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마이카 시대의 희망과 전태일의 아픔

당신께

 

어제 신문을 보고는 마음이 좀 놓이는군요. 이북에 대한 미국의 압력 요청에 우리 정부가 협력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니 당연히 그래야지요.

어제까지 몇 차례에 걸쳐 회고담을 써야겠다는 결심이 어떻게 서게 되었는지를 썼지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 민족이 겪은 일들을 써 내려가는 것이 회고담이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나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내가 겪은 일을 내가 느낀 대로 쓰는 일이니까요. 내가 겪은 일이라고 해도 그건 결코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민족적인 경험을 말하죠. 민족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겪은 나의 경험을 회고하는 일이지요. 가급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싶지만, 객관적인 역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죠.

회고담이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회고담이 많이 쓰일 필요가 있죠. 많은 주관적인 회고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서 역사가 쓰여야 하구요. 역사가의 주관이 배제된 엄밀한 의미의 객관적인 역사가 과연 가능한지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죠.

회고담이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동시에 시야가 역사에 비해서 좁을 수밖에 없죠. 한 시대의 전체상이 아니라, 내가 몸으로 겪은 일에 국한돼야 하기 때문이죠.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역사와 회고담의 차이는 주관적이다, 또는 객관적이다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드러나네요. 회고담이 개인의 경험에 국한되는 반면에 역사는 그 시대의 총체상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하면 정확할 것 같군요.

잔소리가 너무 길어졌네요. 이제 정말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내가 중앙정보부(지금의 안기부)에 끌려가서 2박 3일 조사받고 나온 것이 1975년 여름이었지요. 그때 나는 신·구교 공동 구약 성서 번역 책임자로서 성서 번역하는 일 이외에는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거든요.

나의 인생은 2백~3백 명 모이는 교회의 착실한 목사로 설계되었는데, 목회의 길이 열리지 않고 뜻밖에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거든요. 신학교 교수로 한 15년 있으면서도 목회의 길을 몇 차례 찾아 나오려고 해봤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다가 성서 번역 일이 맡겨지자, 성서 번역이야말로 나의 필생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신학교 교수직도, 한빛교회 목사직도 다 내동댕이치고, 성서 번역에 나의 생을 몽땅 투입하게 되었죠. 성서 번역이야말로 나의 생의 피날레라고 믿었죠. 그것이 1968년이었죠.

대망의 70년대, 마이카 시대를 바라보며 사람들의 가슴이 부풀어 있을 때였지요. 그런데 그 70년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사건이 평화시장의 한 노동자의 분신이었죠. 이름은 전태일. 시일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암담한 현실에 몸을 던졌죠. 그것이 75년이 되면 이 겨레 전체를 뒤덮는 어두움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죠.   

당신의 늦봄.

 1992. 2. 12. 

 

 신학대학 교수로 15년 재직하고 1968년 성서 번역이 인생의 마지막 일이라는 생각으로  전념하다가 1975년에 처음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고
, 1970년의 전태일 분신 사건이 겨레의 아픔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