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이 편지를 얼마나 애타게 목말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걸 나야 잘 알죠. 그런 만큼 나도 이 편지지를 이렇게 메워 나가는 오늘을 몹시도 기다렸다오. 우선 건강 회복이 순조로울 정도가 아니라 쾌속이었다는 것부터 알려 드리는 것이 나도 기쁘군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오.
지난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아침이면 어김없이 뒤를 보게 되었으니까, 관장도 하지 않고. 기다리던 첫아기라도 낳은 듯 속이 후련했어요. 오늘부터는 다른 재소자들과 같은 관식으로 식사를 바꿀 정도요. 사실 저번에는 뭣도 모르고 몸을 내대고, 그런 의미에서는 퍽이나 비장한 심정으로 단식을 시작했었지만, 이번에는 내 몸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면서, 그런 의미에선 담담하면서도 실은 더 비장한 심정으로 단식기도를 시작했던 거요. 사실 이번 30일 예정은 나의 체력의 극한점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거죠.
그런데 저번에는 갈등을 느끼면서 중단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기꺼운 마음으로 중단할 수 있었소. 어머님이 앞을 가로막아 서셨을 때는 좀 아찔했지만, 나보다 열배 백배 더 뜨겁게, 순수하게 기도하실 양반들이 비켜서라고 하시는데, 내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소. 난 터럭 끝만큼도 거짓 없이 세상에는 나보다 낫고 훌륭하고 더 확고하고 뜨거운 믿음을 가진 분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새벽 나의 샛별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보다 나으리라”(빌 2:3)고 일러주시는 것이 아니겠소? 정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소. 이제부터 그 소리에 이끌리면서 살아야 할 것 같군요. 또 오늘 아침에 펼쳐 본 성서에서 나의 심장을 떨게 하는 말씀(약 1:2, 6), 아!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
내가 이 편지 쓰기를 그렇게 기다리는 데는 또 하나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 당신도 알게요. 그건 그동안 나의 살과 뼈와 핏줄에서 솟아나는 시들을 빨리 정리하고, 다시 어떤 시들이 솟아나는가 보고 싶은 심정, 알 수 있겠소? 나의 어설픈 시들을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것, 당신도 잘 알 거요. 그냥 나의 피가 묻어 나오는 나의 마음 밭에 새싹들을 키우는 일이 나의 교도소 생활의 하루하루를 보상하고도 남기 때문이오. 충분히 깎고 다듬지 못한다는 건 지금의 나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소. 데쌍이면 데쌍으로 좋은 거니까. 그동안 나의 마음 밭에서 익은 것들을 설익은 대로 거두어 내기 전에,
그동안 읽은 책 중에 너무너무 충격이 컸던 책, 그러니까 여러분께 꼭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책 하나가 있소. 그것이 李五德 씨의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책이오. 일생을 버스도 안 들어가는 시골에서 교육가로 살면서, 이 나라 새싹들의 교육에 몸 바쳐 살아가면서, 이 겨레의 황폐해 가는 마음들을 향해 목쉰 소리로 외치는 그 절규, 그 육성, 국민으로서 누구나 머리 숙여 들어야 할 소리라고 생각되는군요. 어제까지는 그의 아동문학 평론집 『시 정신과 유희 정신』을 읽었는데 그 평론집도 너무나 많은 문제를 정직하게, 준엄하게 파헤쳐 제시해 놓았군요. 이런 사람이 있는 한, 이 나라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되어 기쁘고 또 기뻤소.
그러면 9월에 거두어 내는 나의, 아니 우리의 첫 열매, 제목은 「함 선생님」.
하느님의 가슴을 두드리다 말고, 저는
제 가슴을 열어 보여 드렸습니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좁은 가슴에는
오래된 생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만사가 깜깜하기만 하던
십 대의 소년 시절
뒷산 숲속을 밤새 헤매다가
나도 모르는 새 가시에
찢긴 자국이지요.
문득
지난날의 절망 같은 것의 메아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 자국이 다시 찢기며
빨간 피가 스며 나오더군요.
후 ----
무거운 한숨 소리와 함께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핏물 들어 살 속으로 스며들면서
새로운 아픔이 가는 떨림으로
온몸에 아래위로 번져 나갔습니다.
하느님의 응답은 그뿐이었습니다.
다음은 산문시로서 제목은 「자문자답」.
