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도]
2024년 12월 3일,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국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점령하려했던 내란 세력은 총칼을 앞세운 그대로였지만 그 앞을 막아선 국민들은 성숙했다. 맨 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서고, 최애를 향하던 응원봉을 들고, 핫팩을 나누며 국회를 지켜냈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가득 품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박종철이 그랬다. 이한열이 그랬고 1987년 수많은 국민들이 그러했다. 특별한 누군가여서 열사가 된 것이 아니다. 그저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민주주의를 지키고 싶었던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다정다감한 막내아들, 조금 까부는 동생, 친구와 고민을 나누는 ‘박종철’이라는 인물을 그가 쓴 편지를 통해 풀어본다.
[종철이의 편지]
1983년 여름, 부산 집으로 편지가 도착했다.
"제가 전화 받는 것이 좀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버릇없이 무례한 막내를 용서하십시요."
- 1983년 7월 31일 어머니께 쓴 편지 中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종철은 서울에서 재수 생활을 하며 대입이 끝나기 전까지 고향에 내려가지 않기로 어머니와 약속했었다. 하지만 막내가 눈에 밟히던 어머니는 전화통화를 하며 ‘방학이니(아마도 학원방학기간) 잠시 집에 다녀가라’하셨던 모양이다.
이에 종철은 약속을 지켜야지 왜 자꾸 내려오라 독촉하냐며 어머니께 불퉁거렸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편지를 쓴 것이다.
박종철은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하는 곧은 사람이면서, 여느 자식들처럼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곧 또 후회하는 아들이었다.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일상을 가족과 공유하며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편지를 통해 박종철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재수생활을 시작하며 집으로 보낸 첫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매달 저에게 보내는 돈은 엄마 장부에 적어두십시요. 그러면 내가 다음에 돈 벌이면 100배로 갚아드리겠읍니다
… 내년에는 꼭 행운의 여신이 우리집을 향해서 미소를 짓기를 빌겠읍니다."
-1983년 3월 15일 가족에게 보낸 편지 中
나중에 돈벌어 100배로 갚아준다는 막내를 생각하며 대견한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을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루어지지 않은 바람이 되었지만...
누나와 각별한 사이인 것을 알 수 있는 편지가 많았다. 누나에게 직접 쓴 편지들도 있고, 부모님께 쓴 편지의 말미에 누나에게 전하는 말을 덧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학원 수업은 영.수는 그날 그날 한 부분은 복습을 해서 소화해나가고, 암기과목은 수업시간에 졸지 말고 귀담아 들어만 두고…학력고사는 교과서 많이 읽은 사람이 장땡입니다.”
-1983년 3월 23일 편지 中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1983년 6월 10일 편지 中
“자, 우리 ‘화이팅’을 외치자.”
-1983년 6월 26일 편지 中
“체력장 원서 접수하는 기일을 알아 달라는 거다. 100m 뛰는 거도 2/3 뛰고나면 숨이 차는 데 1000m를 우예 뛰겠노. 내 목을 빼가도 1000m는 못 뛴다. -아우님”
-1983년 7월 16일 편지 中
대학에 들어가기 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가족과 일상을 나누던 박종철은 1984년 서울대학교 입학 후 바빠진 듯 하다. 그의 편지는 새내기였던 1984년을 건너뛰어 1985년으로 이어진다.
대학 2년차에 접어든 그의 편지에서 시대변화에 대한 열망과 스스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집안에는 별일 없었겠지요. … 저는 항상 열심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읍니다. 자기 생활에 만족하면서 성실하게 또 보람있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삶이 아닌가 싶읍니다.”
-1985년 4월 30일 부모님께 쓴 편지 中
“석규야, 땀에 젖은 군복에 싸여 있는 너의 모습과 엄청난 군대병력을 보니까 순간 우리가 너무 초라하고 약하게 느껴지더라 … 우리에게는 그보다도 더욱더 엄청나고 무서운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대이자 동시에 인로 역사발전의 주체인 가난한 민중들이 있지 않느냐… 석규야. 우리 용기를 잃지 말고 각자의 위치 속에서 그날을 향해서 뛰어 가자.”
-1986년 7월 24일 친구 석규에게 쓴 편지 中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 특히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진지하게 이 땅이 현실과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된다. 전태일 평전은 꼭 읽어봐라.”
-1986년 6월 9일 누나에게 쓴 편지 中
“석규야. 어쩐지 너무 허전하고 맥이 빠진다. 내일 모레면 바야흐로 3학년이 된다. 그동안, 지난 2년 동안 무엇으로 내 생활을 채워왔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또 남아있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더욱 어깨가 무겁다."
-1985년 11월 27일 친구 석규에게 쓴 편지 中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던 다정한 막내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사랑하는 이들을 격려하곤 했다. 대학생이 되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떠 시대의 변화를 꿈꿨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그 가운데 찾아오는 고민의 순간들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용기를 보였다.
1987년 1월 14일 대공분실에서 생을 마감한 22세 박종철은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고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가 고문당하면서까지, 죽음으로서 지키고 싶었던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이들의 일상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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