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봄길님
오늘 아침 세수를 해보니, 물이 어제처럼 차지 않군요. 그놈의 꽃샘추위도 이제 물러갔나 보죠? 하루살이가 내 앞에 나타난 게 언젠데, 그 이후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니, 웬일인가 싶군요. 봄의 전령자로서 그놈은 특별히 파송되어 왔던 건지?
이제 세수라는 말이 우리 사이에서 일상 용어로서는 사라져 가는 것 같군요. 다 세면이라고 하니. 세면이라는 말은 일본말이거든요. 손을 씻는다는 것보다는 얼굴을 씻는다는 게 나아 보이는지도 모르지만, 세수라는 건 손을 씻는다는 게 아니라, 洗水, 물로 씻는다는 말이거든요. 담요를 모두 모포라고 하는데 이것도 일본말. 남새 혹은 채소를 야채라고 하는데, 이것도 일본말이죠. 이런 일본말이 군대에서 나와서 일반화된 것 같군요.
나의 목욕날은 화요일인데, 이번 주는 3월 1일이 월요일이어서 하루 건너뛰어 오늘이 나의 목욕일. 어쩌면 이제 곧 접견 소식이라도 오지 않나 기다려지는군요. 이만 당신의 늦봄.
백낙청 교수님
민족주의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은 이제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요. 세계는 몇 개 큰 블록으로 묶여 가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민족주의의 약화를 말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민족들이 모여서 힘을 합해야 다른 지역의 단합된 힘과 겨루어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일본의 민족주의나 여타 동아시아 나라들의 민족주의는 그 근본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水火相剋이죠. 동아시아 블록 형성에서 일본은 제외돼야 합니다. 그건 호박 쓰고 돼지 굴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미국의 막강한 힘도 경계해야 하지만, 그보다도 일본의 대륙 재침공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군사 침략은 가까운 세월 안에는 없을지 모르지만, 강화된 일본의 군사력이 일본 경제 침략을 미는 막강한 힘이 될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한반도만 차지하고 있었더라면, 아니 한반도와 만주만 차지하고 중국 대륙으로 무모한 침공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한반도와 만주를 계속 지배하고 있을 텐데.” 일본의 전략가들은 지금 그런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일본 방위성이 해마다 한반도 침공 도상 훈련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不問可知지요.
아시아 대륙 재침공 (경제적이건 군사적이건)에 아시아 나라들은 틈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 틈이 크게 벌어져 있는 데가 바로 여기, 일본의 손이 가장 손쉽게 닿을 수 있는 한반도 아닙니까? 여기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생기면, “우리 민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일본에게 주는 일이 되죠. 이걸 막아야죠. 그게 바로 통일 운동입니다.
6.25와 같은 전쟁이 안 생긴다 하더라도, 분단이 이대로 지속하여 북이 경제적으로 무너질 때, 남북한의 경제는 그대로 파삭 무너지고 말지요. 그때를 지금 일본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일본의 야욕을 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둘러야 합니다. 하루가 새롭습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빨리 남북 경제 교류가 이루어져서 남과 북의 경제를 같이 起死回生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한 경제 단위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동아시아 구상이 우리만이 해야 하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이 절박한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안정과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얼마나 화급한 일인지를 알리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협력을 얻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의 외교가 나갈 길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동아시아의 문제에 멎는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세계의 관심사로 부각하는 일 또한 한국 외교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일이지요.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 (중국, 몽고, 러시아) 가운데, 우리의 이 절박한 문제를 저희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생각할 나라는 중국뿐입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1993.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