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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한(?) 이태원 사랑방

    이태원 사랑방의 시작 용산에서 20년 넘게 터를 잡고 살았던 막달레나 공동체에게 이태원은 늘 궁금한 이웃이었다. 그리고 2006년 9월, 막달레나공동체는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이태원을 방문하며 클럽 종사자들과 얼굴을 익히는 것으로 첫 발걸음을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남짓 이태원을 누비며 이태원의 종사자들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쉴 공간도, 편히 수다를 떨 곳도, 아웃리치 물품을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았기에, 작은 방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였다. 그렇게 막달레나 공동체는 2008년 한국여성재단의 도움을 받아 이태원 클럽밀집지역 근처에 ‘사랑방’이라 불리는 드랍인 센터(Drop-in Center)를 열었다.   이태원 클럽밀집지역 막달레나 공동체, 동네사람 되다 처음 작은 공간을 마련한 날, 이사떡을 가지고 클럽들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이웃들에게 인사를 했다 “진짜 이사 왔어?” “한 동네사람 된 거야?” “앞으로 징그럽게 자주 보겠네!” 동네사람. 그저 말 뿐 이었는데도 벌써 진짜 동네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태원 사랑방에 오는 이웃들은 매우 다양했다.  클럽에서 일하는 한국인 종사자와 몽골, 말레이시아, 중국 등 아시아의 다양한 국가에서 온 이주민 종사자들, 트랜스 클럽에서 일하는 종사자,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다양한 이웃들 만큼이나 이들이 이태원 사랑방에 오는 이유도 다양합니다. 혼자 밥을 먹기 싫어 함께 소박한 점심을 먹으러 오기도 하고, 믹스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러 오기도 했으며 언제 한 번 들르라는 말에 밤새 일을 마치고 술 냄새를 풍기며 사랑방 문을 두드리는 이도 있었다. 을 프린트 해달라고 오기도 하고, 인터넷 쇼핑을 하러 오기도 했다.  또 클럽에서 일하는 한 여성의 아이는 일주일에 한번씩 사랑방에서 실무자와 함께 한글 공부와 숫자 공부를 했다. 어쩌다 사이가 안 좋은 이웃들이 사랑방에서 만나기도 하는 날에는 그 옆에 와 있던 다른 이웃이 “왜 싸우냐? 우리 같이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지”라며 화해시키기도 했다. 십 수년 동안 못 만났던 가족과 상봉을 이곳에서 하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사랑방은 누가 실무자이고 누가 손님인지 구분하는 것에 의미가 없어졌다. 편하게 이야기 나누고 아웃리치 물품을 보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련한 이 작은 공간은 어느덧 우리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막달레나공동체 이태원에서 '동네사람'으로 불리다. & 클럽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막달레나 공동체는 ‘종사자들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이태원에서 지낸 이들도 많았기에 이들의 기록은 이태원 역사의 일부이기도 했다. 한숨 섞인 말로 “내가 자서전을 쓰면 열권도 더 나온다니까”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종사자들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고민을 프로젝트로 구체화했다. 이렇게 해서 2009년, 종사자들의 역사 쓰기 프로젝트, 가 시작되었다. 종사자들이 작가가 되어 사진, 글, 그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과 생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내려 갔다. 그리고 는 2010년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막달레나 공동체가 이태원에서 동네사람으로 함께 살면서 쌓인 추억들, 이태원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소중한 이야기들을 만화로 엮어내게 되었다.   이태원의 수상한 사랑방 2010년 11월 19일, 3년 간 이태원 이웃들과 함께 했던 사랑방이 문을 닫았다. 사랑방은 잠깐이긴 했지만 좋은 이웃이고, 든든한 지원자였다고 기억되면 좋겠다. 이태원에서 사랑방은 사라졌지만 종사자들은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태원의 수상한 사랑방 참고 2010, 막달레나 공동체, 이태원의 수상한 사랑방 (미출판간행물) 2008, 막달레나 공동체, 동네사람 (미출판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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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눔, 존중, 상생의 ‘둥근 밥상’

