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민족통일로 완성되어야 할 역사의 횃불이다

아버님, 어머님께

 

(3월4일) 3·1절도 저와 같이 나이 들어가는군요. 1919년 3월은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아홉 달 되던 때였으니까요. 저는 3·1절만 되면 아버지, 어머니 잃은 고아가 될 뻔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독립선언문을 찍어 돌리시다가 그 때문에 붙잡혀 고생하신 아버님이 지금까지 살아 계신다는 것이 어찌 예삿일이겠습니까? 아홉 달 난 저를 집에 두고 30리 길을 달려 용정에 가서 만세를 부르신 어머님을 총알이 비껴가 옆에 섰던 사람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만 생각하면, 저는 눈앞이 아찔해지곤 합니다. 동시에 어머니의 가슴을 비켜 간 총알에 쓰러진 사람에게는 나 같은 아이가 없었을까? 있었다면 그 아이는 얼마나 불행하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군요.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일 텐데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동안 제가 받은 축복을 고스란히 그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제가 그동안 누렸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은 저 대신 고생하는, 낯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돌려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빛나는 몇 안 되는 사건 중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그때 타오르기 시작한 횃불은 지난 63년 동안 암담한 우리의 민족사를 비추는 빛이요, 민족통일이라는 이 민족의 비원을 과제로 짊어지고 있는 우리의 오고 있는 역사를 비추는 빛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길고 긴 민족 수난사를 비추는 빛이기도 한 것이라는 것이 요즘 저의 깨달음입니다. 경찰서에 붙잡혀 가서 수도 없이 매를 맞으면서도 신들린 사람처럼 만세를 불렀다는 진주의 한 지게꾼의 말, “내 속에는 만세 소리 밖에 없어서 당신들이 때리면 때릴수록 그 소리밖에 나올 것이 없다.” 이 말은 길고 긴 우리의 역사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이 소리는 뿌리가 없이 나온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의 역사는 왕궁의 역사였지만, 요새는 그 진주 지게꾼의 외침 속에서 울려 나오는 민족사를 사람들은 찾아 되살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민족통일도 결국은 바로 그 역사가 이룩하리라는 것이 요즈음 저의 확신으로 굳어 가고 있습니다. 그 진주 지게꾼의 외침이 민족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우리 속에서 외쳐지고 있는데, 3·1운동은 실패였다고 하는 말은 당치도 않은 소리입니다.

3·1운동은 동학운동과 마찬가지로 실패가 아니라 미완성일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학과 3·1운동이 이 민족사에 던져 준 과제는 바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이 민족의 한을 푸는 일이기도 하구요. 우리가 기어코 그것을 못 풀 때라야 실패라는 말을 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기어코 풀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을 풀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는 것이기 때문이죠.

절망의 폭발 앞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3·1운동은 동학운동과 달리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안이하게 믿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3·1운동이 던진 민족적인 과제를 기어코 풀어야 하는 우리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때 전 국민이 삽이고 곡괭이고 낫이고 있는 대로 들고 일어나서 일제를 몰아냈어야 한다는 반성론에 대해서 저는 전적으로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일제를 몰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이 강산을 피바다로 만들면서. 그러나 3·1운동은 평화적인 시위로 좋았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력항쟁이었다면, 그것은 2백만 시민이(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명실공히 민족 전체의 뜻을 표명하는 전례 없는 대민중 운동이 전개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남북 만주와 연해주, 중국 대륙에 걸친 무력항쟁을 포함하는 모든 민족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면 3·1운동은 그것으로 좋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3·1운동은 민족통일로 완성되어야 할 빛나는 역사의 횃불이었습니다. 그 완성은 지금 우리의 헌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3·1운동은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비추는 빛인 동시에 아시아 대륙을 비추는 드높은 횃불이었습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조선을 아시아의 등불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결코 공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네루가 영국 감옥에서 딸에게 보낸 편지에 “조선에는 유관순 같은 여학생이 있는데 너는 무얼 하고 있느냐”고 써 보낸 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충격은 네루나 타고르뿐만 아니라 간디에게까지도 미쳤던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의 인권을 위해서 변호사로 일하던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서 인도로 돌아온 것은 1919년 4월이었습니다. 3·1운동의 횃불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간디에게까지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해 5월 4일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의거 때 북경 천안문에는 ‘조선 학생들의 뒤를 따르자’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고 하니 3·1운동이 잠자던 중국 대륙을 어떻게 일깨웠는지 알 수 있는 일 아닙니까?

3·1운동은 이렇게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그 자랑 속에도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군요.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인 6·25의 아픔과 슬픔과는 또 다른 아픔과 슬픔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과 부끄러움을 다 우리의 역사이게 하는 것은 아픔이요, 슬픔이요, 그것은 또한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지요.

