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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편지들]모시메리와 꽃무늬 에너자이저

    아침 출근길... 한참의 고민 끝에 챙겨 입은 도톰한 쟈켓 안의 반소매 셔츠는 마치 계절의 간이역 같네요. 날이 점점 더 추워지면 지나온 여름이 그리워지겠죠. 현대판 자린고비 스타일 “식구들이 오면 틀어줄게요!”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취업이다, 학원이다 식구들은 모두 집을 비우고 한 낮의 열기에 “덥다..”를 연발하는 사무실에 울려 퍼지는 단호한 한마디! 눈치 없는 공과금 때문에 에어컨 리모컨마저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게 만들어버린 우리의 란샘의 호통입니다. 에어컨이 뿜어내는 찬 공기를 헛되이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선풍기 바람 한 번 쐬고, 에어컨 한 번 힐끗. 현대판 자린고비는 모시메리 돌풍의 예고였고 우리는 그만.. 단 돈 만원! 무료배송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클릭 한 번의 공동구매는 너른의 유니폼을 탄생시켰고 어찌나 편하고 시원한지... 시골 아지매 같은 스타일에도 좋아라하며 한 바탕 패션쇼를 벌였지요. 새는 비 덕택에 꽃무늬 에너자이저 비 새던 용산 막달레나의 집 추억을 질투했더니만 글쎄... 허우대 멀쩡한 너른에도 비가 새네요. 장마가 남긴 얼룩한 흔적과 곰팡이 놈이 영 거슬리더니, 앗싸~ 화재 예방을 위해 벽지를 교체해야 한다네요. “젊다”로 통하는 식구들과는 달리 유독 우리 집 건물만이 연륜을 뽐내고 있었기에, 식구들은 벽지라도 밝은 색을 외쳤고 방방마다 환한 연두색 벽지로 도배를 했지요. 식구들의 만족스러운 환호 끝 외마디 “엇!” 누수와 곰팡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쪽 벽에 포인트를 준 1층 사무실이 이렇게 오묘한 분위기를 낼 줄이야... 종이벽지 하나도 나름의 분위기로 소화시키는 너른 식구들의 감각은 놀라워요. 붉은 색을 좋아하는 윤은 오늘도 포인트 벽지 앞자리를 고수하여 외치네요. “에너자이저~” 사소함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작은 것으로도 행복을 누릴 줄 아는 너른 식구들의 묘한 매력은 은근하고 뭉근하게 마음을 움직입니다. 요란스럽지 않은 일상 속 변화들이 주는 감동이 힘이 되어 짧고 강했던 여름을 유쾌한 웃음으로 보내고 이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려합니다. 함께 하는 순간을 다채롭게 만드는 이 계절이 있어 더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점점 진하게 물들어가는 이 가을에 너른 쉼터에서 드리는 소박한 편지였습니다. ^^ 이 글은 2007년 10월에 작성되어 홈페이지에 수록된 지난편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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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편지들]불어라 사랑의 바람아

    “쑥떡쑥떡 대표떡이요! 독립의 열망으로 만들어진 맛있는 큰언니표 쑥떡입니다!” “우와, 여기 좋은 물건 많네! 나 이거 살래, 저것도 찜!” 7월 18일 막달레나공동체 22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꾸르실료 교육관 강당 앞켠에는 신명나는 장터가 열렸습니다. 막달레나공동체의 직원들과 용산의 여성들, 그리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자발적으로(혹은 갈취당해서?) 내놓은 물건들로 벼룩시장이 만들어졌거든요. ‘오시는 분들이 이걸 좋아할까? 너무 시장판 같으면 어떻게 하지?’ 행사를 준비하면서 들었던 걱정이 한 순간에 사라질 정도로 호응이 좋았답니다. 이태리에서 왔다는 작은 십자가, 직접 만든 수공예 원목 소품, 조각보로 만들어진 밥상보, 이옥정 대표님이 손수 준비하신 쑥떡 등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물품들이 무조건 오백원에서 오천원까지! 어느새 좌판이 동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기가 많았던 는 스티커가 붙어있어선지, 맛을 본 분들이 너도나도 사는 바람에 가장 빠른 진행상황을 보였지요. 그리고 드디어 막달레나공동체의 사람 사는 맛처럼 구수하고 시끌한 분위기에서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인연, 행복한 동행 막달레나공동체 22주년 행사의 주제는이었습니다. 22주년 동안 막달레나공동체가 이어져올 수 있던 것은 그 모든 인연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레나공동체가 앞으로 갈 길을 위한 든든한 동반자, 함께 하는 인연들을 뵙고 희망을 향한 디딤돌이 되어주심에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앞으로는 막달레나의집에서 정기적으로 후원미사도 열릴 것이기 때문에, 그 첫 발걸음으로 조촐하고 소박하지만 열심히 준비한 기념행사가 진행되었지요. 