    밥과 밥상을 나누는 우리는 ‘식구’ “밥은 먹었어?” “밥 잘 챙겨요!” “우리 언제 밥 같이 먹어요.” 우리 인사말에서 뺄 수 없는 단어, ‘밥’. 비록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짧지 않습니다. ‘함께 살며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을 우리는 ‘식구(食口)’라 하지요. ‘식구’는 ‘한 조직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함께 먹는 것’의 중요성은 ‘밥’ 문화권뿐 아니라 ‘빵’ 문화권에서도 드러납니다. ‘동반자’, ‘동료’라는 뜻의 영어 ‘Companion’은 ‘빵(Pan)을 함께(Com) 먹는 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요. 우리식으로는 ‘한솥밥을 먹는 사이’, 즉 ‘식구’인 셈이죠. 막달레나의 집에서는 그곳에 머물거나 머물렀던 이들 모두를 ‘식구’라 부릅니다. 조직과 활동이 체계화되고 확산되면서 ‘막달레나공동체’가 된 이후에도 ‘식구’의 의미는 여전합니다. 1987년부터 막달레나공동체와 함께해온 ‘둥근 밥상’에 막달레나 식구들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86년 막달레나의집의 일상 삶을 바꾸는 따뜻한 힘, 밥 1980년대 초, 어느 여름날. 우연히 마주한 사건을 계기로 이옥정 대표는 성매매 여성들의 상담자가 됐습니다. 상담은 온갖 부탁으로 이어졌습니다. 막달레나의 집 공동설립자인 문애현 수녀님, 가톨릭사회복지회의 도움으로 담당 신부가 된 서유석 신부님 등 함께하는 분들이 있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옥정 대표도, 문애현 수녀님도, 서유석 신부님도 성매매 여성들에게 선교나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이미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며 사는 이들인데, 그저 건강하기를 바라며 함께 밥을 먹었을 뿐“이라며 둥근 밥상을 가리켰습니다. 1987년부터 함께 세월을 보낸 밥상은 반들반들해졌습니다. ‘식구’가 된 이들 모두 자립, 즉 ‘탈 성매매’에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이옥정 대표는 ”그들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든, 함께 따뜻한 밥을 먹던 기억은 더 나은 삶을 위한 힘이 돼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둥근밥상 “얻어먹는 게 아니라 나눠 먹는 것”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밥만큼은 최선을 다해 정성껏 대접했어요.” 이옥정 대표는 “성매매 업주조차도 성매매 여성들을 더럽다고 여겼어요. 자신들의 생계를 이어주는 이들임에도, 자신의 가족들과 겸상하는 것을 꺼렸지요. 그 여성들은 밥상에서도 소외됐던 것”이라며 “그렇기에, 더욱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줬어요”라고 회상했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1987년에 마련한 둥근 밥상을 “우리 집 보물 1호”라고 합니다. 둥근 밥상 앞에 둘러앉으면 위도 아래도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해지는 것이죠. “새해에는 떡국을 끓여줬어요. 손수 끓인 떡국을 먹으며 다들 좋아했어요. 그 사람들이 얻어먹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집집마다 쟁반을 들고 가서 나눴어요. 그렇게 하니, 받는 사람도 얻어먹는 게 아니라 맛있는 것을 나눠 먹는 기분이라고 했어요. 동네잔치처럼요. 떡국에 대한 답례로 선물을 보내오는 이들도 있었어요. 그러면 기쁘게 받았고, 편한 사이가 됐어요.”   2009년 설 명절 참고 2018년 10월 30일, 가톨릭프레스, “희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거예요”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자 이옥정 전 대표, 문애현 수녀 인터뷰 2018년 1월 18일, 한겨레, [아침햇발] 안녕, 막달레나 막달레나 공동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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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달레나 야전병원장, 문애현 수녀

    폐허가 된 타국 땅에 온 23세 여성 “환자는 매일 2,000명씩 몰려드는데, 약도 병상도 늘 부족했어요. 그 환자들을 다 봐줄 수 없었던 게 아직도 마음 아파요.” 진 메리 말로니(Jean Marie Maloney), 세례명은 요안나. 한국에서 70년 세월을 보낸 이 미국인 수녀님의 한국 이름은 문애현입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4명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 땅을 밟은 그는 피난민만 100만 명이던 도시, 부산의 메리놀 병원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23세의 여성이 말도 전혀 모르는 타국에서, 전쟁의 폐허와 아픈 사람들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문애현 수녀님은 3년 후인 1956년 충북 증평의 병원으로 가서 일하다가 1963년, 공장지대인 인천 강화도로 갑니다. 