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방에서 일곱 번째 맞는 추석

(추석날) 바우야, 보라야





바우는 언니가 되고 보라는 누나가 되고, 얼마나 좋으니? 지금까지 사랑을 받아만 오다가 이제 사랑해 줄 사람이 생겼다는 거, 정말 좋지. 너희 몫으로 키스해 주고 할아버지 몫으로 또 한 번 키스해다오. 아기에게 노래를 많이 불러 주어라.



사랑





성심에게



만세, 우리 성심이 만만세. 조물주는 어쩌자고 힘이 센 남자들에게 아기를 낳게 하지 않고 약한 여자에게 아기를 낳게 하신 걸까? 은숙이, 영금이, 채원이 때도 그렇다고 안 느낀 건 아니지만, 성심인 시어머니 첫아기 낳을 때처럼 가냘파서 더 애처롭게 느끼는 걸까, 안쓰러운 느낌 금할 길 없구나. 그렇다고 느끼는 만큼, 새 생명이 중요하고 새 생명을 열 달 동안 몸속에서 제 피로 키우고 그 산고를 겪고 낳아 주고 제 젖을 먹여 기르는 성심이가, 아니 모든 여성이 소중한 거지. 생명의 소중함, 그 신비를 남자들은 아무리 해도 여자들만큼 알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자식이 아플 때뿐만 아니라, 자식이 잘될 때마저 여자는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죽음의 고비를 번번이 넘는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모성애, 거기에 인생이라는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나는 믿어. 아프게 아프게 제 새끼를 생각하는 마음이 다른 어머니들의 같은 마음을 알아주는 데서 훈훈하고 찐득찐득한 인정이 솟아나는 것이 아닐까?



난 요새 평화의 누룩이 무엇이냐는 생각을 하다가 그것이 곧 인정이라는 걸 알았어. 이 냉혹한 현실에서 인정 가지고 무얼 하겠느냐고 하겠지만, 난 인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약한 거라고 생각지를 않아. 그건 모성애를 약하다고 하는 것이 되니까. 해와 바람이 사람의 품을 헤치는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아? 바로 그거야. 세상이 냉혹해질수록 우리는 인정의 훈풍을 불어넣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치·경제 등 사회 조직은 어디까지나 이성으로, 계획과 숫자로 해가야 하는 건데, 거기 어디 인정이 끼어들 데가 있을까? 끼어들어도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사고인 거지. 사람은 분명 뼈와 살로 되어 있지만, 숨결이 없으면 그는 죽은 거 아니겠어?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조직 속에도 사람의 몸의 입김 같은 인정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어. 정치니, 경제니 하는 것도 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하는 건데, 우리는 거기서 인정을 느낄 수 없이 되었거든. 그야말로 살맛이 떨어진 거지.



이제 이 땅의 어머니들은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 오는 인정을 냉혹한 남자들의 세계에 불어넣어야 해. 성심이도 이제 그런 어머니 가운데 하나가 된 거지. 이제 성심이 부르는 노래에서도 인정의 아픔과 따뜻함이 들려올 거라고 믿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 불가결이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인정은 예술에 있어서 서정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시는 밥을 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들을 흔히 하지. 그런 의미에서 서정이란, 아니 예술이란 생의 필수 불가결은 아니지. 여분이요 사치로 보일 수도 있지. 그런데 그 서정이라는 것이 생의 한복판에서 울려 나오고, 생의 한복판으로 울려 들어가는 소리, 생의 의미와 가치를 울려 퍼뜨리는 소리, 그것 없이도 분명 밥을 먹을 수는 있으나, 그것 없이 먹는 밥에선 참 밥맛이 나지 않는 것, 인정도 난 그런 거라고 믿어. 이제 성심의 인생이 무르익으면서 예술도 더 익어갈 거야. 기대, 기대.





봄길에게





내가 요새 하는 아침 요가의 마지막 코스가 뭔지 알겠소? 손바닥으로 발바닥을 문지르는 거라오. 난 내 발바닥을 문지르면서 당신의 작은 발바닥을 문지른다고 생각하는 거요. 제 몸 돌볼 겨를없이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당신의 발바닥에서 당신의 인정을 뜨겁게 문지르는 거죠. 나는 당신의 발바닥 인정을 손바닥에 옮겨서 내 얼굴, 팔, 다리, 배, 가슴, 허리에 문지르는 거요. 나의 몸을 당신의 인정으로 덮는 거죠. 당신의 인정이 온몸에 스며들게 하는 거죠. 그것이 바로 평화의 누룩이 되는 길이구요. 난 요새 발바닥 인정을 주제로 시를 꽤 쓸 것 같군요. 발바닥이 땅에서 흙의 눅눅한 인정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나의 손은 시 한 구절도 못 쓸 거라는 생각이지요.



