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당신께

 

당신 아무래도 너무 마음을 쓰고 너무 무리 하나 봐요. 당신 얼굴 부은 건 그냥 심상하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얼굴이 붓는 건 심장 때문인데, 당신이 심장이 안 좋으리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신장이나 방광 쪽에 이상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다리가 부을 텐데, 아무튼 몸조심하세요. 이건 정말 간곡한 부탁이니까. 

하느님과 민족에 대한 충성으로, 부모에게 대한 효도로, 처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느라고 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군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의 모든 세포에 산소를 최대한 공급하는 일이에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세포들로 병과 싸워 이기도록 하는 일뿐이에요. 지금만큼 값이 있게 죽을 자리가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심호흡법으로 이 병들을 기어코 몰아내고 싶은 투지는 지금 왕성해요. 새 투병법의 개발을 위해서. 평상시보다 좀 더 깊은 호흡을 끊임없이 하고, 잘 때도 심호흡을 하며 잠들죠. 당신도 해보세요. 차 타고 다니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오늘은 신영복 선생에게 붓을 들고 싶어졌군요. 그럼 이만 총총.

 

                                 사랑

 

신영복 선생님

 

저의 아침 일과는 성경을 읽은 다음 선생님의 사색을 한 장씩 읽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선생님 사색은 전주 교도소에서 계수님께 보내신 88년 4월 6일 글발이었습니다. “상책은 역시 싸움에 잘 지는 것입니다. 강물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원리입니다. 쉽게 지면서도 어느덧 이겨 버리는, 이른바 승패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유해야 하고 도리에 순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밑줄을 긋고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

 젊은이들이 일을 벌여만 놓고 마무리를 않는다는 걸 개탄하는 노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통찰과 슬기 또한 선생님의 그물에 걸려 빛나는군요. 젊은이들의 그 결함은 농사일을 해보질 않아서 그렇다는 것 아닙니까? “농사일은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는 하나의 일관된 노동입니다. (여기 ‘하나의’는 그 좌장님의 말이 아니고 신 선생님 말일 겁니다. 그 ‘하나의’는 없는 게 좋습니다. 수사 뒤에 ‘의’를 쓰는 건 일본말입니다.)  일의 선후가 있고,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생명인, 이를테면 볍씨의 일생이면서 그 우주입니다.” (90면) 얼마나 빛나는 혜안입니까? 그것은 분명 부품을 분업 생산하에 조립, 완성하는 공업 노동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인류의 문명은 흙의 문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석유, 석탄이야 앞으로 4, 50년 안에 고갈되겠지만, 그 밖에 다른 지하자원들도 조만간 바닥이 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소위 산업 문명이 무엇으로 존속합니까? 그리고 보면 아이작 왓트입니까? 수증기의 힘을 이용해서 기관을 돌리는 걸 개발한 것이. 아무튼 그때 시작된 산업 문명이란 인류의 길고 긴 역사에서 한 4, 5백 년 반짝하고 말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흙을 너무 학대하고 천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선생님의 통찰도 저의 시야를 확 열어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사색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20년 징역살이가 슬그머니 부러워지기까지 했습니다. 20년이나 천충 만충 구만충 가지각색 인생들을 만나 같이 먹고 자고 싸우고 하면서 얻은 경험, 정말 귀중한 정신적인 광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사색 한 장씩 정성스레 경건한 심정으로 읽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의 빛나는 통찰, 모든 것을 사랑과 이해로 다스리시는 그 솜씨, 모든 악에서 선을 돋혀 내고, 모든 더러움에서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그 마음씨에 황홀해지기도 하지만, 그런 걸 통해서 건너다 보이는 인생의 파노라마, 사회의 명암, 역사의 굽이굽이, 그렇게 거창스러운 것이 그렇듯 도란도란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 소리처럼 들리니.

저는 진주 교도소에서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감옥이 하나하나 문을 닫는 사회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나갔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할 사람은 우리 전과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좀 생각해 주십시오. 선생님이라면 상당히 많은 동지를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일을 해낼 핵심 세력은 선생님이나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소위 잡범 전과자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의 동지들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이만 총총

 

1989.12.26

 

신 선생님, 

 

28일 아침입니다. 5월31일 계수님께 보낸 편지를 읽다가 반가운 뻐꾸기를 만났습니다. 새벽이면 언제나 나를 동창으로 불러내던 목관악기 소리의 임자 뻐꾸기를 신 선생님은 직접 대면하셨군요. 오늘 하루가 즐겁겠습니다.

 

늦봄 드림 1989.12.28

 

신영복 선생의 책을 매일 아침 읽는다면서, 그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얘기하고, 전과자들을 위해 일해 줄 것을 당부.

아내의 건강을 걱정하고,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토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