그곳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를 통해 노동 문제에 눈을 뜨고, 서울 가리봉동으로 가서 노동자들과 동고동락합니다. 이후 잠시 미국 본원 수련소에 갔다가 1980년 부산으로 돌아온 문 수녀님은, 1985년 아시아수녀장상연합회 현장 체험 프로그램에서 ‘막달레나의 집’을 만납니다.   문애현수녀님의 막달레나공동체 설립 12주년 기념 편지 삶과 죽음을 함께 돌봐준 친구 막달레나의 집에 오신 이유에 대해, 문애현 수녀님은 “그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옥정 대표은 “성매매 여성들이 수녀님께 음식을 종종 권했는데, 수녀님은 미안한 마음에 사양하곤 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내가 몸 파는 여자라 더러워서 안 먹는구나’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이옥정 대표는 수녀님께, “주는 건 받으시고, 다른 걸로 보답해주셔라”고 조언해드렸어요. 수녀님은 기쁘게 받는 것, 함께 먹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람들과 가까워졌습니다. 두 사람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요셉의원, 도티병원, 성가복지병원 등 천주교 재단 병원에 데려가 무료 진료를 받게 해줍니다. 이옥정 대표는 “죽는 사람도 참 많던 시절”이라고 회상했습니다. “병으로 죽기도 하고, 자살도 흔했어요. 사람들이 시체를 꺼리니, 저와 수녀님이 장례를 치렀어요. 우리는 벽제화장터 단골이 되고, 장례전문가가 됐어요.”    요셉의원의 문애현간호사 이옥정 대표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다 성매매 여성들은 의료보험증만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호적도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신분증도 없었지요. 신분증이 없으니 보험 가입도, 선거도, 취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성매매를 그만둘 수 없게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브로커를 통해 신분증을 만들려다가 사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옥정 대표와 문애현 수녀님은 호적을 찾아주고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수녀님은 “주민등록증을 받은 사람들이 생애 첫 투표를 할 때, 기뻐하던 모습이 선하다”라며 회상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임대아파트 분양 받는 법도 알려줬습니다. 성매매에서 벗어나려면, 신분증 외에도 주거공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양에 성공해 보금자리를 얻은 이들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두 사람은 식탁 선물로, 담당 신부님은 축성식으로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축복했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가장 힘들었을 때는, 수녀님이 떠났을 때였다”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이 대표와 문 수녀님을 '환상의 콤비'라고 불렀습니다.   참고 2018년 10월 30일, 가톨릭프레스, “희생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거예요” 막달레나 공동체 설립자 이옥정 전 대표, 문애현 수녀 인터뷰 2015년 7월 21일, 한국일보, 성매매 여성들 괴로움ㆍ외로움 30년간 보듬어 준 큰언니들 2023년 8월 25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국에서의 70년은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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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개발 전 용산의 기록,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

    우리에겐 ‘기록’, 그들에겐 ‘치유’ “이제 뭔가를 보면 이걸 찍으면 예쁘겠네, 저렇게 찍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아! 나도 잘하는 게 있구나! 싶어 기뻤어요.” 막달레나의 집 ‘언니들’과 카메라의 첫 만남은 2006년 이뤄집니다. 그해 6월 자활 프로그램으로 사진 교육을, 11월 22일(수)부터 24일(금)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블루’에서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여 작가’ 20명의 작품 약 30점이 걸립니다. 제목은 .  김정하 사진작가는 그해 9월부터 막달레나의 집에 입소해 ‘예비작가들’과 생활하며 함께 사진전을 준비합니다. 쉼터 ‘언니들’은 처음에 사진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암실에 갇혀있던 그들의 마음은, 카메라를 통해 빛으로 나아갑니다. 