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남북공동선언을 돌아보며

봄길님께

 

어제 하루 어떻게 지냈어요? 내 걱정 한 시간도 잊을 수 없었겠지요. 오늘 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군요. 세 아들, 세 며느리, 딸, 사위, 그리고 손주들 생각을 하면 나는 기쁘기만 하군요. 한빛교회 식구들, 그리운 동지들,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가면 역사를 사는 뜻을 생각하게도 되고. 정부는 재야의 지도층, 간부층을 깡그리 순을 끊으려고 하는데…. 동환이 혜림이는 돌아왔겠죠? 통합을 반대하는 이우정 씨가 통합 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니 신민당도 한심하달 밖에. 민주당 꼴도 그렇고.

노 대통령이 부시와 만난 자리에서 통일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는데, 그게 과연 어떤 것인지? 미국은 이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는 거고, 그게 진정 통일을 향한 것이기를 빌 뿐이죠. 얼마 전 통일원 장관은 독일식 흡수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했던데, 어제 한겨레신문 기자의 논평은 독일식 흡수 통일에 합의한 게 아니겠느냐고 했으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군요. 아무튼, 올가을쯤이면 구름이 걷히고 시야가 열리겠지요. 좌우단간, 어제 스포츠난에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과 북쪽 축구팀이 아시아 예선 결승에서 맞붙게 되면, 또다시 단일팀으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나갈 전망이 있다는 기사를 읽고는 답답하던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어요.

오늘은 7월4일, 19년 전 이날의 흥분이 꿈만 같군요. 우리는 아직 이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사실 그 꿈이야 일 년도 못 되어 73년 6월29일 유엔 동시 가입을 제안한 남쪽의 제안으로 깨어졌죠. 이제 북쪽도 이를 받아들임으로 한반도기 핵전쟁의 불바다가 되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구요. 남북이 다 이걸 통일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공언하고 있으니, 믿어 볼 밖에. (주: 7.4 남북공동선언은 1972년의 일로 19년 전인데, 문익환이 착각하여 편지에 21년이라고 쓰고, 유엔 동시 가입 제안도 73년인데, 71년이라고 썼음)

일제의 지배 아래서 그 고생을 하고 그 서러움을 받은 것도 36년, 지긋지긋했었는데, 이게 뭐예요? 분단이 무슨 보물단지인지, 47년이 되도록 지워버리지 못하고, 서로 눈을 흘기며 건너다 쳐다보고 괴뢰니, 주구니 하며 서로 욕지거리를 하며 미워하다 못해 서로 죽이고. 이 마의 분계선을 아직도 확 걷어낼 생각들을 못 하니, 이게 어디 낯 뜨거워 살 수 있어요? 국제 사회에서는 병신이 되고. 내가 동네로 돌아다니며 동환의 흉이나 보고, 동환이는 내 흉이나 본다면, 우리 둘 다 병신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이 겨레가 바로 그 꼴이거든요. 그래서 분단 50년을 넘기는 건 민족의 치욕이라고 했죠. 

치욕도 치욕이지만, 그동안 우리가 피를 본 건 얼만데. 6.25 전쟁 때 삼백만이 죽었다던가? 그 밖에도 제주 4.3, 여수 순천, 거창, 부마, 광주 등 남쪽에서만도 얼마나 피를 보았는데, 민족 통일을 외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감옥살이를 하고, 그러는 가운데 가족들의 피를 얼마나 말렸는지. 나야 여섯 번째지만, 난 약과지요. 이런 비극을 걷어내자는 건데.

분단이 안 됐더라면, 일본이 패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중국이 내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우리는 분명 아시아 새 질서를 영도하는 민족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당당한 민주 국가로서 경제 대국을 이루어 어쩌면 일본이 G7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우리가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도대체 무슨 꼴이람. 아직 아주 늦은 건 아니라구요. 이제라도 통일만 되면 우리는 분명 만회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해요. 분단이라는 불리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만큰 해낸 민족이니까.

우리가 잘살게 되었다고 해서 G7에 낄 생각을 해서야 안 되지요. G7이라는 것들은 제3세계를 억압하고 그 민중들을 착취하는 악이니까. 우리는 제3세계 민중의 해방을 영도하는 영광스러운 민족으로 올라서는 거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내 어찌 모르겠어요? 아! 그게 한낱 백일몽일까? 우선 동남아에서 경제적으로 일어나는 나라들을 우리는 경제적인 경쟁의 상대로 보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그 나라들을 동반자 나라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 또 꿈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하겠지요.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일이 바로 역사를 살아가는 일인데야.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는데 밖에 나가 뛰고 걷다가 들어와서 좀 누워 호흡으로 氣를 들여 마시다가 이 편지를 끝막음하네요. 오늘도 이만. 안녕. 당신의 늦봄

 

1991.07.04

 7.4 남북공동선언 19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통일 논의가 진전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