1년 반이나 소득세 한 푼 못 내면서 공으로 하루 세끼나 얻어먹으려니 조금은 마음에 걸리는군. 그거야 그럴 테지, 이를테면 남의 혈세로 살아가는 기생충인 셈이니까. 기생충이라니 너무 심했군.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완전히 남의 덕으로 살아가는 그런 심정과 별다를 것 없다고나 할까. 그래서 요새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입에서 겉돌고 있는 걸 알 것도 같군.
사랑하는 새끼를 제대로 아침도 못 먹여 학교로 보내 놓고는, 점심을 굶은 채 저녁에 올 아들놈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들려줄 게 없어 한숨짓고 있을 주부들, ‘일용할 양식’ 은 그런 주부들에게나 실감 나는 기도가 된다 그 말이겠군. 그렇게 되는 거겠지. 밖에 있을 때는, 그나마 알량한 가장으로서 ‘일용할 양식’을 벌어들이느라고 열심히 뛰기라도 했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 그래서 요새 그 기도는 숫제 그런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드릴 수밖에 없는 심정이라네. 그래도 밖에서 ‘일용할 양식’을 물어 들이느라고 정신없이 뛸 때가 좋았던 건 부정 안 하겠지. 자유란 어차피 책임을 수반하는 거니까. 이를 데가 있나?
하지만 난 지금 자유를 잃은 건 아닐세. 이렇게 자유를 만끽해 본 일은 60 평생에 일찍이 없었던 것 같아. 모를 소리군. 아마 잘 모를 거야. 사람이란 남을 완전히 알 수 있도록 선 자리를 바꾸어 본다는 일은 낙타가 나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테니까.
그래도 피차 선 자리를 진짜 바꾸어 보면 세상은 희한한 일 천지지. 아니 그래, 나가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자넨 날 무얼로 아나? 내가 정말 말하려는 건 나의 자유 따윈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걸세. 나의 자유는 지금 껍질째, 그림자째 몽땅 날 따라 이 방에 들어와 나에게 충분한 자유를 제공해 주고 있거든.
나의 자유가 나에게 해줄 일이란 그러면 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문제는 자유의 자유라 이 말이지. 자네 머리가 좀 돈 게 아닌가? 아니지… 아니지… 아니지…….
셋째 제목은 ‘기도의 대양’
커다란 불덩어리 하나
얇은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도
하늘은 찢어지는 일 없이, 도리어
아침저녁으로 곱게 물든다는
놀라운 소문에 귀가 번쩍 뜨인
깊은 땅속의 눅눅한 물기들은
스물스물 한정도 없이 위로위로 기어오른다.
손톱 발톱 다 달으면서도
그 길고 긴 어두운 상승 중에
실명하지 않은 측은하도록 다행한 염원들은
가는 풀뿌리 나무뿌리들을 타고 오르다가
그리던 미지의 불빛을 만나
신록으로 돋아나기도 하고
아름다운 꽃잎으로 새록새록 피어나며
황홀한 향내를 날리건만
너무 뜻이 옹골져서
처음부터 방울져 오르던 수수억억천천만 염원들은
도중에 모두 장님이 되어
이 골짝 저 골짝,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솟아올라
걸려 넘어지며
돌에 채여 터지며 찢어지면서도
흩어지지 말자 서로 소리쳐 부르며
흐르고 또 흐른다.
끝도 없이 굽이굽이 돌고 또 돌면서
산등성이를 타고 쏟아져 내려오는 바람에 휩쓸리는 앞뒤 숲의 우렁찬 교향악에 넋을 잃고
헤엄치며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약동을
살 속에 느껴보는 것도 잠깐,
또다시
흩어지지 말자 서로 소리쳐 부르며
흐르고 또 흐른다.
끝도 없이 굽이굽이 돌고 또 돌면서
고요하던 산골에
잡혀 떨구는 총성 한 방, 그 소리에 귀가 멍멍하게 메아리쳐 오는
포탄 목탄 작렬하는 소리, 그 소리에 깔려 죽어가는
비명들에 놀란
목이 길어 슬픈 흰 노루의
허둥대며 어디론가 뛰어 달아나는 발굽 소리를 들으며
한꺼번에 낭떠러지를 거꾸로 떨어진다. 그러나
다시 박살 난 몸들을 섞어 정신을 가다듬고
흩어지지 말자 서로 소리쳐 부르면서
흐르고 또 흐른다.