서울 지역의 인연들뿐만 아니라, 그리고 부산, 마산, 진주, 대전 등등... 전국 각지에서(!) 오랜만에 공동체를 찾아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차비도 못드리는데 말이예요. 불어라, 사랑의 바람아! 그리고 드디어 열두분의 신부님들이 집전하시는 미사를 시작으로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막달레나공동체 가족들의 면면이 담긴 사진 영상물을 보면서 몇몇 분들은 눈물을 쏟기도 하셨지요. 또 2부에는 국민사회자 최광기씨의 사회로 작은 나눔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식구들과 직원들로 이루어진 작은 공연에는 여지없이 앵콜 요청이 들어왔고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안, 사람들 손에는 하얀 부채가 놓였습니다. 이 부채는 어디서도 볼 수 있는 ‘막달레나표’ 부채예요. 공동체의 간사로 오신 조진선 소피아 수녀님과 식구들, 직원들이 짬짬히 시간을 내어 그린 수제 그림이 담겨있는 부채였거든요. 네, 이 더운 여름 동안 열심히 바람을 내어 부채를 부치면서 막달레나공동체를 생각해주시길 기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어라, 사랑의 바람아!” 외치면서 그렇게 열심히 그림을 그렸던 것이었습니다. 부채를 받고 기뻐하시며 정말 예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 덕에 신이 났답니다. 뜨거운 경매 열기와 저녁식사 서빙 색다르게 준비해본 코너, 경매 시간! 신부님들이 내어주신 개인 소장 물품들이 경매에 부쳐졌는데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경매문화가 그렇게 익숙한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들이 출혈경쟁을 불사하며 입찰을 해주셨습니다. 사회를 보신 최광기씨는 물품을 낙찰한 사람이 나중에 보니 가난한 신학생인 걸 알고 안타까워서 미안해하기도 하셨다는 후문도 있었어요.^^;; 경매가 진행되면서, 신부님들이 명찰을 달고 저녁식사 서빙을 시작하셨습니다. ‘돌쇠’, ‘옥동자’, ‘뽀식이’, ‘삼식이’ 등등의 명찰에, 아리따운 앞치마를 두르신 아름다운(!) 모습에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답니다. 그리고 막달레나의집 축일 행사 때마다 인기 품목이었던 국수를 비롯해서 맛있는 수육과 김치, 인절미, 수박으로 이어진 저녁식사에, 다들 배부르다며 훈훈한 웃음을 남기고 가시면서 22주년 기념행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막달레나공동체 후원미사에서 다시 만나요~ 22주년 기념행사에서 많은 분들의 환한 웃음을 보았습니다. 어찌 그리 다들 아름다운 눈빛을 갖고 계시던지요. 오신 분들의 사진을 행사장의 화면으로 함께 보면서, 막달레나공동체에게 힘이 되어주시는 여러 분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눈빛들 이제부터는 더욱 자주 마주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7월을 시작으로 매달 공동체의 후원미사가 열리거든요. 막달레나공동체와 함께 해 오신 여러분들, 함께 기도하며 평화를 기원하고, 영성을 나누며 희망을 생각하는 자리에서 일상에 지친 마음을 잠시 쉬었다 가시길, 그리하여 막달레나공동체가 나아가는 걸음걸음에 놓인 수많은 발자국이 되어주시길 기원합니다. 22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07년 8월에 작성되어 홈페이지에 수록 된 지난 편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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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편지들] 고개 떨군 내게 고개를 들게 해 준 막달레나의집

    부유하거나 따뜻하지 못한 가정교육과 환경에 이른 사회생활을 성매매업소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성매매 일을 하면서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던 저는 성매매업소를 그만두고 나와 일반인으로 생활하려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몸만 업소를 떠났을 뿐, 그 남자들은 저에게 지금까지 성매매의 과거가 있단 이유로 수년 동안 낙인을 찍어 주저앉혔습니다. 만나주지 않으면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네 과거를 폭로하겠다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요구한대로 만나 내 몸을 던져주어야 하는 지옥 같은 생활을 견디다 못해 죽음까지도 생각했습니다. 