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1201 손자의 울음, 할아버지의 울음

바우야





네가 서대문구치소에서 이 할아비에게 목련꽃 웃음 한 아름 안겨줄 때, 넌 나서 몇 달이나 되었을까? 이번엔 네가 이 할아비에게 울음 세 아름 안겨주었지. 우리가 서로 못 본 것이 몇 달이나 되었을까? 아무튼 오래 못 만나다가 처음으로 만나던 날, 나하고 같이 못 가는 것이 서러워서 너는 앙 울음을 터뜨렸다. 넌 왜 울음이 터져 나오는지조차 몰랐을 거야. 다음번엔 같이 못 갈 줄 알고 나더러 차를 타라고 해놓고는 차가 떠나자 넌 길에서 할머니 손을 붙잡고 울었지. (육군교도소 담장 밖에 접견장이 마련되어 있어서 접견 때는 지프를 타고 나오게 되어 있었다.) 세 번째로 네 울음을 한 아름 안겨준 것은 얼마 전, 그때는 너는 울지는 않았지. 그냥 “오늘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자”는 노할머님 말씀을 믿고 내가 차에서 내리자 접견실로 들어가려는 우리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었지. 접견실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차 타고 집으로 가자는 거였지. 아무도 네 마음을 몰랐던 거야.  마지막으로 군인 아저씨가 너를 들어 두 할머니 사이에 앉히자, 너는 노할머니를 막 때렸다. 네 할머니는 먹을 걸 안 가지고 와서 그러는 줄 아셨던 거야. 나는 방에 돌아와서 한참 있다가야 네 마음을, 아니 네 울음 한 아름을 가슴에 안았던 거야.



이제 너도 세상을 알게 된 거지. 너무 일찍이. 그러나 나는 네 울음 세 아름의 마음, 그 슬픔을 안고 그지없이 기뻐했던 거다. 나는 방에서 혼자 엉엉 어린애처럼 울면서 좋아했단다.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거다. 너는 나에게 네 마음을 몽땅 주었던 거다. 그 이상 어떻게 너를 나에게 줄 수 있겠니? 너와 나는 핏줄로 얽혀있고 마음으로 이미 서로 딩동 하고 울리는 사이가 되어 있는 거다. 이런 기막힌 마음을 주신 조물주께 감사할밖에 없구나. 조물주라는 말은 지금 너하고 나하고 통하지 않아도, 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마음으로는 느낄 수는 있을 거다. 네 아빠만큼 크면, 너도 그걸 생각할 수 있고 말로 나타낼 수도 있겠지. 빨리빨리 커서 글을 깨치고 이 편지를 읽게 되어야지. 그땐 아마 이 편지를 읽으면서 너도 마음이 찡하며 눈물이 핑 돌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주간에는 네가 아파서 한 번도 못 만났구나. 내일은 만날 수 있겠지. 그럼 이제 멀리 가 있는 네 아비에게 쓸게. 다시 앓으면 안 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면서 잘 자라라. 노래도 많이 부르고.



할아버지





바우 아비에게





아무래도 네가 장가를 잘 간 거 같구나. 세상에 두 돌도 안 된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 마음이 엄청난 울림으로 전해질 수 있었을까? 5.17에 연행될 때까지 바우는 겨우 “아빠”, “엄마” 정도의 말밖에 못 할 때였었거든. 1.5년 좀 넘었을 정도였을 텐데. 그리고 거의 반년 못 보았는데, 제가 무얼 안다고, 다만 놀랄 따름이다. 그러나 바우는 내가 생각하던 것, 사람은 ‘마음’이라는 것을 의심할 나위 없이 보여주었던 거다. 우리는 그동안 사람을 생각과 뜻에서 찾으려고 했거든. 그게 아니고 우리는 사람을 다만 ‘마음’으로 부딪쳐 눈물을 글썽이며 느낄 수 있을 뿐이 아니겠니?