“손은 멋진 시를 써라. 그러나 나는 땅에 인정으로 생의 자국을 남기리라.” 나의 시가 다 잊힌 다음에 사람들이 나의 발자국에서 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면! 물론 후세인들은 그것이 나의 발자국이라는 것도 모르겠지만. 역사의 유적은 손이 남기지만, 역사의 자취는 발바닥이 남기는 게 아닐까요? 손이 남기는 유적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발바닥 자국에는 이름이 남아 있지 않아요. 거기는 인정이 찍혀 있을 뿐이지요. 우리는 이제 손이 남긴 역사의 유적들을 밀어내고, 그 밑에 덮여 있던 발자국의 역사를 찾아야 할 것 같군요. 가도 가도 식지 않는 발바닥 자국들의 용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이철용 장로의 『어둠의 자식들』과『꼬방동네 사람들』만큼 발바닥 자국들의 인정을 물씬 느끼게 해준 글이 별로 없었던 것 같군요. 인정만으로 뚜렷이 찍어가는, 이름 없는 발바닥 자국들의 역사, 그것이 우리 미래의 역사인 거죠. 육군교도소에 있을 때 읽은 휴고의 『노트르담 사원』은 발바닥 자국의 인정을 그리는 작품이었군요. 우리의 발바닥 자국에서 리얼리즘과 낭만주의가 만나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열심히 이 땅 위에 당신의 발자국을 남기시오. 발바닥은 손처럼 “이건 내 거다” 하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당신의 발자국은 유난히 작아서 어디서나 나는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요. 나의 이 심정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유리창에 서리는 입김일랑 손바닥으로 지우고 나는 발바닥으로나 살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 자국일랑 손바닥으로 지우며 나는 발바닥으로나 살거나. 



높아가는 눈길로 흰 벽에 적어놓은 서러운 말들일랑 손바닥으로 지우며 나는 발바닥으로나 살거나.



땅을 밟는 일 말고는 별 볼 일 없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이렇다 내색은 않는



노여운 일이라도 있으면 애매한 땅이나 쾅쾅 밟을 뿐인, 



흙에 닿을 때만 사는 것 같고, 그 마음 땅에만은 전해질 걸 믿으며,



오늘도 내일도 날 메고 옮기는 아! 발바닥의 인정으로나 살거나.



투박한 인정밖에 없는 발바닥으로나 살거나.



벗들이여! 우리 말 못하는 발바닥이나 서로 대보세.



인생을 살다가 정 서러워지거든 발바닥이나 대보세. 



발바닥 만세! 





발바닥 인생을 살고 싶은 나의 심정이라오. 감방에서 일곱 번째 맞는 추석이군요. 사식당에서 시루떡을 팔아서 사 먹었고, 관에서는 돼지고기 국이 나왔소. 아침에는 흰밥이 나왔지만, 나는 흰밥보다는 콩밥이 더 좋으니까 사양했지요. 추석이래야 우리는 성묘할 산소도 없는 처지니까.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사랑





어머님





내일이면 어머님을 뵙겠군요. 왔다 가시려면 힘이 드실 텐데, 달마다 한 번씩 오시는 어머님, 아버님의 심정에 그저 머리를 숙일 뿐입니다. 한편 그런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구요. 증손 하나 더 보시니 얼마나 좋으세요. 많이 사랑해 주세요, 제 몫까지.



어머님은 TV에서 역사극을 많이 보시죠? 누군가 성종의 사적을 드라마 해서 TV에 올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전 어젯밤에 이조 오백 년 야사에서 성종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치의 인간화의 실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정치의 인간화란 비정의 정치 속에 인정을 불어넣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성종은 바로 그것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조에서는 세종과 맞먹는 희대의 명군이 되었고, 백성은 태평성세를 누렸거든요. 인정이 평화의 누룩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정의와 인정은 결코 번지수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는 것 같아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 성종의 어머니가 며느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다시 받아드리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연산군의 비극에 기름을 쳤다는 것은 인정을 거둠으로 정치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 되느냐는 것을 보여 주는군요.



