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

당신께





언니(박용길의 언니 박남길)의 뽀얀 얼굴에 비해서 당신의 얼굴이 너무 초췌해서 내 마음이 안 좋군요. 내가 당신을 너무 고생시키는 것 같은데, 어쩌리오, 모두가 민족의 수난인걸. 그래도 언니에 비하면 당신이 팔자 좋은 거죠. (구)흥남(박남길의 돌아가신 남편)이 형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면, 아들딸 사위 며느리를 거느리고 세계를 좁다 하고 신나서 돌아다니며 만년을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정말 아쉽군요. 난 언제나 (정)명화(박남길의 며느리) 삼남매의 원숙한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을는지. 이런 말을 한다고 안쓰러워할 건 없다구요. 난 지금 생의 최고의 시기를 여기서 보내고 있는 거니까. 70여 년 익혀온 것을 느긋이 거두면서 아주아주 창조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토요일에는 공(덕귀) 여사의 편지와 지선, 진관 스님의 편지를 받아서 얼마나 기뻤던지. 당신의 글발은 71~74신까지 들어왔구요. 방제명이는 술을 못 끊어서 편지를 못하는지 모르겠군요. 서울에서 날 보러오고 싶다는 이들의 마음도 모를 바 아니지만, 안동에 계시는 신부님들이나 목사님들을 못 뵙는 건 정말 아쉽군요. 특별 교섭을 해보라고 하세요.



문(동환) 박사 내외가 연변대학에 객원 교수로 가는 일은 구체적으로 계획해 보았으면 어떨까 싶군요. 내 생각에는 기독교 장로회와 캐나다 연합교회가 공동으로 지원하고, 한신대학교와 토론토대학이 공동으로 파송하는 형식이면 어떨까 싶네요. 동거우가 문화혁명 때 싹쓸이를 당했다는 건 정말 이해 못 할 일이군요. 세상에 그럴 수가! 우리가 마시던 샘을 동환이도 꼭 찾아 마시고 오고 싶었다니, 그 샘은 가끔 내 꿈에 나타나는 샘인데. 정우 동생 (신우)가 서울에 있는데, 저의 집 사진이라도 보여주면 좋아할 거요. 명신 동문회 쪽으로 알아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텐데. 아버지, 어머니의 북간도 이야기는 1910년까지만 보내주도록 하시오. 용정중학교의 뿌리인 명동중학교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공덕귀 선생님께





보내주신 글월 반가이 받았습니다. 구구절절에 담긴, 아니 한 획 한 획에서 풍겨오는 선생님의 그윽하고 간절한 마음 남김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생의 동반자를 먼저 보내시고 허전한 심정 무어라고 위로의 말씀드릴 기회조차 얻지 못했군요. 이제 자유로운 몸으로 70년대의 뜨거운 마음으로 일선에 나와 어린 후진들의 뒤를 밀어주신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들 며느리의 사랑을 받으시면서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을 즐기며 여생이 복되고 보람 있는 나날이 되시기를 빕니다.



제 소식은 박용길 동문에게서 자주 들으시리라 믿습니다만, 저는 지금 더없이 건강한 몸으로 하루하루를 축복으로 살고 있습니다. 요새 건강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저도 놀랍니다. 건강과 인생에 관해서 저에게 이만큼 깊고 넓은 이해가 축적되어 있었던가 하구요. 책을 조금씩 참고하기는 하지만, 거의 제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깨달음이 붓끝으로 술술 흘러나오는군요.



저의 생애에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안동교도소에서 보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건강에 관한 책 외에도 아픈 사람들의 아픈 사랑 이야기도 꽤 잘 익어가고 있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이 땅의 민주화와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서 밤낮없이 비시는 선생님의 간절한 기도가 곧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면서.



문익환 올림



1991.08.26





 아내에게는 동생부부가 연변대학 객원교수로 가는 문제에 대한 생각을, 공덕귀 선생에게는 편지를 보내준 데 대한 감사를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