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성도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말이다.”(에베소서 5:4) 이 말이 내 귓속에서 날마다 한 번씩 잔잔히 울리다가, 추석날 아침에 큰 쇠 북 소리로 울려오더군요. 어머니 빈소에 찾아와서 백낙청 씨가 한 말. “세상에 목사님처럼 행복한 사람이 있어요?” 상주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하는 문상객도 좀 어이없는 사람이겠지만, 그 말이 하나도 고깝게 들리지 않고, 고맙게 들렸거든요. 그런 것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사이였으니까, 그분도 그런 말을 했고요.
추석날 아침밥을 받아놓고 아버님, 어머님이 너무 고마워 큰절을 올렸는데, 그 말이 내 가슴에 크게 울려왔어요. 나는 하느님께 불평할 일이 터럭 끝만큼도 없거든요. 그냥 고마울 뿐이니까요. 열두 번째 추석을 감옥에서 맞으면서도 하나도 나는 불평스럽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없어요. 그냥 그냥 고마울 뿐이죠. 이 징역살이까지도.
산소를 새로 단장을 하고도 아직 한 번도 못 가보는 신세지만, 그게 뭐 대순가요? 은희와 영금이는 시어머니 산소에 가느라고 못 갔겠지요. 내년에는 추석 전날 성묘하기로 하고 다 같이 갔으면 어떨까 싶군요. 추석날에는 은숙이, 성심이, 채원이는 친정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친정 식구들과 같이 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제사상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성찬식의 의미를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예수의 첫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면서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라”고 하거든요. 성찬식 때뿐 아니라, 끼니때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 주의 은덕이 어찌 다른 모든 은덕을 배제하는 은덕이겠어요? 다른 모든 은덕을 진정 은덕 되게 하는 은덕이지요.
날이 활짝 개서 정말 좋네요. 당신의 늦봄
장기표 동지
감낙중 선생의 일 때문에 모두 얼마나 마음 아플지요? 내 경험으로 미루어 안쓰러운 건 김 선생이 아니라, 그 가족들이 아닐까 싶군요. 나의 격려를 전해주시구려. 안기부가 김 선생을 다루는 솜씨로 보아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싶군요.
36년 전 사선을 넘을 때 생각하면, 지금이야 약과 아니겠어요? 내가 평양 간 다음에 내 가족이 겪은 곤욕에 비하면, 김 선생 가족이 지금 겪는 곤욕은 훨씬 가벼운 것이 아닐까요? 모든 것이 제대로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이 시련도 겪어나가야지요. 유난히 뚜렷하고 단호하셨기 때문에 그분과 그 가족이 겪는 수난 또한 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장 동지가 『말』지에 기고한 글을 잘 읽었어요. 명쾌한 글솜씨 여전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그 글은 나에게 좀 충격이었어요. 그 글을 총선 전에 읽었다면 모를까, 총선 후에 읽어야 한다는 게 좀 석연치 않았다고 할는지요? 재야는 지분을 찾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재야는 누가 정권을 잡든 비판 세력으로, 압력 단체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당이나, 어느 사람을 지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무엇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준엄한 비판의 채찍을 들 권리와 자격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요? 늦봄
1992.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