엄상미 활동가는 “사진을 통해 참여자들은 물론 실무자, 강사 모두 치유를 받은 듯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매매 여성들이 렌즈에 담은 유혹의 거리 고통과 희망을 찍다' 기사 스크랩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여요” 2008년 10월 29일(수)부터 11월 1일(토)까지 서울 종로 ‘포스갤러리’에서 사진전 이 열렸습니다. 막달레나의 집의 두 번째 사진전입니다. 이옥정 대표는 “우리 집 식구들은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찍히는 걸 싫어했다”라고 했다. 성매매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던 것이죠.  그러던 그들이 사진과 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활동가들은 사진 교육 정례화를 결정하고, 2006년에는 빌려 썼던 디지털 카메라를 몇 대 삽니다. 2008년 사진 교육은 4월부터 2주에 한 번씩 실시됩니다. 사진전 참가자는 입소자 7명 포함 총 13명. 김정하 사진작가는 막달레나의 집 ‘언니들’과 생활하며 함께 사진전을 준비합니다. ‘언니들’은 ‘사진 왕초보’였지만 열의는 상당했습니다. “용산에서 10년을 살았는데, 보이지 않던 가게들이 보여요. 참 신기해요.” “전에는 보지 않고 살던 하늘을 봐요. 하늘 색깔이 참 예뻐요.” “예전에는 밤에만 나다녔는데, 이제 낮 풍경을 보게 됐어요.” 빛보다 어둠이 익숙했던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 빛을 만나고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 도서 용산에 살던, 용산의 기록자들 “2009년 1월 용산참사(남일당 건물화재사건) 이후, 저희는 불안에 떨었어요. 그러다가 용산 성매매 집결지 또한 삶의 터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억의 지도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죠.” 그리스 신화 최초 여성 ‘판도라’의 이름을 딴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는 2009년 1월 시작됐습니다. 용산 성매매 집결지라는 공간과 그곳에서의 시간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었습니다. 12명의 ‘언니들’이 생전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잡았습니다. 이옥정 대표와 이희영 용감한여성연구소장이 그들을 독려합니다. 프로젝트는 용산 성매매 집결지가 철거되고, 그곳 여성들이 모두 떠난 후인 2012년 4월까지 계속됩니다. 이옥정 대표는 “프로젝트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라고 회상합니다. 2009년 10월 미국 웨슬리대를 시작으로 뉴욕대와 컬럼비아대, 피츠버그대, 홍콩대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출간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2016년 8월 26일(금),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는 사진으로 공간을 기록하는 모임인데, 실상 가장 큰 원동력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 해외전시회 참고 2006년 10월 31일, 한겨레, “너희는 울어라! 나는 사진 찍을 테니까” 2008년 10월 30일, 경향신문, ‘언니들’의 窓 “빛이 싫었는데 이젠 그 빛이 꿈꾸게 해요” 2016년 8월 31일, kpbc, 성매매 여성들이 렌즈에 담은 유혹의 거리, 고통과 희망을 찍다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 추진한 (사)막달레나공동체 이옥정 대표 2016, 막달레나공동체, 용감한여성연구소,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 용산 성매매집결지 여성들의 사진과 이야기』, 봄날의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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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달레나공동체의 시작

    “같이 살아도 되나요?”로 시작된 연대 "용산에서 성매매로 생계를 잇던 여성에게, 어린 딸이 있었어요.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는 어머니가 일하는 밤에 길거리에서 놀다 잠들곤 했는데, 어느 날 낯선 남자가 그 아이의 옷을 벗기려는 걸 목격하고 신고했습니다.“ 1980년대 초, 보험설계사였던 이옥정 대표는 이 일로 용산 성매매 여성들과 그 아이들을 지원할 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성매매 여성들의 상담사가 된 이옥정 대표는 1984년 10월, 용산역 인근에 단칸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1985년, 천주교 신자였던 이옥정 대표는 아몰(AMOR,아시아 오세아니아 수녀연합회의 약칭)의 현장교육을 통해 일생일대의 인연을 얻습니다. 진 메리 말로니(Jean Marie Maloney), 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문애현(요안나) 수녀님을 만난 것입니다. 문 수녀님은 천주교 신자였던 이옥정 대표를 통해 용산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의 삶을 알게 됐습니다. 어느 날, 문애현 수녀님은 이옥정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살아도 되나요?”