매일 밤을 악몽에 시달리다 어느 날 종교관이 뚜렷하지 않았던 저는 문득 신부님께 잘못을 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가락동성당에 전화를 걸어 신부님께 상담요청을 한 후 만나 뵈어 울음을 반복하며 겁에 질린 채 저의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신부님께선 묵묵히 들어 주시더니 막달레나공동체 연락처를 건네주셨습니다. 사실 몇 년 전 저는 막달레나의집을 먼발치서 알았지만, 참 어리석게 일반적인 복지시설이나 종교단체라고 생각했고 종교적인 믿음으로까지 더한 손가락질을 받진 않을까 두려움에 떨던 저를 신부님의 배려와 현명하심이 막달레나의집으로 제 마음을 온전히 이끌어 주셨고 쉼터 선생님과의 첫 상담은 서러움의 눈물로 시작되었지만, 편안히 마치고 소중한 인연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시급한 문제는 법률지원을 받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는 그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입소 후 얼마간은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속에서 위축되어 있고 정말 잘 될 수 있을까 불안 해 하던 제게 큰언니(대표님)는 제가 해야 할 일을 만들어 주시더군요. 아니, 선뜻 하지 못 했던 일들을 찾아 여러 가지 선택과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는 제가 마음을 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셨어요. 그동안 자신 없어 배우길 미뤄오기만 했던 컴퓨터 기본활용에 관심을 보이자 마침, 막달레나 가족여행 프로그램이 있어 제비뽑기를 하였는데, 저를 포함해 가족 3명과 마침 큰언니와 한 조가 되었습니다. 우리 조에 여행계획안을 책임감을 가지고 문서로 만들어 제출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됐지만 선생님들에게 도와달라고 하니 참 친절히 알려주셨고, 서투른 솜씨로 문서 작성 과정에 일곱 번에 걸쳐 검토해 주시며 매번 “잘했다.” 하시며 잘못 된 부분을 짚어 주시고는 “더 잘 할 수 있을 꺼 야.” 라고 격려해 주신 덕분에 일주일이 걸렸지만 여행계획서를 완성하였습니다. 선생님들과 큰언니가 검토하시더니 저보다도 더 뿌듯해 하시며 “너무 잘했어.” 라는 칭찬의 말이 제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날 닮은 인형을 만들어 나를 표현해 보는 인형극 프로그램도 해보고, 천연비누를 만들어 가톨릭 여성연합회 바자회에도 선생님들과 가족들과 함께 참여해 우리 선생님들이 이런 일들을 주말까지 반납하시며 하는 이유를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토록 마음의 치유를 생활에서 자연스레 발견할 수 있도록 큰 언니는 친언니보다 더한 깊은 관심을 꾸준히 쏟아 주고 계십니다. 뭐든 막힐 때 마다 선생님들을 붙잡고 늘어져 보려고도 하지만 성급하게도 너무 느긋하게도 아닌 여유롭고 충실한 선생님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도- 이렇게도- 시도 해 보고 싶은 의욕이 생기니 어느 샌가 막달레나 밥상 끝에 설거지당번 뽑기 “안 내믄 술래! 가위 바위 보!” 가족들의 함성과 웃음의 순간을 즐기게 되었고, 그늘졌던 제 얼굴은 우리 막달레나집의 밝고 당당한 즐거움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지난달엔 막달레나 가족을 위한 용인 모현성당에서의 막달레나의집 홍보활동과 후원모금미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해야 할 일 이라고 판단하고 모금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미사 당일 아침부터 또다시 그들의 협박전화에 일들로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큰 기대 없이 갔지만, 성당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사람들과 이곳에서 함께 일 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누군가 늘 제가 느낄 수 있도록 듣고 보고 참을 수 있는 기회와 선택을 끊임없이 주신다는 것이... 이런 마음이 무지 반갑고 편안했습니다. 제가 어디 소속이든 간에 온 마음을 다해 저의 마음의 평화를 빌어 주시는 많은 분들이 저의 마음을 녹여주시니 한 가지 임무를 맡아도 진실 되게 하고 싶어졌고 복지시설이라고만 판단했던 막달레나의집은 이토록 저의 마음에 평화가 뿌리 깊게 내리고 픈 마음의 고향이 되어 갑니다. 저 역시 다양한 색깔과 방식대로 모두가 희망을 찾아 키워나가는 우리 막달레나집의 가족들처럼 따뜻한 사랑을 품어 소박한 평화를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집에 자꾸 자꾸 놀러 오세요. * 이 글은 2013년 5월에 작성된 홈페이지 지난 편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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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한(?) 이태원 사랑방

