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이 되지 않는 신앙생활

당신께

 

오늘 점심을 먹다가 입안에서 툭툭 터지며 달디단 미음이 되는 밥알들의 소리가 양심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살속, 뼛속, 핏속에 스며든 밥알 속의 가는 목소리, 그 흐느낌, 그 아우성이 곧 양심이라는 걸 말이오. 그런데 그걸 누가 코에 걸고는 코걸이라고 하고, 귀에 걸고는 귀걸이라고 한단 말이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생명과 힘으로 지탱해 주는 밥알의 소리에 복종할 때, 우리는 양심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고 보면 양심이란 밥알을 소중히 하는 마음, 곧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생명의 가치를 최고로 알고 떠받드는 마음,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생명의 소중함을 알아주지 않고 이를 외면하고 유린하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은 양심이 아닌 거죠.

이 마음이 바로 유물론을 극복하는 마음 아닐까 싶군요. 마르크스의 무신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을 쓰다가, 어제 아침 「땅의 양심」이라는 시를 얻고, 어제는 양심 이야기를 썼는데, 그게 바로 무신론 극복의 길이었군요. 마르크스의 무신론을 극복하기 전에 극복해야 할 것이 그의 유물론과 역사 결정론인데, 사실 그동안 몇 달 동안 쓴 편지는 전부 유물론 극복의 길을 더듬어 본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게 양심의 문제로 밝혀지는군요. 양심의 문제는 밥알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인 거고.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생명의 일원론이 바로 유물론에 대한 해답인 거지요. 그것이 그대로 영만을 강조해 온 기독교 신앙의 과오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지요.

사람의 가슴에서 빛나는 도덕률은 시대와 환경, 전통,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흐려지고 비뚤어져서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도 생명 사랑하는 마음, 곧 양심만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소? 생명을 소중히 아는 마음, 곧 양심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야말로 인종과 종교와 전통과 주의 주장을 넘어서 다 동의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이것이 바로 나의 양심인 동시에 겨레의 양심이요, 인류의 양심인 거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양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워지는군요. 며칠 전 소내 방송에서 천주교 신부가 “양심은 우리의 지남침”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일이 있는데,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이를 소중히 아는 마음을 양심이라고 한다면, 그 양심이 우리의 생의 지남침이라는 것은 백번 옳은 말이지요. 일일이 하느님께 물어 가면서 살아가지 않아도, 하느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받아서 태어난 것이 양심이라면, 이는 정말 믿어도 되는 지남침인 거죠. 이 마음을 하느님께 돌려 버리고, 아니 덮어 버리고,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사사건건 하느님께 물어보고야 행동하는 미성년이 포이에르바하의 눈에 비친 기독교였던 거죠. 이철용 장로처럼 “하느님이 뭐야? 하느님은 양심이야”라는 확신을 가지고 인생을 당당하게, 자신 있게 살아가면서 믿는 하느님은 포이에르바하도, 마르크스도 그리 가볍게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소. 

역사 결정론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외치는 ‘자유’라는 말 앞에서는 설 자리가 없죠.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는 민주주의는 사람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매어 달리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의 주체가 되겠다는 거거든요. 이렇게 민주주의의 외침 앞에서도 마르크스의 역사 결정론은 설 자리가 없는 게 아닐까요?

“하느님은 양심이야. 양심이 하느님이야.” 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신앙인의 자세가 자칫 잘못하면 교만해지고, 자기의 양심을 절대시하는 중에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없지 않지요. 그런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겸허하게 하지요. 양심으로 산다는 건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봉사자가 되는 일, 결국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기 때문이죠. 소중하고 또 소중한 나의 생명을 희생할 만큼 생명을 사랑할 때에 비로소 양심이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이니까요. 어느 샌 지 모르게 흐려지고 비뚤어지는 양심을 십자가 앞에서 늘 씻고 바로잡는 일이 필요한 거죠. 이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의 과정이지요. 부단히 반성하고 뉘우치고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 기도하고, 남의 모습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 보면서, 서로 돕고 깨우치고 격려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죠. 양심들의 소리를 모아 고백하고 외치면서.

이런 신앙생활은 결코 아편이 되는 것이 아니지요.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했을 때는 우선 양심을 마비시키는 종교, 다음으로 행동을 마비시키는 종교를 지적했던 거죠. 생명 천시, 생명 파괴의 현실에는 눈감아 버리고 천당 갈 생각만으로 흐느적거리는 기독교인이 마르크스의 눈에는 구역질 나는 것이었죠. 따라서 마르크스의 무신론을 극복하는 길도 아편이 되어 있는 신앙을 떨쳐버리는 일밖에 없지요. 양심이 초롱초롱하고 생명 천시에 항거하고 생명 사랑에 심혈을 기울이는 종교인데도, 그 종교가 아편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기독교인들 중 아편 중독자들에게 환멸을 느낀 나머지 예수 운동의 민중성은 미처 몰랐다 하더라도, 자기 선조 중의 하나인 모세의 종교가 아편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알았을 텐데, 그걸 못 보다니. 예언자들의 메시아 왕국 신앙에서 공산 사회의 꿈을 얻었으면서도 종교는 아편이라고 모든 종교를 싸잡아 매도하다니, 애석한 일이군요. 아편이 되는 종교와 아편이 되지 않는 종교를 정확히 구별해서 볼 수 있었다면, 마르크스의 종교를 보는 사회과학적인 방법론이 완벽했을 거고, 그랬더라면, 그는 인류사에 크고도 적극적인 공헌을 했을 텐데, 애석한 노릇이 아닐 수 없군요. 그에게도 무의식적으로 배타적인 유일신 신앙의 사고가 부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도 기독교인들에게 무척이나 설움을 받는 유대인이었으니까요. 그는 나보다 꼭 백 살 위더군요. 1818년생이니까. 마르크스의 극복은 통일을 앞두고 우리가 기어코, 또 서둘러 이룩해야 할 과제인데, 그게 그리 어렵군요. 내일은 선희에게 쓰겠소.

  

1986. 11. 6. 당신의 늦봄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무신론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