제주 난이 2년 동안 어머님의 손에서 잘 자란다는 소식, 정말 기뻤습니다. 나는 그 난을 받아 놓고 물 한 번 주지 못하고 들어왔기에 그냥 말라 죽은 줄 알았었는데, 그 경황 중에서 그것을 보살펴 주신 어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3월5일)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계속합니다. 땅속에서 개구리가 돌아눕는다는 경칩이 내일인데, 어제는 온종일 비가 왔고, 오늘은 활짝 개어서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어제 아버님 글월을 받고 기뻤습니다. 북간도 일대에 10여 군데나 교회가 문을 열고 예배한다는 소식,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거기 교회에 모이는 동포들도 민족통일을 애타게 빌고 있겠지요. 우리보다 더 애타게 빌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아버님, 극동방송을 통해서 다시 북쪽으로 메시지를 보내세요. 휴전선 이북, 남북 만주, 내몽고에 있는 동포들까지도 민족통일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하자고. 우리의 불타는 기도로 휴전선을 무너뜨리자고. 그리고 통일된 새 나라를 하느님의 정의로운 뜻 위에, 우리의 믿음과 사랑 위에 세우자고. 그래서 또다시 인류의 횃불이 되자고.

『리더스 다이제스트』 3월호에 이북 기사가 하나 있는데, 정말 가슴이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평양에 있다는 혁명박물관 앞에 김일성상이 79척이나 되는 것이 서 있고 사람들이 그 앞에 절을 하는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자기만 훌륭하다고 선전하는 것은 곧 국민은 그만큼 우매하다는 것을 선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매한 국민의 영도자라는 것이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국민이 현명하고 위대하다고 자기 국민을 추켜세우면 지도자는 저절로 그만큼 더 현명하고 위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모를까요?

이번에 제가 5년 감형을 받았다는 것은 3일 아침 소장실에 나가서 알았습니다. 저희 사건에서 제가 최고령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다들 나간 다음 맨 나중에 나가야지요. 저는 여기 있는 하루하루를 정말 보람있게 살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조급한 마음이 없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애타 하시는 심정만 아니라면. 그러니 조바심 말고 기다려 주세요. 정부가 민족 대화합을 그만큼 큰 소리로 외치고 언제 그런 말을 했더냐고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정권을 잡은 이들은 말의 공신력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날 서무과장이 “지난밤 무슨 꿈을 꾸지 않았습니까?” 하기에 지난 22일 새벽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꿈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집 현관에 들어섰습니다. 꽤 큰 현관인데 한 절반을 시멘트로 칸을 막고 물을 채웠는데, 가운데 남북으로 길쭉하게 또 칸을 막았더군요. 그런데 그 가운데 칸의 물은 얼어 있었습니다. ‘저 얼음이 녹아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군가 뜨겁게 달군 칼을 가운데 칸 남쪽 바깥에 대고 돌리니까 남쪽 물이 다 녹았습니다. 그래서 ‘북쪽 얼음도 녹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이 그 칼을 북쪽 바깥에 대고 다시 돌리더군요. 그랬더니 북쪽 얼음도 녹아서 남쪽, 북쪽의 녹은 물이 하나로 어울렸습니다. 그러고 다시 보았더니 바깥쪽 칸에 큰 봉투가 떠 있는데, 그 속의 얼음은 아직 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얼음마저 녹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하는데, 그 칼을 쥔 사람이 물속에 풍덩 뛰어들더니 그 칼을 봉투에 대고 한 바퀴 빙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봉투 속의 얼음도 녹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봉투를 집어 들고 열어 보았더니 과연, 그 속에는 얼음 녹은 물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 얼음이 다 녹았구나’ 하면서 좋아하다가 눈을 뜨니 꿈이었습니다. 좋은 꿈이지요? 오늘은 이만.

 