    이태원 사랑방의 시작 용산에서 20년 넘게 터를 잡고 살았던 막달레나 공동체에게 이태원은 늘 궁금한 이웃이었다. 그리고 2006년 9월, 막달레나공동체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이태원을 방문하며 클럽 종사자들과 얼굴을 익히는 것으로 첫 발걸음을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남짓 이태원을 누비며 이태원의 종사자들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쉴 공간도, 편히 수다를 떨 곳도, 아웃리치 물품을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았기에, 작은 방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였다. 그렇게 막달레나 공동체는 2008년 한국여성재단의 도움을 받아 이태원 클럽밀집지역 근처에 ‘사랑방’이라 불리는 드랍인 센터(Drop-in Center)를 열었다.   이태원 클럽밀집지역 막달레나 공동체, 동네사람 되다 처음 작은 공간을 마련한 날, 이사떡을 가지고 클럽들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이웃들에게 인사를 했다 “진짜 이사 왔어?” “한 동네사람 된 거야?” “앞으로 징그럽게 자주 보겠네!” 동네사람. 그저 말 뿐 이었는데도 벌써 진짜 동네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태원 사랑방에 오는 이웃들은 매우 다양했다.  클럽에서 일하는 한국인 종사자와 몽골, 말레이시아, 중국 등 아시아의 다양한 국가에서 온 이주민 종사자들, 트랜스 클럽에서 일하는 종사자,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다양한 이웃들 만큼이나 이들이 이태원 사랑방에 오는 이유도 다양합니다. 혼자 밥을 먹기 싫어 함께 소박한 점심을 먹으러 오기도 하고, 믹스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러 오기도 했으며 언제 한 번 들르라는 말에 밤새 일을 마치고 술 냄새를 풍기며 사랑방 문을 두드리는 이도 있었다. 을 프린트 해달라고 오기도 하고, 인터넷 쇼핑을 하러 오기도 했다.  또 클럽에서 일하는 한 여성의 아이는 일주일에 한번씩 사랑방에서 실무자와 함께 한글 공부와 숫자 공부를 했다. 어쩌다 사이가 안 좋은 이웃들이 사랑방에서 만나기도 하는 날에는 그 옆에 와 있던 다른 이웃이 “왜 싸우냐? 우리 같이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지”라며 화해시키기도 했다. 십 수년 동안 못 만났던 가족과 상봉을 이곳에서 하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사랑방은 누가 실무자이고 누가 손님인지 구분하는 것에 의미가 없어졌다.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아웃리치 물품을 보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련한 이 작은 공간은 어느덧 우리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막달레나공동체 이태원에서 '동네사람'으로 불리다. & 클럽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막달레나 공동체는 ‘종사자들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이태원에서 지낸 이들도 많았기에 이들의 기록은 이태원 역사의 일부이기도 했다. 한숨 섞인 말로 “내가 자서전을 쓰면 열권도 더 나온다니까”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종사자들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을 프로젝트로 구체화했다. 이렇게 해서 2009년, 종사자들의 역사 쓰기 프로젝트, 가 시작되었다. 종사자들이 작가가 되어 사진, 글, 그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과 생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내려 갔다. 그리고 는 2010년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막달레나 공동체가 이태원에서 동네사람으로 함께 살면서 쌓인 추억들, 이태원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소중한 이야기들을 만화로 엮어내게 되었다.   이태원의 수상한 사랑방 2010년 11월 19일, 3년 간 이태원 이웃들과 함께 했던 사랑방이 문을 닫았다. 사랑방은 잠깐이긴 했지만 좋은 이웃이고, 든든한 지원자였다고 기억되면 좋겠다. 이태원에서 사랑방은 사라졌지만 종사자들은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태원의 수상한 사랑방 참고 2010, 막달레나 공동체, 이태원의 수상한 사랑방 (미출판간행물) 2008, 막달레나 공동체, 동네사람 (미출판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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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 존중, 상생의 ‘둥근 밥상’

