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운동은 평화 운동이자 생명 사랑 운동이다

당신께

 

죄라야 통일 운동을 한 죄밖에 없는데, 일흔이 넘은 사람 가두어 두는 세상도 한심하지만, 일흔이 넘은 할망구, 잠깐 만나려고 서울서 안동까지 왔다 갔다 하는 걸 미안하게도 생각 않는 세상을 한심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나야 편안히 들어앉아 책이나 읽고 요가나 하고 시나 쓰고 하는 상팔자니까 불평할 거야 없지만, 혼자 터벅터벅 왔다가 혼자 돌아서 나가는 당신의 꼴, 정말 못 보겠다는 생각이 어제 새삼스레 들었군요.

평화의 왕 메시아가 오리라고 이사야가 예언한 지 7백 년이나 사람들이 찾고 기다렸던 걸 생각하고 오늘의 이 한심한 현실을 참아야지요. 메시아를 7백 년이나 기다린 사람들도 있었는데, 우리야 이미 오신 메시아와 함께 역사를 살아가는 거니까!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예수라는 이의 생은 이 한마디 노래에 집약되어 있지요. 사실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죠. 지상에 평화를 가지고 온 그의 생이 그대로 하늘 기쁨이요, 영광이라는 말이니까요. 사회를 위해서, 겨레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무언가 뜻있고 보람 있고 값있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일이 어디 예삿일이리오? 사실 모든 사람의 생 속에는 그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못 찾고 일생을 공쳐 버리죠.

한국 근대사에 가장 뚜렷한 인물을 들라면 아무래도 우리의 영원한 벗 장준하의 이름을 들어야 할 것 같군요. 일제 시대 그의 생의 의미와 목적은 독립이었죠. 해방 이후 혼란기에 들어서면서 그것은 자유와 민주였지요.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그게 ‘통일’ 아니었어요? 자유니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모든 가치가 민족 통일에 기여하는 한 의미 있는 것이라고 그는 외쳤거든요.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자유, 평등, 정의는 반민족적인 죄악이 된다는 말이죠. 그걸 뒤엎어 보면 이렇게 되죠.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가치의 실현을 외면한 통일 또한 진정한 통일일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의 통일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자유나 평등이나 정의의 실현이 당연히 포함되었죠. 그런 가치의 실현은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었구요. 그렇기 때문에 요새 문제가 되는 민족 해방이냐 민중 해방이냐는 논쟁은 그에게서는 문제가 될 수 없었죠. 그게 그거라는 말이니까요. 그것들은 결코 배타적일 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민중 해방과 민족 해방이 하나라는 나의 주장은 장준하 통일론의 해명이라고 해도 되죠.

장준하가 생각했던 통일 운동은 실로 평화 운동이었죠. 평화란 바로 모든 가치의 완성이요, 총화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예수가 지상에 가지고 오셨던 평화의 내용이 바로 그런 거거든요.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평화란 그렇게 소극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평화 운동은 인간의 모든 가치 있는 활동의 가장 적극적이요, 가장 포괄적인 운동이라고 해야 하죠.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운동이 평화 운동이거든요. 평화 운동은 생명 사랑 운동이니까요. 전쟁이 생명을 살상하는 일이라면, 전쟁의 반대인 평화가 생명 사랑이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어요? 생명을 사랑해서 이를 키우고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꽃피우는 일 이외에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일 수 있겠어요? 따라서 사람이 하는 모든 가치 있는 일은 궁극적으로 생명 사랑 운동, 곧 평화 운동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생명을 경시하고 짓밟고 죽이는 데 이바지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가치 있고 고상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도 위선이요, 죄악이죠. 따라서 우리의 통일 운동은 결코 정치 운동에 멎어 있을 수 없어요. 그것은 평화 운동, 곧 생명 사랑 운동이어야지요.

당신의 늦봄 성탄 전야에

1991. 12. 24.

 

 성탄절 전야에 평화를 생각하며, 민족 해방과 민중
해방은 하나라는 자신의 주장이 통일 운동을 평화 운동으로 본 친구 장준하의 생각을 해명한 것이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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