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진실, 몸의 진실

아버님께

 

뜻밖에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처음 안아 보는 어지나까지, 사랑하는 식구들을 안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던지 모르겠습니다. 채원이와 보라가 빠져서 섭섭했지만요. 한 달에 한 번, 혹은 이렇게 한 번 더 편지를 쓴다는 기쁨이 홀로 사는 생활의 외로움을 무지개로 날려 버리는군요. 이 작은 흰 지면은 저에게는 금싸라기같이 소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제 마음의 무늬를 옮겨 놓으면 날 것 같은 기분이 된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지면을 메우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 무거움은 깜깜한 마음의 무거움은 아닙니다. 눈보다 양털보다 흰, 빛나는 바위의 무게라고나 할는지요? 세상에 그런 바위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겠지만, 저는 분명 그런 바위를 그저께 접견장에서 보았습니다. 그 감격을 하루라도 속히 아버님께 알려 드리고 싶어서 특별히 간청해서 이 편지를 쓰는 것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아버님은 저에게 바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의 맏손자 호근이를 바위라고 불렀었고, 그 이름이 맏증손자에게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저는 조국을 생각하면 흰 뫼가 머리에 떠오르고 흰 뫼는 아버님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의 손에 담아 조국에 바친 저의 시 「흰 뫼의 신화」에 그런 저의 심정이 조금은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천지개벽을 빌어 보았습니다. 그 개벽은 민족통일인 거구요. 호근에게 읽어달라고 하세요. 실천문학 1집에 있습니다. 흰 뫼와 같은 아버님 앞에서 저는 늘 저 자신을 왜소하고 가볍게 느끼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아버님의 바위 같은 무게가 없습니다. 아버님의 무게는 우선 몸의 무게였습니다. 아버님의 듬직한 몸이 그대로 바위였습니다. 그런데 그 꺼뭇꺼뭇한 바위가 이제 푸슬푸슬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저는 콧날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님을 안으면서 아버님의 몸이 새의 깃처럼 갑삭하니 가벼워졌다고 느꼈습니다. 힘 안 들고 버썩 안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푸슬푸슬 부서져 내리는 바위 같은 아버님을 쳐다보면서 서글프고 서운한 심정이 되었었는데, 불현듯 부서져 내리는 바위 속에서 햇빛을 받아 눈부신 흰 눈 같은 바위의 살결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 눈부시게 하얀 바위가 땅에 뿌리 박고 구름 위 하늘에까지 닿아 있는 것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황홀한 광경이었습니다. 몸의 바위가 부서지면서 그 속에서 아버님의 마음이 흰 바위로 우람하게 우뚝 솟아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편지에 저는 ‘진실’이란 몸에 있다는 말을 적은 일이 있었습니다. 몸을 괴롭히는 온갖 거짓은 마음에서 솟아 나온다는 것을, 마음은 몸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나의 몸의 진실이 소중한 만큼, 남의 몸의 진실도 소중한 것을 알아주는데 진실할 수 있다는 것도. 몸은 곧 흙이니까, 몸의 진실은 곧 땅의 진실 아니겠습니까? 땅의 진실이라는 말은 땅은 진실하다는 말이 되겠지요. 땅은 거짓을 모른다는 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땅은 아무리 사람들의 욕심으로 오염되었어도 얼마 동안 내버려 두면 저절로 지력(地力)을 회복해서 힘차고 아름다운 생명으로 넘쳐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땅의 진실, 곧 몸의 진실은 넘치는 생명이요, 그 생명의 아름다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땅의 진실에 닿아 있는 것은 머리도 아니고, 손도 아니고, 발바닥이구요. 예수께서 당신의 기도의 핵심에 “일용할 양식”을 두셨다는 것도 이런 각도에서 이해되는 일이구요. 모든 진실의 기본은 그 알파는 땅의 진실, 몸의 진실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몸의 진실을 소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몸은 먹지 못해서 야위고, 병이 나서 아프고, 묶여서 부자유스러운 걸 원치 않습니다. 걱정이 생기면 먹지 못하고 먹어도 소화를 못 시킵니다. 뇌하수체나 편도선을 거쳐서 몸에 병을 일으키지요. 그러고 보면 몸의 진실은 넘치는 생명과 자유와 희망과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몸의 진실은 어떻게 실현되는가요? 첫째는 우리 어지나가 엄마 젖을 먹을 만큼만 먹고 한잠 푹 자고 눈을 뜨며 싱긋 웃는 것이 몸의 진실이지요. 둘째는 땀을 흘려 일하고 먹는 밥이 맛이 있고 살로 간다는 것, 셋째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몸으로 사랑하면서 행복한 것, 이것이 진실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진실은 이것을 그대로 에누리 없이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꾸밀 필요도 없구요.

그런데 저는 그저께 이 모든 진실의 배후에 있고, 그 모든 진실에서 스며 나오고, 모든 진실을 받쳐 주고 품어 주는 마음의 진실을 아버님에게서 볼 수 있었습니다. 몸이 푸슬푸슬 부서지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진실 말입니다. 마음이 그대로 진실이요, 진실이 그대로 마음인 모든 진실을 꿰뚫고 있는 마음이 눈부시게 하얀 바위로 제 눈앞에 우뚝 서 있습니다. 저는 아버님보다는 말재간도 글재간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꾸밀 줄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저는 아버님의 진실에 미치지 못합니다. 아버님이 이 근원적인 진실의 나타남이라면 저는 그 전달자인 거죠. 저에게 그걸 보는 눈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고운 마음”을 “그 환한 마음”으로 고치고 싶어졌는데, 아버님의 그 환한 마음이 이미 저에게 비쳐오고 있었던 가 봅니다.

