는 것이거든요. 우선 요가는 숨 쉬는 일인데, 그 공기라는 게 땅의 숨결이 아니겠소? 땅이 내는 진액을 먹고 햇빛을 받아 자라는 풀포기, 나무 잎사귀가 내뿜어 주는 산소가 내 몸의 숨결이거든요. 땅에서 솟는 물이 이 몸의 생명이구요. 풀과 열매, 낟알들이 우리의 뼈요, 살이요, 피가 되는 거구요. 땅의 정수의 정수가 생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나의 몸이 되는 거죠. 그래서 내 몸이 국토, 국토의 정수라고 하는 거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 국토를 내 몸으로(처럼이 아니라) 사랑하고 내 몸을 국토의 극치로써 소중히 알게 되는 거죠. 이리되면 내 마음의 시름이 몸의 한숨이 되고 이 땅의 한숨이 되는 거라오. 바울이(로마서 8장에서) 자연의 탄식 소리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구약 성서에서는 인간의 죄가 땅을 더럽힌다는 믿음이 있어요. 주민의 죄로 부정 탄 땅은 생산력을 잃는다는 거요, 힘을 잃고 죽는다는 거죠. 이건 땅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인 거죠. 그런데 하느님 구원의 손길이 사람을 새롭게 하면(성서는 그걸 거룩하게 한다고 부르죠) 하늘과 땅은 기뻐 노래하고 노루, 사슴은 춤을 추고 나무들은 손뼉을 친다고 하거든요. 나는 지금까지 이건 그냥 시적인 표현이라고만 생각해 왔었소.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땅과 거기 있는 만물과 내 몸은 하나인데 어찌 같이 슬퍼하지 않고 같이 좋아하지 않겠소? 이 땅이 받아들여 속으로 새기는 온갖 ‘희비애환’이 그대로 내 몸속에 들어와 내 몸을 이룬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소? 6·25 때 죽은 그 많은 사람의 비극이 땅에 스몄다가 지금 우리 혈관에서 외치는 걸 듣는다는 건 조금도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내 몸속에서 외치는 그들의 주장, 아니 이 땅의 주장에 우리는 머리를 숙여야 하고 그 주장을 이 몸으로 이루기까지 이 몸은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이렇게 우리의 몸이 땅과 하나가 될 때 우리의 몸은 다른 사람과도 하나가 되는 거죠. 여기 있는 온갖 흉악범도 내 몸인 거죠. 내 몸으로 아끼고 사랑해야 할 소중한 몸이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국토통일이 없는 민족통일이 없고 민족통일이 없는 국토통일이 없이 되는 거죠. 그리고 이것이 곧 조국통일, 곧 역사의 통일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이 이상 더 긴급하고 큰 과제가 있을 수 없는 거지요. 통일이 우리에게 있어서 최우선인 거죠.
그러면 ‘선통일 후민주’인가요? 아니지요. 그건 민족통일이 없는 국토의 통일만을 말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전 민족이 참여하는 역사의 통일도 안 되는 거구요. 민족사의 모든 과제를 성취하는 통일이 안 되는 거죠. 우리는 우리의 몸인 땅을 살찌우고 땅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문화 창조의 토대가 되어 주는 새 세계에 눈을 뜰 필요가 있어요. 이것이야말로 묵시록 21장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죠.
당신 동창님께 각별한 문안을 드려주시오. 참고 기다리노라면 회포를 풀 날이 있겠지요. 김 장로님이 우리 집에 오셨었다니,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기쁘군요. 아 참. 영규 졸업 사진이 든 선희의 장문 편지가 서울에서 전송되어 와서 정말 반가웠었소. 조카들이 하나같이 자랑스럽군요. 여기서는 사진을 한 주일 주었다가 찾아가기 때문에 지금도 성근의 결혼 때 사진 석 장이 있는데, 그도 사실 어제로 찾아가야 할 것이 아직 그대로 있는 형편이오.
어머님
누워 버리실 정도로 긴장이 풀리셨다니 어머니답지 않으시군요. 앞으로 우리가 민족으로서 부딪치며 풀어나가야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그 일들을 위해서 어머님의 씩씩한 격려와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아십니까? 아버님, 어머님이 씩씩하게, 꿋꿋하게 서 계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짐작이나 하세요? 어머님이 기운을 놓으시면 그만큼 우리는 김이 빠진다는 것을 아세요. 어머니, 약보, 식보도 사양 마시고 많이 많이 잡수시어 우리와 같이 좋은 자리, 기쁜 자리에 가셔야 합니다. 그 자리에 어머님이 안 계시다면 우리는 그 자리가 하나도 좋지 않고 기쁘지 않을 거예요. 만주에서부터 일당백으로 살아오시던 그 기개를 되찾으세요.
요새 제가 드리는 ‘주기도’를 적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하느님의 마음에 쏟아부어 형체도 없이 녹여서 제 생에 쏟아부었더니 이런 기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울고 웃으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쳐 주시는 하느님! 당신의 크신 마음, 우리의 작은 가슴을 울려 우렁찬 찬양으로 천지를 진동하게 해주소서. 사랑으로 이 세상 정복하시고, 올바른 뜻 세우시어 평화의 새 나라 세워 주소서. 우리 모두 먹을 걱정, 입을 걱정에서 풀려나 사람 된 기쁨에 젖어 서로 아끼고 떠받들며 오늘도 내일도 값있게 살게 해주소서. 서로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으면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전우가 되어 다 같이 역사의 새 출발점에 나서는 기쁨, 당신의 한없는 너그러우심으로 우리 가슴에 안겨 주소서. 이것을 믿을 수 없어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면 눈물 글썽이는 당신의 모습 쳐다보게 해주소서. 우리를 불신의 구덩이에 처넣으려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건져내 주소서. 할렐루야, 당신의 영광, 정의와 사랑으로, 자유와 평화로 길이 빛나리이다. 아멘.’
저도 건강할 테니까, 어머님도 건강하세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뵙기를.
1979. 11. 16.
대통령의 죽음을 보며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평화통일 방안을 얘기함. 어머니께 보내는 ‘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