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불변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모든 종교 보수성의 뿌리

우리 봄길님 

 

어제 표준 새 번역 성경전서가 들어왔군요. 반가웠어요. 인쇄와 제본이 단정하고 아름다워서 마음에 드는군요. 공동 번역이 출판되던 1979년에 비해 인쇄술이나 제본 기술이 엄청나게 향상됐다는 걸 알 수 있군요.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여기저기 띄엄띄엄 읽어 보았는데, 어법에 더러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깔끔한 번역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성이 들었다는 걸 알 수 있군요. 외국어 번역에서는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어서 참고될 만한 번역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우리말의 ‘이’, ‘은’ 토씨 문제라는 걸 창세기 1장 2절에서 알게 되는군요. “어두움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여기서 ‘어두움’ 다음에 ‘이’ 토씨가 온 것은 잘된 것이지만, ‘하느님의 영’ 다음에 ‘은’이 온 것은 문제거든요. ‘물 위에’의 ‘에’ 토씨도 문제군요. ‘움직이다’가 제움직씨 (자동사)이기 때문에 ‘에’를 썼죠. ‘간다’가 제움직씨지만 우리말은 길을 간다고 하거든요. ‘흐른다’가 제움직씨이지만 우리말은 집 앞을 흐르는 강이라고 하구요. 공동 번역도 이 점은 잘못되었군요. “어두움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그 물 위를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가 돼야 옳죠. 앞부분도 “어두움이 깊은 물 위를 뒤덮고 있었다”고 하는 게 나을 거구요.

이런 점까지 신경 쓰면서 읽을 독자가 몇이나 되겠어요? 이런 사소한 것은 두고두고 바로잡기로 하고 일단 번역위원들에게 축하를 드리고 수고를 치하해야지요. 한 가지 유감이라면, 신· 구교 공동 번역이 신·구교를 다 만족시킬 수 없어서 신교는 신교대로, 구교는 구교대로 새 번역을 내서 같은 성경을 쓴다는 에큐메니컬 성서 운동이 과도기적인 한 사건으로 의미를 갖는 데 멎어 버렸다는 점 ─ 유감이군요. 구약 번역에 책임을 졌던 사람으로서 죄책감마저 느끼게 되네요.

신교가 공동 번역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고유명사가 구교 쪽을 따른 것이 많다는 것이라는데, 이건 정말 정당한 평가가 아니죠. 구약에 관한 한, 고유명사는 거의 신교 쪽 읽기가 채택되었거든요. 선 신부님은 다윗은 다위, 여호수아는 요수에라고 부르셨어요. 끝까지 그게 입에 배어 있었어요. 그러나 구교 측에서는 그걸 문제 삼지 않았어요. 전 구약에서 구교를 따라간 것은 ‘이사악’과 ‘에제키엘’이었죠. 예스겔보다는 에제키엘이 원문에 가깝기 때문이었죠. ‘이삭’은 곡식 이삭과 혼동되는 것 같아서 원문을 따라 ‘이스학’이라고 했다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단어라도 덜 익숙한 새 말을 하나라도 덜어 드리고 싶어서 ‘이사악’을 채택했죠. 신교도에게 이것 하나쯤은 새 이름을 익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구교도들은 거의 모든 고유명사를 새로 익혀야 할 판이었으니까요. 신약의 고유명사는 구교를 따랐다기보다는 중국식 읽기를 원문에 가깝게 했죠.

그런데 이런 사소한 것이 신·구교가 같은 성경을 쓴다는 큰 의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죠. 유대교가 안식일 법과 할례 법을 고집한 것을 나무랄 자격이 없죠. 신·구교 사이에서 성서의 고유명사 문제가 같은 성경을 읽는다는 커다란 의미를 못 보게 하는 일이 없는데, 다른 종교와 진리 문제를 같이 이야기하고 상호 이해에 이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는 걸 알 수 있지 않아요?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수성에 근본 문제가 있죠.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모든 종교의 보수성의 뿌리이죠. 게다가 여러 천년 지켜 온 전통을 고수하려는 과거 지향적인 성향이 그 보수성을 부채질하구요.

나에게도 그 보수성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죠. 그런데 그게 불교도들과 무신론자들과 같은 운동을 하는 사이에 슬슬 뽑혀 갔어요. 세계 종교들이 서로 대화를 해야겠다고 심각하게 느끼는 까닭이 그런 데 있죠. 세계 인구의 3%밖에 안 되는 기독교인들의 힘만으로는(아시아 인구의 5%) 인류가 부닥치고 있는 문제를 풀기에는 너무나 힘이 모자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 문제되는 게 전 인류 공동의 문제라는 인식이 생겼구요. 다른 종교들도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기쁨이 있죠.

1993.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