아버님은 정말 저와 같이 감방 생활을 하고 싶으신 거죠. 그 마음, 그 간절한 마음, 저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겁니다. 아버님, 어머님과 같이 주고받는 이야기체로 아버님, 어머님의 생애를 그리지 못하고 만다면, 제 가슴에는 죽어도 못 뺄 못이 박힐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부디부디 건강하게 계시다가 만나 뵈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빌겠습니다. 부디부디 건강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깎아 사랑해 주시는 아들 드림

 

어머님 위에 아버님의 마음에 대해서 한 말은 그대로 어머님에게도 드리는 말입니다. 옆에서 아버님을 많이 많이 격려해 드리세요. 나의 자랑인, 아니 우리의 자랑인 아버지, 어머니---. 아버님을 격려해 드리려면, 어머님이 우선 열심히 잡수시면서 아버님의 마음이 반짝반짝 빛나게 마음이 활발해지시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세요. 저에게 조금이라도 한을 덜 남기도록 해 주세요. 

불효 자식 익환드림

 

봄길에게

 

一人十役으로 너무너무 바쁜 당신도 이제 좀 쉬는 날이 와야 할 텐데. 쉬는 날은 아예 바라지 않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지. 생리적으로 남을 위해서 살아야 마음이 편한 당신이 언제 편히 쉴 날이 오겠소? 당신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몸의 평안을 희생하게 되어 있는 사람이니까요.

나에게 마음의 진실을 보여주신 것이 아버님, 어머님이셨다면, 당신은 그것을 나에게 몸으로 느끼게 해준 사람이라는 걸 지금에야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군요. 아, 하느님은 왜 나에게 이렇게도 고맙게 구시는 걸까요? 이 엄청난 은총, 이 큰 빚을 겨레에게 갚으면서 죽음을 살아야 한다고 새삼 마음으로 다짐하게 되는군요. 이 일에 있어서 나는 더없이 좋은 반려자를 얻은 셈이군요. 그런 게 아니지. 당신은 몸으로 마음의 진실을 사는 거고, 나는 그 전달자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군요?

바우가 떠난 다음 집이 얼마나 허전할까? 바우는 너무나 유별난 아이군요. 만날 적마다 더욱 더욱 그걸 느끼게 되는군요. 어지나의 얼굴은 그대로 천국이군요. 정말 인정 많고 어진, 누구나 가까이하고 싶은 성자의 풍모군요. 손자들을 생각하면서 또다시 하느님은 내게 너무 잘해주신다는 느낌이군요. 세상에 나같이 복받은 사람이 다시없을 것 같군요.

 

콧날이 찡하는 사랑으로

 

호근

 

「사랑이란 두 글자는」이라는 노래가 있지. 그렇게 사랑이란 두 글자가 되어 버리고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진실’을 쇠 북소리로 울려 주었느냐는 게 문제일 거다. 새로운 공연이 문제가 아니지. 사랑의 진실이라는 영원한 슬픔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는 게 「아이다」 공연의 목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시대는 슬픈 시대다. 사랑이란 위조지폐라는 걸 모두 알고 있어. 그래서 ‘사랑이란 두 글자는’ 하면서 사랑을 조롱하고 있는 거 아니겠니? 이 삭막한 시대에는 사랑도 진실도 슬픔밖에 없는 거지.

나는 요새 하느님을 “큰 한 슬픈 마음이시여” 하고 부르고는, “끝도 없이 끝도 없이 슬픈, 슬픔밖에 별도리가 없는 마음이시여” 이렇게 부르고도 미진한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의 슬픔이란 하느님의 슬픔에 비긴다면 큰 바다에 떨어진 눈물방울 하나 정도라고 생각한다. 사랑과 진실의 슬픔을 「아이다」만큼 아프게 작품화한 예술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베르디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고, 오늘 우리의 슬픔을 무대에 올려야지. 그런 각도에서 너는 돌아올 때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를 들러왔으면 좋겠다. 박종화 목사와 의논해서 여비 얻는 길을 찾아보아라. 이 시대의 슬픔을 머리로 안다는 것과 몸으로 느낀다는 것은 예술가에게 있어 하늘과 땅의 차이라는 건 네가 더 잘 알 테지만. 

 

바우야: Aufwiedersehen! 엄마한테 할아버지가 지은 찬송가를 배워달라고 해라. 다시 돌아와서 나하고 같이 부를 수 있게. 알겠지?     

할아버지 씀

 

성근

 

처음 제 나라를 떠나 세계와 조국과 자기를 보는 눈이 더 넓게 열리기를 빈다. 제 색씨도, 보라도, 얼마나 소중한지 더 잘 알게 되겠지. 같은 걸 보아도 보는 눈에 따라 엄청나게 다를 수 있으니까.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기를 빈다.      아빠 씀

모두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1982.11.24.

 

바위같은 아버지와 손자 바우의 이름에 대한 명상, 땅의 진실과 몸의 진실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