    밥과 밥상을 나누는 우리는 ‘식구’ “밥은 먹었어?” “밥 잘 챙겨요!” “우리 언제 밥 같이 먹어요.” 우리 인사말에서 뺄 수 없는 단어, ‘밥’. 비록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짧지 않습니다. ‘함께 살며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을 우리는 ‘식구(食口)’라 하지요. ‘식구’는 ‘한 조직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함께 먹는 것’의 중요성은 ‘밥’ 문화권뿐 아니라 ‘빵’ 문화권에서도 드러납니다. ‘동반자’, ‘동료’라는 뜻의 영어 ‘Companion’은 ‘빵(Pan)을 함께(Com) 먹는 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요. 우리식으로는 ‘한솥밥을 먹는 사이’, 즉 ‘식구’인 셈이죠. 막달레나의 집에서는 그곳에 머물거나 머물렀던 이들 모두를 ‘식구’라 부릅니다. 조직과 활동이 체계화되고 확산되면서 ‘막달레나공동체’가 된 이후에도 ‘식구’의 의미는 여전합니다. 1987년부터 막달레나공동체와 함께해온 ‘둥근 밥상’에 막달레나 식구들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86년 막달레나의집의 일상 삶을 바꾸는 따뜻한 힘, 밥 1980년대 초, 어느 여름날. 우연히 마주한 사건을 계기로 이옥정 대표는 성매매 여성들의 상담자가 됐습니다. 상담은 온갖 부탁으로 이어졌습니다. 막달레나의 집 공동설립자인 문애현 수녀님, 가톨릭사회복지회의 도움으로 담당 신부가 된 서유석 신부님 등 함께하는 분들이 있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옥정 대표도, 문애현 수녀님도, 서유석 신부님도 성매매 여성들에게 선교나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이미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며 사는 이들인데, 그저 건강하기를 바라며 함께 밥을 먹었을 뿐“이라며 둥근 밥상을 가리켰습니다. 1987년부터 함께 세월을 보낸 밥상은 반들반들해졌습니다. ‘식구’가 된 이들 모두 자립, 즉 ‘탈 성매매’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이옥정 대표는 ”그들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든, 함께 따뜻한 밥을 먹던 기억은 더 나은 삶을 위한 힘이 돼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둥근밥상 “얻어먹는 게 아니라 나눠 먹는 것”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밥만큼은 최선을 다해 정성껏 대접했어요.” 이옥정 대표는 “성매매 업주조차도 성매매 여성들을 더럽다고 여겼어요.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주는 이들임에도, 자신의 가족들과 겸상하는 것을 꺼렸지요. 그 여성들은 밥상에서도 소외됐던 것”이라며 “그렇기에, 더욱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줬어요”라고 회상했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1987년에 마련한 둥근 밥상을 “우리 집 보물 1호”라고 합니다. 둥근 밥상 앞에 둘러앉으면 위도 아래도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이죠. “새해에는 떡국을 끓여줬어요. 손수 끓인 떡국을 먹으며 다들 좋아했어요. 그 사람들이 얻어먹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집집마다 쟁반을 들고 가서 나눴어요. 그렇게 하니, 받는 사람도 얻어먹는 게 아니라 맛있는 것을 나눠 먹는 기분이라고 했어요. 동네잔치처럼요. 떡국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보내오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러면 기쁘게 받았고, 편한 사이가 됐어요.”   2009년 설 명절 참고 2018년 10월 30일, 가톨릭프레스, “희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거예요”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자 이옥정 전 대표, 문애현 수녀 인터뷰 2018년 1월 18일, 한겨레, [아침햇발] 안녕, 막달레나 막달레나 공동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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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달레나 야전병원장, 문애현 수녀

