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어제 (8/20) 신문은 우리의 뒤통수를 세대 네대 후려갈기는 기사들로 차 있군요. 고르비의 실각, 전혀 예상되지 않은 것이 아니었죠. 미국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지원하여 고르비를 곤경에 몰아넣으려다가 유럽 정치가들의 반대로 고르비 지원으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이 되었을 때, 또 지난번 G7 수반들이 모였을 때, 부시는 결국 다른 나라 수반들의 주장에 밀려서 고르비의 개혁 정책을 지원하기로 마지못해 받아들였을 때, 미국의 의도가 어디 있었는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죠. 이번 고르비의 실각은 소련의 경제 개혁이 정치 개혁을 전혀 따를 수 없었다는 데 그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는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군수 산업체들이 원하던 것이 이루어진 것만은 사실이 아닐까 싶군요. 지난번 부시-고르비 회담에서 고르비는 너무 심한 굴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이 부시는 밀어붙였거든요. 소련 군부가 이 시점에 쿠테타를 일으키는 한 구실을 부시는 제공한 것이 되었죠. 소련의 최대의 공화국인 러시아 공화국은 고르비보다는 더 급진적인 옐친을 대통령으로 뽑았는데, 옐친의 지지 세력들과 군부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 수구 세력 사이의 힘의 대결이 21세기를 향해서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려는 인류의 역사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 같군요. 소련이 전국적인 내전으로 돌입할지도 모르겠군요.
우리는 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거나 아닐까 싶어 안타깝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군요. 이럴 때일수록 7천만이 하나가 되어 우리의 주권과 권익을 찾아 확립해야 하는 건데, 그러면서 우리 겨레의 활로를 트는 일에 있는 슬기와 힘을 모아야 하는 건데, 아무래도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안타까워 지는군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한 걸음도 물러 설 자리가 없는데 서 있거든요. 어쩌면 우리는 한 세기 동안 그런 역사를 계속 살아온 것이 아닐까요?
백척간두에 선 이 민족의 운명을 풀어가는 우리 내부의 모습은 어떤가? 검찰은 오대양 32인 집단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고 생각되는 여러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사다운 수사 없이 서둘러 자살로 결론을 내리는가 하면, 박노해 씨에게는 사형을 구형하고, 이건 7천만 겨레를 하나로 묶어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보여주는 거죠.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희망적인 기사도 없지 않군요. 김대중 씨가 제시한 야권통합 방안을 민주당이 일축하지 않고,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고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는 건 퍽 반가운 일이군요. 민주당 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무엇보다도 마음 흐뭇한 읽을거리는 김종북 장금실 부부의 『다수확보다는 살아 숨 쉬는 땅 만들기에 7년 노고』의 기사였군요. 이 내외도 풀무원 출신이군요. 그분들은 우리가 언제 영금이네와 같이 갔던 진도에서 살며 무농약 유기농법으로 생명 운동을 실천하고 있군요. 주소는 전남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연산 마을. “땅의 양심” 인쇄한 것이 있으면 하나 보내드리고 나의 격려의 편지도 복사해 보내주시오.
김종북 장금실 내외분께
어제 한겨레 신문에 실린 기사를 읽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어 붓을 들어 치하의 말씀을 올리고 싶어졌습니다. 저도 나이가 좀 젊었으면 농촌으로 뛰어들어 무공해 농업에 투신해 보고 싶은 마음 굴뚝 같기에, 두 분의 이야기가 저를 정말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땅을 사랑하는 일을 뒷전으로 돌리고 말하는 이웃 사랑이나 겨레 사랑은 거짓말이라는 게 저의 평소의 소신입니다.
앞으로 50년 안에 석유, 석탄이 다 없어집니다. 그밖에 다른 지하자원이 고갈되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결국 인류는 앞으로 한 세기 안에 땅을 갈아 사랑하고 섬기며 자연과 함께 살아남는 길밖에 없습니다. 요는 그때까지 이 땅덩어리가 생명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느냐 않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존층은 엷어져 가고 있고, 남극에서는 뚫리기까지 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땅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이나 겨레까지 갈 것 없이 나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땅을 나의 생명 사랑의 수단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땅은 곧 우리의 목숨이기 때문에 땅을 사랑하는 일과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는 일은 한 사랑입니다. 이런 흐뭇한 사랑 실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두 분의 생명 사랑 운동 이야기는 저 말고도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희망을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더욱더 건강하신 가운데 생명 사랑에 많은 기쁨 있기를 빕니다.
안동에서 늦봄 문익환
1991.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