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기술 및 행정통합 조정위 구성 회담 '합의(대구, 2003년 8월 20일)

2003년 8월 20일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현장에서 WTF 총재인 김 부위원장과 ITF 총재인 장 위원은 양측 태권도 기구 통합의 전 단계로 태권도 기술 및 행정통합 조정위원회 구성을 위한 1차 회담을 10월 말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키로 합의했다. “남북 양측 올림픽위원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화합과 통일에 기여할 남북 체육교류와 아테네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해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원키로 했다”며 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운용 IOC 부위원장은 태권도 기술 및 행정통합 조정위원회 2차 회담을 위해 1차 회담 이후 적절한 시점에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 이들은 또 남북태권도 시범단 교환과 2014년 한국의 동계올림픽 유치 추진시 북한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장 위원은 태권도 기구 통합에 대해 “민족화해 무드에 태권도가 앞장서야 한다”며 “단체 통합의 전 단계로 조정위원회를 갖게 됐다” 고 말했다. 50 김 부위원장과 장 위원은 두 연맹 간에 ITF 선수들의 아테네올림픽을 위한 실무교류위원회를 설치하는 데도 합의했다.51 성명서 발표 이후 장웅 위원은 “태권도 기술 및 행정통합 조정위 구성은, 통합의 전단계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52 김운용 위원은 “WTF와 북한이 속한 ITF는 기술적으로 차이가 난다”며 “북한이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하려면 기술적인 제반 문제를 조정위원회를 통해 협의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53 이처럼 2000년대 초반 남북태권도 교류는 김운용이 제안한 WTF방식의 ‘와일드 카드’ 주장과 북한 장웅 위원이 제안한 무도의 특성을 살리는 ‘룰 절충’ 주장 속에서 두 연맹의 특성을 살리는 방안으로 진전되어 통합조정위 구성 합의로 이어졌다, 당시 김운용은 북한태권도를 국제경기연맹총연합(GAISF)에 참가시켜 남 북의 스포츠와 무도 특성을 함께 살려 나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었을 경우 남북태권도의통합 논의는 보다 활성화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양측의 통합조정위원회 구성 합의는 몇 가지 돌발변수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2003년 7월 4일(한국시간) 김운용 위원이 그동안의 불출마 주장을 뒤엎고 IOC 부위원장 선거에 나서 당선되자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일었다.54 “‘IOC는 특정지역에 두가지 선물을 한꺼번에 주지 않는다’는 전통을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55는 것이었다. 9월 19일 최중화 계열의 ITF가 2004년 10월 남한에서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최홍희의 후임으로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이 ITF 총재로 추대되자 최중화는 남한을 선택하고 북한과 대립한 것이다. 김운용 위원은 2004년 1월 9일 국회의원과 세계태권도연맹 총재직, 국기원 원장직을 사퇴했고 27일 구속 수감됐다.56 남북이 주도하는 두 연맹의 통합 논의도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50 “U대회- 김운용.장웅위원, 아테네 단일팀 추진 지원(종합),” 연합뉴스, 2003.8.20.
51 “아테네올림픽 남북단일팀 합의,” 경향신문, 2003.8.20.
52 “장웅 北 IOC위원,” 연합뉴스, 2003.8.20.
53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북한 여대생 응원단 150명 도착,” 오마이뉴스, 2003.8.20.
54 “김운용 IOC 위원, 부위원장 당선,” 2003.7.4
55 “金의원 부위원장 선거 왜 나갔나,” 경향신문, 2003.7.6. 56 “김운용씨 횡령 등 혐의 구속 수감,” 경향신문, 2004.1.28.; 김운용 위원의 '추락'은 1998년 말 마르크 호들러(스위스) IOC위원이 "미국 솔트레이크시티가 2001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일부 위원들의 비리가 만연돼 있다"는 폭탄 발언으로 시작됐다. “<김운용 IOC위원과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 연합뉴스, 2003.7.7.
출처: 홍성보(2021). 서울평양 태권도 문화융합. 교보문고, 3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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