    폐허가 된 타국 땅에 온 23세 여성 “환자는 매일 2,000명씩 몰려드는데, 약도 병상도 늘 부족했어요. 그 환자들을 다 봐줄 수 없었던 게 아직도 마음 아파요.” 진 메리 말로니(Jean Marie Maloney), 세례명은 요안나. 한국에서 70년 세월을 보낸 이 미국인 수녀님의 한국 이름은 문애현입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4명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 땅을 밟은 그는 피난민만 100만 명이던 도시, 부산의 메리놀 병원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23세의 여성이 말도 전혀 모르는 타국에서, 전쟁의 폐허와 아픈 사람들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문애현 수녀님은 3년 후인 1956년 충북 증평의 병원으로 가서 일하다가 1963년, 공장지대인 인천 강화도로 갑니다. 그곳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를 통해 노동 문제에 눈을 뜨고, 서울 가리봉동으로 가서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합니다. 이후 잠시 미국 본원 수련소에 갔다가 1980년 부산으로 돌아온 문 수녀님은, 1985년 아시아수녀장상연합회 현장 체험 프로그램에서 ‘막달레나의 집’을 만납니다.   문애현수녀님의 막달레나공동체 설립 12주년 기념 편지 삶과 죽음을 함께 돌봐준 친구 막달레나의 집에 오신 이유에 대해, 문애현 수녀님은 “그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옥정 대표은 “성매매 여성들이 수녀님께 음식을 종종 권했는데, 수녀님은 미안한 마음에 사양하곤 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내가 몸 파는 여자라 더러워서 안 먹는구나’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이옥정 대표는 수녀님께, “주는 건 받으시고, 다른 걸로 보답해주셔라”고 조언해드렸어요. 수녀님은 기쁘게 받는 것, 함께 먹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람들과 가까워졌습니다. 두 사람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요셉의원, 도티병원, 성가복지병원 등 천주교 재단 병원에 데려가 무료 진료를 받게 해줍니다. 이옥정 대표는 “죽는 사람도 참 많던 시절”이라고 회상했습니다. “병으로 죽기도 하고, 자살도 흔했어요. 사람들이 시체를 꺼리니, 저와 수녀님이 장례를 치렀어요. 우리는 벽제화장터 단골이 되고, 장례전문가가 됐어요.”    요셉의원의 문애현간호사 이옥정 대표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다 성매매 여성들은 의료보험증만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호적도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신분증도 없었지요. 신분증이 없으니 보험 가입도, 선거도, 취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성매매를 그만둘 수 없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브로커를 통해 신분증을 만들려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옥정 대표와 문애현 수녀님은 호적을 찾아주고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수녀님은 “주민등록증을 받은 사람들이 생애 첫 투표를 할 때, 기뻐하던 모습이 선하다”라며 회상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임대아파트 분양 받는 법도 알려줬습니다. 성매매에서 벗어나려면, 신분증 외에도 주거공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양에 성공해 보금자리를 얻은 이들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두 사람은 식탁 선물로, 담당 신부님은 축성식으로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축복했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가장 힘들었을 때는, 수녀님이 떠났을 때였다”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이 대표와 문 수녀님을 '환상의 콤비'라고 불렀습니다.   참고 2018년 10월 30일, 가톨릭프레스, “희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거예요”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자 이옥정 전 대표, 문애현 수녀 인터뷰 2015년 7월 21일, 한국일보, 성매매 여성들 괴로움ㆍ외로움 30년간 보듬어 준 큰언니들 2023년 8월 25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국에서의 70년은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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