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슬픔은 하나

당신에게

 

뒷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었더니, 오후가 되니 숨었던 산이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어도 내일이라야 해가 바짝 비칠 것인지? 영상 5도라니 봄은 곧 올 모양이나 당장 기다려지는 것은 햇빛이오. 내일을 기다려 보는 거죠. 기다림,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 거죠.

이번 달도 아차 편지를 못 쓸 뻔했구려. 서울에서 따라온 것으로 알고 있었던 우권(郵權)이 오지 않았고, 여기서는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월말에나 신청할 수 있어서 교무과의 특별 배려가 아니었더라면 이 편지를 못 쓸 뻔했다오. 그러니 이중 삼중으로 기쁘군요. 우선 외면적인 생활에 관한 소식부터. 막혔던 창이 활짝 열려서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있고, 밤이면 별을 쳐다볼 수 있고, 낮에는 햇빛이 한껏 들어오게 되어서 말할 수 없이 좋군요.

여기 와서 한 주일쯤 좀 추웠으나, 이제는 봄이 제주도쯤까지 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마음 느긋하다오. 사람들과, 환경과도 친숙해진 셈이고. 음식이야 나는 콩밥이면 찬도 없이 맛있게 먹는 사람이니까. 오랜만에 콩밥을 잘 씹어 먹으면서 밥이 얼마나 감칠맛이 있느냐는 것을 새삼 하루 두 번씩 느끼곤 하지요. 계란을 스크램블해서도 먹고 반숙해서도 먹고요. 오늘부터 우유가 들어올 것 같은데, 아직은. 과일은 귤만 사 먹을 수 있는데, 나야 그것이면 다인 거죠. 귤이 사과를 밀어내는 세상이 되었군요. 요새는 귤 차를 따끈하게 끓여서 마가린을 바르고 김치를 넣은 쌘드위치와 같이 먹으면 생이 반짝 빛나듯 즐거워지는군요. 귤 두 조각에 설탕이면 맛있는 귤 차가 되는데, 집에서도 해 먹어 보구려. 집에서도 밥에 콩을 두어서 먹었으면 싶군요. 어머님만 콩을 섞지 않고 드리고요. 또 하나 새로운 지식인데, 쌀눈에는 비타민이 있어서 몸에 좋을 뿐만 아니라, 농약을 녹여 버리는 성분이 있다는군요. 이제 와서 사람들이 농약 중독으로 고생할 걸 아시고 하느님이 미리 농약 제독 성분을 쌀눈에 담아 주신 거 아니겠소? 그러니 모두 현미를 먹는 운동을 벌여야 하겠소. 농약 중독에서 살아남는 길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모두 신경과민이 되어 있군요. 김철손 형의 부인에게 연락해서 현미 솥도 사고, 현미도 구해서 농약 걱정 깨끗이 집어치우고 마음 놓고 식탁에 앉도록. 여러 사람이 같이하면 나락을 구해서 정미소에서 현미로 찌어다 놓고 먹으면 될 것이요. 반드시, 반드시, 꼭, 꼭, 실천.

독서는 주로 히브리어 성서와 씨름하는 일이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어제도 아침부터 저녁 먹기까지, 오늘도 오전 내내, 성서를 하느님의 마음이 번져 오기를 기다리면서 담담히 읽어 가고 있었는데, 여기 와서 창근 아빠(동생 문동환)가 보내준 구약 예언자들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서 둘을 읽으면서 학문적인 연구가 또한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는 것을 깨닫게 되는군요. 논문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치미는군요. 성서를 읽는 이런 두 자세는 결코 서로 배타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근본이 되는 것은 아무래도 성서에서 번져 오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내 마음에 물감이 드는 것을 기다리는 자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오.

성서에서 어떤 뜻을 찾으려고 성서를 읽는 사람을 남의 꽃밭에 피어 있는 꽃을 감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느님 마음의 전달을 기대하면서 성서를 읽는 사람은 제 화원에서 피어나는 꽃을 감상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남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가슴을 울리며 터져 나오는 소리가 더 중요한 것이겠죠. 뜻이기 전에 ‘마음’의 울림, 이건 아마 불교도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들은 글자, 말, 뜻에서 언제나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구체적인 뜻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그 근원이요 바탕인 마음을 ‘슬픔’과 ‘기쁨’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육군교도소를 떠나기 얼마 전부터 내 생각 속에서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소. 그리고 슬픔과 기쁨은 하나라는 것도 이제 뚜렷해져 가는군요. 이제 ‘기쁨의 신학’이 ‘슬픔의 신학’으로 안이 받쳐지는 것 같아요. 기쁨은 슬픔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함께 있는 것이요, 그것과 일체인 거죠.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슬픔이, 예수가 곧 우리의 기쁨인 거죠. 그리고 우리의 기쁨이 곧 하느님의 기쁨인 거구요. (예수와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 인류의 절망을 십자가상에서 외친 예수의 절망이 그대로 인류의 희망인 거죠. 우리는 그의 절망적인 외침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확인하는 것이니까요. 예수는 인류와 함께 절망을, 아픔을, 슬픔을 헤치고 나가셨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요, 동시에 그의 희망이요 기쁨이었던 거죠. 기쁨이란 그러니까 고통과 슬픔을 같이 헤쳐나가는 동안에 같이 경험하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이렇게 슬픔이 곧 기쁨인 동시에 기쁨이 곧 슬픔이기도 한 거죠.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즐기셨다는 성서의 기록이 있지요. 나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예수의 웃음은 터져 나오는 그의 울음소리였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제야 비로소 나는 그의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고 보면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는 생에서 오가는 마음이 사랑이라고 해도 되는 거겠죠. 사랑은 뜻이기 전에 마음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랑은 마음이 구체적인 뜻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란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인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사랑이란 마음을 행동으로 구체화하는 뜻이요, 동력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이렇게 마음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군요. 그렇다고 해서 몸을 떠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요가를 통해서 좀 터득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것이오. 

