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통일 문제는 세계 평화의 중요한 고리

우리 봄길님

 

한겨레는 새 내각 구성을 보고 김 정권에 개혁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더군요. 한겨레야 그렇게 계속 채찍을 휘둘러야겠지만, 나는 새 내각 구성을 보고 새 정권의 의욕을 크게 평가하고 싶어졌군요. 『새 경제 구상』이 곧 발표될 테니까, 경제 문제는 그때 가서 평가를 하기로 하고, 통일원 장관, 교육부 장관, 안기부장 임명을 보고 남북 민족 문제를 보는 김 정권의 시각이 180도 돌아갔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구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 취임사에 있는 이 말은 예사로 들어 넘길 말이 아니죠. 이건 수사학적인 차원을 넘는 알맹이가 있는 말이거든요. 내가 한겨레 편집실에 있다면, 이 말을 크게 부각시켰을 거로구만요. 그래서 대통령이 자기가 한 이 말을 배신하지 못하게 해야죠. 클린턴 미 대통령의 특사에게 “우리는 북을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한 말도 김 대통령의 사고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로 크게 환영할 일이죠.

  새 정부의 사고를 이렇게 바꾸어 놓은 힘이 “험난했던 민주화 도정에서… 먼저 가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있다고 했거든요. 우리의 행동을 죄악시하고 적대시하던 민자당 정부의 사고를 이만큼 바꿔 놓았다는 것으로 유가족들은 위로를 받아야지요. 기득권 세력들이 이에 저항하겠지요. 새 정권이 이 저항에 굴복하지 않도록 이 정권을 우리는 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우리의 고생과 희생에서 맺힌 열매가 다시 땅에 떨어져 짓밟히도록 해서야 되겠어요? 오늘은 이만.  당신의 사랑 늦봄

 

 

백낙청 교수님

 

저번에 보내주신 글월 반가이 받아 읽었습니다. 회신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교수님이 주창하는 분단 체제론을 고은 씨가 전적으로 찬동했군요. 나도 이에 대해서 내 견해를 밝혀야 할 텐데, 그 글이 지금 옆에 없어 뭐라고 말할 수 없어서, 분단 체제라는 말속에 이런 내용이 담길 수 있지 않나 하는 내 생각을 간단히 적어 보고 싶습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은 지리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갈라져서는 안 되는 하나인데 둘로 갈라져 있다. 지금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들은 이 부자연스러운 분단과 관계없는 것이 없다. 따라서 어떤 문제이건 남쪽만의 문제도, 북쪽만의 문제일 수도 없다. 모두가 공동의 문제다. 남쪽의 문제를 푸는 것이 북쪽의 문제를 푸는 일과 무관할 수가 없다. 북쪽의 문제는 북쪽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고, 남쪽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북쪽 문제와 씨름하는 북쪽 사람들은 남쪽의 문제도 저희의 문제라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씨름해야 한다. 남쪽 사람들도 같은 자세로 모든 문제에 맞서야 한다. 한마디로 분단되어 모순 상극하는 두 체제가 서로 화합하여 한 조국을 키워나가는 한 체제로 복원시키려는 몸부림이 통일 운동이다. 

 

분단 체제라는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번 『창비』 봄호에 실린 고 선생과 백 선생의 대담 잘 읽었습니다. 최원식 교수의 글에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글에 나타난 동북아시아 구상은 참신하고 건설적인 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는 우리의 좁은 시야를 활짝 열어주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대환영입니다.

사실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아시아의 평화, 더 나아가서 세계 평화의 중요한 고리로 내가 보게 된 것은 80 ~ 82년 사이 공주교도소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이후로 이 문제를 가지고 꽤나 고민해왔기 때문에 나도 좀 할 말이 있습니다. 이번 『창비』가 제기한 것이 넓은 대화의 문을 여는 일이 되도록 좀 거들고 싶은 심정에서 내 소감을 펼쳐 보고 싶어졌습니다.

한반도는 분명히 동북아시아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그러나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와 서북 태평양 지역을 연결하는 고리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아야 하는 까닭이 일본이라는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 이제 군사 대국으로까지 발돋움하여 아시아를 위협하는 세력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일본은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G-7의 하나라고 봐야지, 동북아시아의 일부로 보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치유신에서 시작된 일본의 脫亞정책은 그대로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책은 일본으로서는 크게 성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일본을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단 분리해서 서북 태평양 지역에 속하는 세력으로 보고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늦봄

1993.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