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꿈과 소원으로 사는 하루

어머님께

 

(6월10일) 아버님, 어머님을 뵌 지도 열흘이 되었군요. 제가 아버님, 어머님을 통해서 하느님께 이 몸을 받아 살아오기 어언 64년이 지났군요. 쉰까지만 살았으면 하던 폐병 들린 허약한 소원이 14년을 더 산 셈입니다. 그 14년 하루하루를 덤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덤으로 살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5시 15분에 일어나서 6시 25분까지 요가를 하고 세수하고 냉수마찰하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교대로 들어왔던 담당이 백수(白壽)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백수는 모르지만, 하느님께 허락받은 수를 병들게 하거나 병으로 분질러 먹지는 않을 것 같은 심정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몸’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으세요? 사실 몸이란 흙에 마음이 합해져서 몸이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음이 떠나면 살은 흙이 되고 마는 것 같아요. 그건 마음이 아니라 생명이 아니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생명과 함께 몸은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모든 생명에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생명이 사람처럼 제 속에 있는 마음을 객관적으로 의식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 나오는 건데, 그렇다면 흙 속에는 눈뜨지 않은, 잠자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 마음이 아담과 하와에게서 눈을 뜨고 그 큰마음을 자각했을 때, 그것을 성서는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요? 조물주가 우주를 만드실 때 당신의 마음을 그 속에 심어 주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막을 길이 없습니다. 진화란 생명의 진화만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떠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는 마음으로 역사에 들어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악’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몸’을 악의 근원이라고 했지만, 몸은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는 ‘악’에 시달리고 있는 거죠. 정말 바울은 삼라만상이 이 악 때문에 신음하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마음이 없이 신음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신음 소리를 찬양 소리로 바꾸는 데 구원이 있다면, 그 구원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우주의 구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덴마크인들은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 땅 사랑, 이렇게 三愛로 立國정신을 삼았다지만, 그것은 셋이 아니요, 하나인 거죠. 우리가 겨레를 사랑할 때, 국토를 사랑하지 않고 겨레를 사랑하는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한 것이 아닌데, 쓰다가 보니, 이렇게 발전되었군요. 내 몸을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고 국토를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랑이지요. 이 사랑은 하느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구요.

밖에 나가서 뜨거운 볕을 받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시간 운동하고 들어와서 냉수 목욕으로 몸을 식히고 요가를 한참 하고 나와서 참외를 먹고 계속해서 붓을 들었습니다. 64년 전 어머님을 통해서 받은 몸이야 없어진 지 오래인데, 그동안 제 몸속으로 동식물을 통해서 들어오는 흙이 어떻게 어머니를 통해서 받았던 몸의 연장으로 존재하느냐는 것이 정말 신비합니다. 학자들은 그것을 기억이라고들 하지요. 우리의 몸은 분명 흙인데 이 몸이 지난날의 애환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토대로 내일을 향해서 오늘을 산다는 일이 어찌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요즘 저는 이렇게 신비에 싸여, 신비에 떠받들려, 신비를 먹고 숨 쉬며, 신비를 살아가는 몸의 신비에 좀 어리둥절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란, 그리고 인격이란 우주 신비의 극치인데, 너무 헐값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군요. 너무너무 천해져 가고 있습니다. 흙에서 온몸,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사람의 덧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느껴 왔는데, 요즘은 그 말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습니다. 땅과 나는 한 생명, 한 마음이 통하고 있는 땅이 나요, 내가 땅이라는 느낌이 날이 갈수록 강하게 저를 압도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같은 땅에서 나서 같은 땅으로 돌아갈 우리는 네가 나요, 내가 너인데 무슨 대립이 이렇게도 많은지 원망스럽군요.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사람들끼리 왜 이리 아옹다옹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나를 위하는 것이 너를 위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서로 아끼고 위하며 살아도 한평생이 잠깐인데, 그동안을 아옹다옹으로 찢어발기며 살아야 한다니,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한다니. 어제 아침에 베드로 전서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복종함으로써(진실을 따라 삶으로써) 마음이 깨끗해져서 꾸밈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충심으로 열렬히 서로 사랑하십시오”(2:22).

불나게 서로 사랑해도 사람의 한평생이란 아쉽기만 한 건데, 사람들은 불나게 서로를 미워하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모두들 열렬히 거짓으로 꾸며 형제를 속이며, 열렬히 더럽게 서로 싸우며 죽고 죽이며 살아가는, 아니 죽어 가는 사람들을 굽어보시면서 하느님은 얼마나 속이 상하시겠어요? 제가 이렇게 속이 상하는데 말입니다. 저의 64년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나는 불나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인생을 헛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불나게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지는군요. 열나게, 열나게, 열나게……

 

(6월11일) 아버님께, 또 하루 하느님의 몸으로 하느님의 아픔과 기쁨, 하느님의 절망과 희망, 하느님의 꿈과 소원으로 사는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설거지, 걸레질까지 치고, 담요들을 볕 보이려고 밖에 내다 널면서 쏟아지는 햇볕을 받아 보니 오늘도 꽤 뜨겁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겨울에는 추워야 하고 여름에는 뜨거워야 하는 거죠. 금년도 농사가 풍년 들기를 빕니다. 제가 태어난 이 뜨거운 6월의 아픔은 5월의 아픔과 함께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혀야 하다니 안타깝습니다. 3, 4월의 아픔은 자랑스러운데 말입니다.