지난 주일 날 기도하려고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하느님, 당신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라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그 말이면 기도가 끝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말만 거듭하고 있었소. 하느님이 내 마음을 알아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이오. 이 마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에 닿는 듯한 느낌, 그 기쁨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을는지. 그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슬픔에 닿는 일이기도 하구요. 역시 슬픔과 기쁨은 하나이군요.

 

늦봄

 

아버님

 

아버님의 맏아들은 여기서 이렇게 벅찬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아버님 뵈올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창근 아빠에게 책을 고맙다고 해 주시고 건투를 빈다고 전해주십시오. 영환이네, 달현이네, 다 어떻게 지내는지요? 선희 성탄절 카드는 받았습니다. 성수, 영금의 공부는? 문칠이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유감 천만입니다. 너무 조바심하지 마십시다. 대륙적인 느긋한 심정으로 살아 가십시다. 기도하면서.

 

호근, 은숙에게

 

바쁘면서도 매사에 진전이 있고 너희가 예술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 같아 기쁘다. 호근이 언젠가 편지에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예술”이라는 말을 했었지. 그거 참 좋은 말이다. ‘위로’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까. 비극을 속에 지니지 않는 예술이 있을 수 있을까? 예술가나 종교가나 사상가나 깊이 인류의 슬픔에 잠기는 만큼 깊어지고 커지는 거지.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겠지. 그리고 그 공감이라는 것이 위로요 기쁨이 아닐까?

은숙의 코롤라튜라 발성을 듣고 싶구나. 한국식, 이탈리아식, 영국식 발성이 정은숙식 발성으로 빛을 볼 날이 오래지 않으리라 믿어 기대를 건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기대한다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되지. 대성악가가 되려는 집착까지 떨쳐 버리고 그저 노래를 사랑하고 제 성대에서 울려 나가는 노래를 즐기는 열린 마음만으로! 성악에 있어서뿐 아니라 무슨 일에 있어서나 가슴 조이는 것만큼 일을 그르치는 것이 없을 거야. 조바심은 모든 일에 있어서 금물 중의 금물이지. 은숙의 예술에서 기쁨을 찾아야 할 슬픈 사람들이 많아. 그런데 제가 즐기지 않는 음악이 남을 기쁘게 할 수는 없거든. 은숙의 은숙이다움은 그 느긋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은숙이 이야기만 한다고 성심이 섭섭해할 건 없다. 은숙에게 하는 말이 그대로 성심에게 하는 말이니까. 미국에서 낭군과 랑데부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성심이 건강은 어떤지? 

“하부지 문익환” 하며 재롱을 부리는 바우를 오른팔에 번쩍 들어 안고, 보라를 왼쪽 팔로 안고 함박꽃 웃음을 웃을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보라 엄마는 시집 잘못 왔다고 원망하는 것은 아닐 테지. 보라 아빠, 엄마 건강이 안 좋은 것 같아서 걱정이구나.

 

은희야

 

 모처럼 접견 왔다가 말도 못 해보고 가게 되어서 정말 안 되었다. 한얼, 한터 인젠 얼마나 컸을까? 한없이 한없이 보고 싶은 사람들, 눈감고 그려 볼 뿐, 희망 속에서 만나 볼 뿐이지. 아니지, 기도하면서 같이 숨 쉬는 것이지.

 

다 쓰고 나니 어머님 문안을 빠뜨렸군요. 불효막심한 놈이 되었습니다. 3월 접견 때에는 오실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하늘만큼 뵙고 싶지만 무리하지는 마세요. 언제나 저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시는 어머님이 저 하늘 아래 어디 계시다는 것, 아 얼마나 축복인지. 부디 건강하세요. 이 못난 아들 걱정일랑 마세요. 폐방(廢房) 나팔이 울려서 끝내야 하겠습니다.

 

못난 큰아들

 

당신에게

 

편지 4신까지 받았어요. 양말, 버선도 받고 우유는 내일부터 먹게 될 것 같소. (김)원철에게 축하한다고 해주시오. 엘리아데의 Yoga : Freedom and Immortality  와 박경리의 ‘토지’  3부 2권을 보내주면 좋겠소. 요새 나온 좋은 시집들은 없는지? 그러면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편지 주시오. 편지 받는 것이 낙이니까.

 

1981. 2. 13. 당신의 달님

 

성경을 하느님 마음의 전달을 기대하면서 읽는 자세와 ‘기쁨’과 ‘슬픔’이 결국 하나라는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