라고 물었고, 이옥정 대표가 흔쾌히 승낙하면서 두 사람의 연대가 시작됐습니다. 1985년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에 낡은 용산역 앞 허름한 건물, 경남식당 2층 골방에서 막달레나공동체가 싹을 틔웠습니다. 이옥정 대표와 문애현 수녀님, 서유석 신부님이 뜻을 모으고 서울대교구 가톨릭사회복지회의 지원을 받아 막달레나공동체의 모체인 막달레나의 집을 설립한 것입니다.    1994년 성매매집결지 내 상담소 개소 전화위복이 된 재개발, 새 보금자리로 이사 용산역 앞 골방에서 용산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시 보호 및 자활 지원을 펼치던 막달레나의 집은, 사회복지시설법에 따라 청파동으로 한 번 이사를 합니다. 그런데 2004년, 설립 20년을 앞둔 막달레나의 집에 위기가 닥칩니다. 용산 뉴타운 개발로 기존 집의 임대차 재계약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세 번째 이사를 해야 했으나, 문제는 비용이었습니다. 기존 집의 전세보증금으로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고난은 흔쾌한 연대와 상쾌한 새터를 선사합니다. , 등 언론을 통해 사정이 알려지면서 중학생들부터 가사 및 간병 노동자, 농민, 공무원, 교수 등 각계각층에서 성금이 들어온 것이지요. 서울 가톨릭여성연합회, 한국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봄빛여성재단, 태평양재단, 아름다운재단, 국민체육진흥공단 등에서 약 1억 4,000만 원, 서울 가톨릭사회복지회가 약 2억 원을 후원했습니다. 문화관광부도 쉼터 여성 자활 프로젝트 '행복한 보따리'를 지원했고요. 덕분에 낡은 건물 단칸방을 벗어나, 넓고 환한 새 보금자리로 이사합니다. 마당도 있고 욕실도 2개 있는 2층집으로요. 게다가 천주교 신자인 임대인이 전세보증금을 6,000만 원이나 깎아주고, 집도 새단장해 빌려줍니다. 2005년, 이사한 새 보금자리에서 8명의 여성이 검정고시 준비, 기술 배우기 등 새 삶을 준비합니다.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2008년 막달레나의집 송년모임 ‘집’에서 ‘공동체’로 거듭나다 갈 곳 없는 이들의 쉼터로 시작된 막달레나의 집은, 2005년 ‘막달레나공동체’로 거듭납니다. 쉼터인 막달레나의 집을 비롯해 현장상담센터 이나, 용감한여성연구소, 너른쉼터, 햇살고운진료소, 그룹홈, 이태원사랑방, 동고리, ‘나는 봄’ 등 현장에서 많은 흔적을 남깁니다. 2018년, 막달레나공동체는 고민 끝에 33년 동안 이어온 막달레나의 집 쉼터 사업을 접습니다. 중고령여성을 포함한 정부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들을 위한 사업과 위험에 노출된 여성청소년들을 위한 보건사업 및 성매매예방사업(서울시립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 봄)에 주력합니다. 그럼, 쉼터는 없어졌냐고요? 아닙니다. ‘막달레나의 집’에서 해왔던 탈 성매매 여성을 위한 독립지원사업은 그룹홈에서 이어가고 있답니다. 또한, 성매매예방사업의 일환으로 위기의 여성청소년을 위한 일시쉼터도 운영 중입니다.  ‘위로’와 ‘안식’으로 어제의 상처를 보듬던 쉼터가 ‘연대’와 ‘교육’으로 더 나은 오늘을 짓고, ‘자활’과 ‘예방’으로 더 밝은 내일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막달레나의 집' 새 터 햇빛 '쨍쨍' 기사 스크랩 참고 2015년 7월 22일, cpbc,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쉼터 막달레나공동체 30주년 2004년 10월 21일, 프레시안, "'막달레나의 집' 이사를 도와주세요") 2005년 3월 23일, cpbc, '막달레나의 집' 새 터 햇빛 '쨍쨍' 성 매매 피해여성 위해 십시일반 모금, 개원 20년만에 마련 막달레나 공동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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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달레나의 집 큰아버지, 김수환 추기경님

    “내게는 모두가 어린 아이” 1988년 정월대보름날, 막달레나의 집(이하 ‘쉼터’) 문을 두드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허름한 차림새의 그 손님은 김수환 추기경님이었어요. 이옥정 대표도 놀랐습니다. "설날에는 사제들과 신자들의 방문으로 바쁘실 테니, 여성의 명절인 정월대보름에 와주셨으면 좋겠다"라고 성탄카드에 짤막하게 초대의 글을 써서 보냈으나,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큰아버지처럼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셨어요. 인자한 표정으로 쉼터 식구들의 세배를 받은 추기경님은, 세뱃돈으로 5,000원 신권을 한 장씩 주셨습니다. 어떤 분이 “어른이나 아이나 금액이 똑같나요?”라고 여쭤보니, 추기경님은 “내게는 모두가 어린 아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다음 해 정월대보름날에도 쉼터를 찾으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아저씨’, ‘신부님’, ‘추기경님’ 등 여러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이들과 함께 윷놀이를 하시며 즐거워하셨어요. 