저는 요사이 한국 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울화통이 터져 죽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8월은 국치일이 있는 달, 8월도 부끄러운 달이군요. 8·15 해방은 국토와 민족과 조국을 분단시킨 데서 멎어 버렸으니 이중으로 아픈 달이군요. 저번 접견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저 개인으로는 모든 마이너스가 믿음으로 플러스가 되는데, 그 플러스가 아무리 쌓여도 민족의 마이너스라는 구렁에 빠져 자취도 남지 않게 되는 것 같은 허무감에서 벗어나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전도서 11장 1절을 보면 “네가 먹을 빵을 물 위에 던져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 번역은 2절 때문에 투자에 관한 말이라고 보고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을 은유 그대로 두었어야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1절 후반을 보면 “먼 훗날 너는 그 빵을 만나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빵을 물 위에 던지고 먼 훗날 그걸 다시 만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 기대도 하지 말고 그냥 던져 버린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겠지요. 역시 아버님의 충고가 옳은 것 같습니다. 도도히 흐르는 민족사 위에 그것이 비록 마이너스의 흐름이라고 해도 나의 소중한 플러스로 하나하나 되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깨끗이 버리고 그걸 빵조각처럼 그 물 위에 던져 버리고 믿으라는 거죠. 이건 거의 허무를 믿는 일같이만 느껴집니다. 그래도 믿어야지요. 예수의 십자가란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욕심을 버린다는 것, 가난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님 충고, 정말 고맙습니다.

(6월12일) 아버님, 저는 요새 자꾸만 중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요가 수도라는 것이 저를 자꾸만 불교적인 데로 끌고 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성경을 너무 머리로 읽는 것 같습니다. 이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죠. 그런데 요새는 중들이 목탁을 두드리며 가슴에 울리게 읽는 식으로, 목탁은 없지만, 성경을 읽는데 그게 그렇게 좋군요. 잡념이 들어올 새 없이 물 흐르듯이 소리를 내어서 한두 시간씩 읽노라면, 가슴이 울리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이해하려는 머리의 작용을 중지시켜 버리고 그냥 영혼에 울리게 읽는 겁니다. 저는 아버님, 어머님이 자연스러운 가락으로 신문까지도 읽으시던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 가락은 살려보고 싶습니다. 예배도 설교 없이 영혼에 울리도록 성경을 읽는 형식을 실험해 보고도 싶고, 독경 중심의 퇴수회 같은 것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요한 1서를 읽다가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지킵니다’ (3:3)라는 말에 가슴이 쿵 울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해한다는 것과 가슴이 쿵 울린다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겠습니까? 

(6월13일) 어젯밤에도 한국 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정치인들이 어쩌면 그렇게 바보짓만 하고 있었는지,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다시금 다시금 느꼈습니다. 후세대가 우리의 세대를 돌아보면서 꼭 같은 울화통을 터뜨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몸서리가 쳐지는 것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모든 바보짓은 전부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제 한 가지 안 것은 실학파에서도 북학파에 속하는 朴齊家가 1801년에 종성으로 귀양가서 3년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종성의 학자들이 분명히 그와 접촉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날에는 아버님, 어머님을 안아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부디 더욱더욱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아들 드림.

 

봄길에게

 

저번날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보라를 안아 주었는데, 당신을 안아 준 기억이 없어서 당신이 얼마나 서운했으랴 싶어지는군요. 이것저것 너무 충격이 컸었기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이해해 주구려. 그날 보라는 정말 나를 기쁘게 해 주었소. 할아버지의 키쓰를 받는 것보다 할아버지의 귀를 잡고 제가 키쓰를 해야겠다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아무리 들었어도 통틀어 몇 번밖에 못 만난 할아버지를 키쓰해 주고야 마음을 놓는, 그 마음이 정말 어디서 온 걸까요? 그냥 신비하고 기특해서. 또 예수님 웃음으로 입을 딱 벌리고 사진 찍던 그 모습이라니, 너무 너무 귀엽군요. 바우의 빛나는 눈에 보라의 웃음이 나의 감방을 환히 비쳐주는구려. 이제 가을이면 성심에게서, 또 영금에게서 어떤 애기들이 태어날 것인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군요. 오랜만에 은숙, 성심의 노래를 들으면서 얼마나 좋았던지. 은숙의 노래는 유학 떠나기 전에 녹음한 것일 테죠. 그동안 얼마나 진전을 보였을까? 금년 가을의 아이다 공연에 기대. 그때 여기 그대로 있어도 녹음으로나마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성심의 노래는 김 목사님 교회에서 한 번 듣고 이번이 처음이죠. 의근이 피아노 실력도 알아주어야지만, 성심의 노래는 정직한 게 그리 좋군요. 과일로 말하면 배 맛이요, 옷감으로 말하면 모시 같은, 꾸밈없는 정직한 소리, 좀 수줍은 데가 있는 독일 Lied를 전공하는 까닭을 알 수 있군요. 성심의 소리는 독일 Lied를 불러야 제맛이 날 것 같은데, Lied는 한 곡도 없어서 서운했어요. 그 작은 몸 어디서 그런 Volume이 나오는 건지, 좀 놀랐어요. 