사울과 달리 다윗은 계산을 썩 잘하는 정치가였습니다. 반면에 그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메시아의 원형이 된 것이 아닐까요? 메시아 왕국에서는 야수들도 인정 많은 그가 양같이 될 거라고 한 건 (이사야 11장) 다윗의 인정에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인정이 솔로몬의 시대에 관료화되면서 줄어가지만 솔로몬 재판 이야기에도 아직은 그 인정이 살아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정의를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서릿발 날리는 하느님의 정의의 속살은 그지없이 따뜻하고 그윽한 인정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요? 십계명의 안식일 규정은 법이 아니라 일에 지친 가축까지 쉬게 하자는 데 뜻이 있었거든요. 니느웨를 예언대로 멸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불평하는 요나의 몰인정한 짓을 나무라시면서 하느님은 거기에 죄 없는 마소들이 얼마나 많으냐고 하십니다. 마소가 고생하는 것, 마소가 죽는 것까지 보고 계실 수 없는 마음인 겁니다.



얼마 전 성경을 읽다가 타작기를 끌고 타작마당을 도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구절을 읽다가 짐승에게까지 마음 쓰시는 하느님의 인정에 가슴 뭉클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잠언에는 정의란 저의 집 개 배고픈 걸 알아주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추수할 때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아라. 포도나 무화과를 다 따지 말고 더러 남겨라.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줍고 따먹게 해라.” 이런 법 규정이 다른 데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왕도(王道)는 과부, 고아, 떠돌이들이 굶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라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최소한 일용할 양식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저는 룻기를 읽다가 거기서 넘쳐나는 인정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인정이 다윗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던 거죠. 이렇게 인정 많은 하느님이셨기에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약소민족이 고생하는 것을 못 본 척하지 못하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언자들의 준엄한 정의의 외침에서 맥박치는 것도 이런 인정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평화는 정의와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정이 담기지 않은, 준엄하기만 한 정의는 결코 평화를 이룩할 수 없다는 걸 저는 이제 절감하고 있습니다. 예수와 가룟 유다의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민족이 통일되는 날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대립감, 적개심을 녹일 수 있는 인정의 용광로에 뜨겁게 뜨겁게 열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그 일을 못 하면 이 민족은 또다시 6·25 이상의 참변을 겪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10월17일) 아버님은 지난달보다 더 씩씩하셔서 좋았는데, 어머님의 모습을 뵐 수 없어서 유감이었습니다. 바우도 보라도. 어지나야 내년 봄 따뜻해지기 전에는 행차 못 하겠지만, 사진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착하디착한 의근, 성심에게서 어지나가 태어남으로써 자취를 감추어 가는 어진 마음이 되살아나기를 빕니다. 요새는 착하다, 어질다는 말은 들어 볼 수도 없이 되어 가기 때문에 그 마음이 우리 아기가 가는 곳곳에서 울려 퍼질 걸 생각하니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어진 마음은 그냥 착한 마음과 달라서 거기는 슬기도 있고 그 착한 슬기를 실천에 옮기는 과단성도, 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터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해가면서도 피난민 하나하나 알뜰살뜰히 보살피신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진짜 어진 마음이었지요. 과부를 시집보내라는 것을 혁명 공약에 넣은 녹두장군의 마음도 어진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어제 아침 요가를 하다가 평화의 누룩인 인정이 곧 이 어진 마음이라는 것을 깨쳤습니다. 그래서 새 아기를 ‘누루가’라고 하려다가 ‘어지나’로 부르고 싶어졌던 것입니다. 어진 임금이라고 할 때, 우리는 임금이 착한 마음뿐만 아니라 슬기와 경륜과 실천할 수 있는 과단성까지 갖춘 임금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 어지나와 함께 어질다는 말이 다시 살아나고, 그 말과 함께 어진 마음도 이 땅에서 살아나기를 빕니다. 건강하소서.