(3월 15일) 그저께 접견실에서 어머님을 건너다보면서 정말 마음이 쓰렸습니다. 금방 쓰러질 듯한 어머님의 야위고 파리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더없이 건강하다는 것을 부끄럽고 죄스럽게까지 느꼈습니다. 그저께 저녁부터 끼니를 앞에 놓고 제 건강을 위한 기도를 그만두었습니다. ‘저에게 주신 것 같은 건강을 어머님에게, 그리고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건강이란 나 자신에 대한 거룩하기까지 한 의무인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충성이요, 나라와 겨레에 대한 충성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요, 처자들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병이 죄라는 것은 20대 학생 시절 몸이 약해서 금강산에 들어가 휴양할 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몸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서 약해지고 병이 나 하느님을 위해서, 나라와 겨레와 이웃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도리어 남의 도움과 섬김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이 어찌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감옥에 있으면서도 부모님이 제 건강을 걱정하시지 않도록 하는 일 이상 더할 수 있는 효가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하느님께 대한 충성, 나라와 겨레에 대한 충성이냐, 부모에 대한 효냐,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에 다다르면 저는 효를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다행인 것은 그때마다 아버님, 어머님은 저의 불효를 도리어 효로 받아 주셨던 것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지금 어머님이 저를 사랑해 주시는 일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일만이 아닙니다. 어머님의 건강을 돌보시는 일도 저를 사랑해 주시는 일입니다. 여기 있으면서도 어머님의 건강 걱정을 하지 않도록 제 마음에서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는 일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길로 치과에 가셔서 틀니를 해 넣으세요. 그것이 저를 사랑하시는 일입니다. 어머님의 야윈 모습에 마음이 쓰여서 아버님 다리가 부으신다는 소식에 거의 마음을 쓰지 못했던 것을 방에 돌아와서야 깨달았습니다. 홍(창의) 의사에게 가시어 진단을 받아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건강이 좋아지면서 건강하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었는데, 그날 접견실에서 어머님을 건너다보면서 그 부끄러움이 마음의 아픔이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식전 요가를 하다가 예수님의 심정이 찡하고 울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정도가 아니라 억센 체력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스피커도 없는 시절에 들에서 몇천 명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하고 병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앓으셨다는 기록이 없거든요. 그렇게 건강한 몸이었기에 몸 약한 사람, 소경, 귀머거리, 문둥이, 절름발이들을 보면서 부끄럽고 죄스럽게 느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이 바로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사신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건강을 부끄럽고 죄스럽게 느끼면서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주신 것이죠. 건강하지 않고는 당신의 건강을 부끄럽게 느끼지 않으셨을 것이고, 마음과 몸의 건강을 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님은 지금까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계십니다. 어머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랑이요,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요가를 하면서, 수명이 다해서 갈 뿐, 앓아서 죽지 않는 생을 살아 보여주고 싶습니다. 스님들이 結跏趺坐(결가부좌)로 앉아 명상하다가 입적하는 일이 간혹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요가의 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바로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어머님의 몸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아셔서 부디 천대하지 마세요. 어머님의 몸을 천대하는 것은 하느님께 불충 하는 일이요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몸을 천대하는 헬라 사고나 중세기적인 금욕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살아서 이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27~31절을 다시 읽어 보세요, 어머니…….

 

당신에게

 

매일 오던 편지가 나흘까지는 오지 않아도 기다렸는데, 닷새가 되고 엿새가 되면서 아무래도 세상에서 다시는 당신을 못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금요일에 그 편지들이 와서 안심했었고, 토요일에는 죽었던 사람이라도 만난 듯이 반가웠습니다. 그 이틀 동안 나는 당신과 같이 살아온 지난 37년을 여러모로 되새겨 보는, 그것도 당신의 무덤 앞에서,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군요. 그러면서 당신이 나에게 있어서, 또한 우리 가정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느냐는 것을 깨우쳐주는 경험이었군요.

얼마 전에 나는 어머니를 민주 제단에 바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당신이 이 나라의 민주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소. 우리 가정에서 시종일관 가장 뜨겁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불살라 살아온 사람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에 우리 가정에 이 나라의 민주 제단에 바칠 제물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당신이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이 나보다 먼저 이 민족의 역사에 묻히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거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살아서 역사에 묻히기를 바라야지요. 생각해보면 우리 가정은 그동안 너무나 아슬아슬한 일을 겪으면서도 영실이 하나 만주에 묻고 왔을 뿐, 하느님의 보호와 은총을 과분하게 많이 받아온 셈이지요. 아버님이 성진 헌병대 마당 땅굴에서 살아 나오시고, 연길 감옥에서 두 번씩이나 살아 나오신 일, 38선을 넘을 때 아찔하게 당신과 생이별 할 뻔했던 일, 호근이가 인천에서 고아가 될 뻔했던 일 등등……. 그 이틀 동안 이 모든 일 하나하나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소.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회고하면서 민족의 수난 앞에서 또다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느끼는 것이었소. 우리는 그만큼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남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느님은 그 빚을 이 겨레에게 갚으라고 하시는 거죠. 그것을 만분의 하나도 갚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느끼는 부끄러움이요, 죄스러움이 아니겠소? 당신의 마음으로 뜨겁게 살아야지요. 신철 아빠 위해서 기도한다고 소식 전해 주시오.

 

선희에게, 

 

예외 없이 문규, 영규 자랑으로 시작되는 편지지만 반갑기만 하다. 조카들 자랑이 귀에 거슬릴 까닭 없지. 내가 나가면 네가 오랜만에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겠다니, 내가 빨리 나가야겠구나. 문규 아빠 왔다 갔다는데 못 만나서 섭섭. 또 편지를 보내다오. 

영주, 영희에게

편지 고맙다. 어쩌면 글씨를 그렇게 예쁘게 쓰지? 큰아버지에게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하고 숙녀들이 다 되었겠구나. 이제 만나면 키쓰해 주어야지. 피아노 잘 치고. 행복하게 자라거라.   큰아버지

성심에게,

건강을 기뻐한다. 보내준 내복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구나. 고맙다. 네 성악 실력을 몰라준 시아버지를 너무 야속하다고 생각지 말아라.  그만 총총.

 

1982.3.

 

3.1절 63주년을 맞아 그 정신이 민족통일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연약해진 어머니에 대한 걱정, 아내의 편지가 며칠 오지 않아 걱정등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