김수환추기경님 첫 번째 방문 “추기경님도 오셨는데, 나도 가야죠” 1990년 3월, 성매매 여성 한 명이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고를 들으신 김수환 추기경님은 손수 쓰신 메시지와 조화를 영안실로 보내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직접 조문을 오셨습니다. 당시 성매매 여성은 죽으면 화장되거나 시립 공원묘지 등에 묘비도 없이 묻혔습니다. 찾는 가족도 거의 없었고 업주들은 외출을 불허했으며, 동료들도 초상집은 불길하다며 찾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추기경님이 장례식장에 오신 이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추기경님도 오셨는데, 당연히 가야죠”라며 모여든 것입니다. 장지까지 이동한 버스만 2대. 업주도 외출을 막을 수 없었어요. 1991년, 자활 훈련 후 가게를 연 여성에게는 추기경님께서 100만 원을 지원하셨습니다. 2002년에는 경기도 강화에 중년여성들의 자활을 위한 집이 열리자, 추기경님은 전날 불면증에 시달린 몸으로 축하하러 오셨어요. 이옥정 대표는 “김수환 추기경님은 사회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는 이들에게 자신도 소중한,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주신 분”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김수환추기경님이 보낸 편지 모음 손수 쓴 카드와 밥상 선물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절묘하게도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시기 하루 전, 나는 그분과의 추억이 담긴 물품들을 정리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함께 찍은 사진들 속에 추기경님의 손글씨 카드들이 있었습니다. 손목이 불편하시던 때에도 추기경님은 손글씨로 메시지를 전해오셨습니다. “영옥, 은영, 은주, 은경, 막달레나 막내 소영, 숙현… 한 분 한 분 주님의 사랑 속에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길 거듭 기도드립니다.” 이옥정 대표는 막달레나 식구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불러주신 그 글을 다시 읽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시던 추기경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이옥정 대표는 추기경님의 선물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밥상’을 꼽았습니다. 어느 날, 이옥정 대표는 추기경님 비서실에서 밥상을 받아가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개로 장식된 근사한 밥상을 받아든 이옥정 대표는, 문득 그 선물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오시면, 집에 있는 상을 모두 꺼내 밥상을 차렸어요. 상들 중 다리 하나가 없어서 벽돌로 받쳐 쓰던 게 있었어요. 세상에, 그걸 보시고 기억하셨던 거죠.” 김수환추기경님과 서유석신부님 “추기경님은 다단계 우두머리” 2018년 11월 19일, 40세의 한 남자가 ‘라파엘’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쉼터를 처음 방문한 1988년 당시 10세 초등학생이었던 그는 2008년, 30세의 나이로 6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습니다. 라파엘의 어머님에게 이옥정 대표는 추기경님의 묵주를 주며 “세상을 떠나더라도 이걸 꼭 쥐고 가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추기경님과 함께 그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렸지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6개월밖에 못 산다던 30세 청년이 40세 생일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추기경님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라파엘 가족 외에도 많습니다. 쉼터 여성들은 추기경과의 만남, 차별 없이 나눠주던 세뱃돈과 묵주 때문에 성당에 가게 됐다고들 합니다. 이옥정 대표는 50여 명의 대녀를 둔 대모가 됐고, ‘성당 이모’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쉼터 식구들은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함께 김 추기경님을 추억하며 말합니다. “추기경님은 다단계 우두머리 같으셔.” 추기경님으로 인해 이옥정 대표가 대모가 되고, 그 대녀들이 또 대모가 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옥정 대표는 “추기경님의 다단계 사업이 매년 번창하기를 기도한다”라며 웃었습니다.   "추기경님은 다단계 우두머리" 기사 스크랩 참고 2019년 2월 20일, cpbc, [김수환 추기경 사연 공모전 수상작] 추기경님은 다단계 우두머리 이옥정 콘세크라타(막달레나 공동체 전 대표 2009년 3월 22일, 가톨릭신문,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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