 

성심에게

 

 아마츄어의 comment를 용서하고 들어주어요. 열을 부를 수 있을 때, 7, 8을 부르고, 2, 3을 뒤에 여유로 남겨야 듣는 사람들의 감동이 이는 것이 아닐까? 여유에야말로 예술만이 줄 수 있는 흥겨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서양 사람들은 그걸 ‘놀이 (play)’, ‘장난끼 (playful)’라고 하는 것 같더군. 성심이의 이름 그대로 소리 하나하나 성심껏 불러. 그것이 성심의 좋은 점이지. 흥겨움이 기교로 떨어져서는 안 되지만, 여유를 둠으로 생기는 흥겨움을 스스로 즐기면서도 성심껏 정직하게 부른다면, 나 같은 아마츄어도 훨씬 감흥을 느끼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현재의 소리에서 여유를 남기는 것도 한 길이겠지만, 실은 현재의 소리가 그대로 여유를 남긴 소리가 되려면 체력이 생겨야 하고, 횡경막에 힘이 생겨야 하지. 그리고 그것이 적극적으로 발전하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지금 개발하고 있는 성악가의 요가를 배우면 껑충 뛸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는데… 몸이 터질 듯이 숨을 들이마시면서도 몸이 조금도 굳어지지 않는 여유, 그건 무서운 힘으로 밀어 올리는 바다 물결이 굳어지지 않고 춤추듯, 뛰놀듯 하는 흥겨움이거든. 성악가의 요가를 개발하면서 나는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만 아니라 온몸이 흥겨움으로 부드럽게 여유 있게 풀려 있어야 할 것 같이 느껴요. 김수영이라는 시인은 시를 쓴다는 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거라고 했는데, 노래는 문자 그대로 온몸으로 부르는 걸 텐데, 흥겨움이 목소리에서 울리기 전에 온몸에서 울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온몸이 흥겨워져야 한다는 거겠지. 그런데 흥겨움이란 즐거운 건데, 예술뿐 아니라 모든 진실은 슬픔에서 솟아나는 거요, 슬픔 그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둘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슬픔을 깔고 흥겨울 수 있고, 흥겨움 속에서 슬픔을 여운으로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이 내가 설교하거나 시를 쓸 때 부딪치는 문제요, 성심이 노래 부를 때의 문제이겠지. 슬프다고 엉엉 우는 것으로 시는 안 되고, 노래도 안 되는 거지. 슬픔이 흥겨움이 될 때, 그 슬픔으로 극복되는 거 아니겠어?  슬픔을 서로 나누는 데서 인정이 흥겨운 가락으로 움트기 시작하는 거 아니겠어? 성심이 노래를 매개로 해서 청중들의 가슴 속 슬픔이 아지랑이처럼 풀려 서로서로의 슬픔을 나누는 데서 인정이 풀리며 흥겨움이 물결치는 것이 아니겠어? 예술이 주는 기쁨이란 그런 거라고 나는 믿어요.

 

은숙에게 

 

은숙이 가을에 나온다니 바우도 같이 데리고 나왔으면 좋겠군. 다리가 길어졌다는 바우를 안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성숙한 좋은 노래를 들려줄 거라고 믿어요. 둘의 정신없이 바쁜 생활 보는 거 같아. 그리고 연구에 많은 결실이 있을 거고. 호근이 무대학을 중점적으로 택하고 공부하는 것은 잘 하는 일이지. 언제나 전공을 중심으로 공부하면서 관련이 발견될 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때그때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거든. 무엇이나 관련을 가지고 연구하고 이해해야 그것이 산지식이 되는 것이니까. 독일에 있는 친구들에게 문안을 고루 고루. 아무리 바빠도 한 시간이면 상당한 것을 쓸 테니까, 호근이 공부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써보내 주면 좋겠어. 호근의 편지는 언제나 깊이를 보면서 쓰는 것이어서, 내 눈도 열어주고, 따라서 나에게 한없는 기쁨을 주는 것이거든. 건투, 건투, 건투를 빌면서.

 

선희, 은희에게

 

 편지, 생일 카드 고마웠다. 선희 편지 아니면 카나다 소식을 들을 길이 없으니까. 은희는 독서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적어 보내주면 좋을텐데. 내가 좀 젊었으면 사회학을 좀 공부할텐데. 왜냐면, 우리가 주석해야 할 Text는 현장이라고 믿는데, 그 주석은 누구보다도 사회학자들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이거든. 박(영신) 박사가 정말 부럽다. 글썽이는 너희의 기도가 내게는 큰 힘이 되고 있다. 행복을 빈다. 

 

1982.6.10

 

성경을 읽는 자세와 한국 근세사를 읽으며 느끼는 답답한 심경 등을 표현.

성악을 하는 두 며느리에게 요가를 하면서 터득한 것들을 알려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