생각이나 뜻이 남성적이라면, 마음은 여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과 뜻은 남을 지배하고 찬양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마음은 오직 희생할 뿐이지. 사람이 살아 있고 세계가 지탱되는 것은 생각이나 뜻 때문이 아니라, 오직 희생할 뿐인 마음 때문인 거지. 생각이나 뜻은 다른 생각이나 뜻과 대립하여(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충돌을 일으키는 거지(그것이 인류 발전의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발전의 신화를 깨뜨리는 일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마음은 말없이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돕고 의지하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가운데서 기쁨을 찾는 거지. 그래서 이번에 들어와서는 성경을 그냥 소리내 읽는다. 뜻을 찾으려는 생각을 깨끗이 버리고, 그냥 하느님의 마음의 빛깔이 내 마음에 물감이 들 듯 번져오기를 기대하면서. 동주의 ‘소년’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지.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하느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만 물감이 드는 것이 아니라, 눈썹에도, 볼에도, 손바닥에도 드는 것을 기대하는 심정이지. 오늘을 사는 뜻은 성경에서도 안 나와. 그러나 거기서 하느님의 마음은 번져 나오지. 하느님의 마음으로 물감이 든 마음에서 오늘을 사는 뜻이 나올 수는 있지. 사실 그래야만 하는 거고. 나는 요가를 하는 동안에 상당히 불교의 唯心論的인 세계를 숨 쉬는 것 같다. 지난번 서대문 구치소에서 얻은 ‘마음 하나로 앉았습니다’라는 시는 불교 스님의 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요가에서는 그 마음이 몸과 하나거든. 마음이 몸이요, 몸이 마음인 거지.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몸이 부르르 떨리면서 마음에 전달되는 것은 예술로써 전달되는 것뿐이 아닐까? 여기서 예술을 통한 인식이 문제가 되는데, 예술을 통한 인식은 마음의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몸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종교도, 철학도, 심지어 과학도 몸이 부르르 떨리는 인식의 경지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예술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거지. 중요한 것은 산 경험 속에서 번져 나가고, 안으로 번져 들어오는 ‘생의 예술성’이 아닐까?  그것이 없는 예술은 기교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러고 보면 생과 떨어진 예술은 그림의 떡이지. 이렇게 써놓고 보니 순수예술론자들은 그림이 중요한 거지 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군. 예술에서는, 그림의 떡이라는 비유보다는 뿌리 없는 나무라는 말이 나을지 모르겠다. 그것도 그리 좋은 비유는 아닌 것 같구나.



복잡다단하고 골치 아프고 괴로운 온갖 생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가슴에 울리는 예술은 그의 생의 한복판, 아니 그 변죽이라도 울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예술은 예술가의 생에서 울려 나는 것이라야지. 그런 점에서, 구체적인 생에서 유리된 예술이란 허망한 신화인 거지. 너희가 전공하는 오페라는 음악 예술 가운데서도 가장 민중적인 예술이겠지? 안 그러냐? 상업 문화에 빼앗긴 민중을 예술이 탈환하기 위해서도 이 시대의 예술은 민중의 예술을 지향해야겠지. 이런 사고 자체가 민중을 모욕하는 것이 되겠지만, 민중의 예술이란 민중 속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니까. 자, 예술론은 그만하고, 아무튼 서두르지 말고 마음 놓고 둘이서 실컷 수련을 쌓아가지고 오너라. 술을 끊었다니 축하한다. 기왕이면 담배도 끊었으면 좋겠다. 몸에 해롭기로는 담배 쪽이 더 나쁜 것이 아닐까?



나의 건강은 그야말로 ‘왔다’다. 엎드려뻗쳐를 단숨에 70번 정도 할 수 있으니까. 지금 나에게 있어서 건강은 그대로 효도요, 애국이요, 종교라고 할 수 있겠지. 요가의 정말 깊은 경지는 건강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겠는데, 난 아직 거기까지는 못 미친 것인지? 전번 편지에도 썼지만 제3세계의 문학을 읽고 싶으니까 시간이 생기면 보아 두어라. 건강을 빈다.





1980. 12. 1. 아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