당신에게





세운상가 대신 전자에서 Cold Hot Bag을 두 개 사다가 하나는 냉장고에 넣어 얼리고, 하나는 설설 끓여서 아버님 허리에 3분씩 교대로 찜질을 해 드리시오. 머리에는 찬 찜질만 3분 대었다 3분 쉬었다, 아침저녁으로 한 30분씩 해 드리시오. 하루 한 끼니 먹고 여기 있는 어느 사람보다도 많은 운동을 하면서도 65kg 선을 거뜬히 유지하는 사람이 그냥 가족 위안이나 하려고 안 좋은 것을 좋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소. 어떤 시련에도 함몰되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를 나는 몸으로 하고 있으니까. 하느님도 분명히 나에게 그 힘을 주고 계시고. 지난 9월9일 새벽에 요가를 하다가, 나의 주기도는 이런 모습이 되었어요. “우리의 큰마음이시여. 타오르는 불길로 오시옵소서. 평화로 오시옵소서. 누룩으로 오시옵소서. 고루 내리는 이슬로 오시옵소서. 큰 기쁨 (용서하고 용서받기)으로 오시옵소서. (거슬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로 오시옵소서. 큰 슬픔 (우리를 온갖 절망, 허무, 슬픔에서 구할 수 있는)으로 오시옵소서. 여섯 번째 기도를 올리는 지난 금요일 새벽 요가를 하다가 나의 기도는 이런 고백이 되었소. “깃발도 바람이 없으면 맥이 빠집니다. 깃발은 바람이 불어야 살맛이 압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어깨춤이 저절로 나지요. 태풍이라도 불어오면 무당처럼 마냥 신나구요. 펄럭이다 펄럭이다 온통 찢어진다고 움츠러들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갈기갈기 찢어진 자락, 그것이 깃발의 자랑인걸요. 깃대가 부러지면 더 굵은 걸로 갈면 그만이구요. 북풍한설 – 논보라가 휘몰아오는 바람이라도 불어치면 가슴마저 화끈 달아오르지요. 다름 아닌 바람이 바로 당신의 입김인걸요. 고맙습니다. 하느님.”



의근에게: 아빠가 된 네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려나 기대했는데, 섭섭했다. “賢”을 그 많은 글자 가운데서 찾아냈다는 것은 참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찾아내시고, 내가 동의하고, 너의 삼 형제가 좋다고 했던 “鎔”자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처음으로 나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정말 섭섭하다. 鎔賢은 아주 좋은 이름이다. 쇠라도 녹일 수 있는 어진 마음으로 이름 그대로 이 시대가 기다리는 인물이 되기를 빌자.   



애비.





아버님께





아버님 책은 박영신 박사하고 일월각사가 합작하면 어떨까요? 박 박사를 중심으로 몇 사람 역사가를 동원해서 위원회를 조직해서 가끔 자식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일월서각에 맡겨 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월서각에서 출판하는 것도 좋겠고. 그러려면 거기서 쓰도록 하는 것이 순리이고, 일 추진도 빨리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버님의 후손들이 큰 소리를 내주기를 바라는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저는 이제 청신경이나 울리는 쇠 북소리 가지고는 안 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소리 없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울리는 마음의 울림 아니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두 팔을 휘저으며 지르는 고함 소리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바닥에 소리 없는 인정이 울려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교회는 빛이기보다는 소금이어야 하고, 외침이기보다는 누룩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소금이 아니라 빛을 강조하다 보니 교회는 독선적인 자기선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던 위선이 되고 말았습니다. 빛이라고 할 때도 철저하게 자기를 불살라 가는 모습이 강조되고, 빛 자체의 자랑이 아니라 빛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의 아름다움에 강조점을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소금이 제맛이 아니라 음식의 맛을 내듯이, 누룩이 가루의 맛을 내듯이, 이제 정말 기독교는 우리 것, 한국의 것의 아름다움을 겸허하게 드러내고 한국의 맛을 내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기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 제 자랑에 도취하여 있었습니다. 남이 어떻게 보느냐는 것 같은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아버님의 건투를 빕니다.



아들





은숙에게





객지에서 살림하면서 공부하느라고 고생한 티가 역력해서 마음이 쓰렸다. 이번 공연이 좋은 성과를 올리고 네 음악에 신경지가 개척되기를 빈다. 요가의 경험에서 하는 말인데, 노래에 담긴 인간의 슬픔과 기쁨에 깊이 잠기는 명상이 꼭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노래를 넘어가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1982.10.






넷째 손주 어지나의 태어남을 기뻐함. 성경에 나타난 평화와 정의의 문제에 대한 생각, 교회가 빛보다는 소금이어야 한다는 생각등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