끝도 없이 굽이굽이 돌고 또 돌면서
이젠 제법 깊어지고 넓어져
삐걱이는 배들을 역사처럼 띄우며
고해는 도도하다.
갈수록 더해가는 약 냄새, 똥오줌 냄새에 숨이 막혀와도
이젠 어디엔가 다다를 것도 같아
푸푸 뱉어내며
흩어지지 말자 서로 소리쳐 부르며
흐르고 또 흐른다.
끝도 없이 굽이굽이 돌고 또 돌면서
차츰 터지고 찢어진 몸이 짜릿하게 아려오며
갑자기 눈이 열리고
눈 속으로 넘실넘실 차오는 하늘,
그 하늘에서 이글거리는
보고 싶던 불덩어리를
쳐다보며 춤추는 푸르른 마음의 노래,
고요히 꿈틀거리는 힘으로
부풀어 오르는 기도의 대양
갈라지고 찢긴 땅을 향해 달려들며
주장할 뿐인 기도의 물결.
아무도 바다 위엔 금을 그을 수 없다.
갈매기야
남이고 북이고 동이고 서이고
바람 타고 미끄러지듯
마음껏 날아라.
우리 작은 물방울들의 노래를 네 날개에 싣고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나는 이제 지칠 대로 지치고 말았소. 지금 저녁밥을 입에 떠 넣고 이 편지를 끝내려고 문자 그대로 안간힘을 쓰고 있소. 그러나 「기도의 대양」처럼 목적지에 다다랐으니, 감사할 뿐이오. 지금 씹고 있는 콩밥이 이렇게 맛있을 수야. 식욕의 계절, 나는 지금 10대의 식욕으로 왕성 왕성.
소품 몇 편 더 쓰고 싶어도 지면도, 기력도 시간도 다한 것 같구려. ‘기도의 대양’은 정말 며칠 두고 손을 보아도 나중에 보면 결함이 자꾸 드러날 텐데, 이렇게 스켓치 정도의 것이지만, 일단 마음에서 정의해 버려야 한다는 것이 지금 나의 어쩔 수 없는 기분.
그동안 편지들이 다들 어김없이 들어왔다고 생각하오. 오늘 길로 지체없이 전해주시는 교무과 담당관에게는 무엇이라고 고마운 마음 금할 길이 없을 정도. 이 편지를 쓰는 도중에 성근이 엽서 두 장에 쓴 편지로 받았으니까요. 그렇게 계속 써 달라는 부탁이었을 따름.
당신의 9, 10, 11일 편지가 다 들어왔어요. 다시 읽어볼 기운이 없어 그대로 부치겠소.
16일 아침. 교무과 담당관의 호의로 아침에 다시 읽어보고 몇 군데 손 좀 보게 되어서 그 고마움 이루 다 말할 수 없군요. 이 편지에 담긴 시들이 그의 호의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마음을 써 주기를 바라오.
어제저녁에는 그야말로 곤죽이 되었었는데 저녁을 먹고 한참 누워서 쉬었더니, 금방 힘이 나서 새벽까지 『안네의 일기』를 읽었소. 오늘 아침에는 콩밥 한 그릇, 죽 반 그릇을 그야말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소. 밖에 나가서도 콩이 안 든 밥은 맛이 없어 못 먹을 것 같군요.
저번 단식 후에 요가가 한 경지 깊이 들어서더니 이번 단식 후에 비로소 숨 쉬는 것이 몸인지 마음인지 분간이 어려워지는 心身合一의 경지에 깊숙이 들어서는 것 같군요. 숨을 들이마시고 3~4초 내쉬고, 3~4초 숨을 딱 멈추는 순간 (그러면서도 결코 굳어지지 않고) 무아의 경지, 내 경지에서는 순수의 경지, 영원을 몸속에 느끼는 경지에 다다른다고 할까.
오늘 아침에는 ‘예술과 인식’ 의 문제에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것 같아 한없이 기쁘구만요. 성서의 관점, 요가의 체험에다가 『안네의 일기』에 티 없이 나타난 생명의 신비, 사랑의 눈뜸 같은 것을 조명해 보니까 새 세계가 트이는걸요. 감사할 뿐이오. 10월 접견 날이 기다려지는군요.
해위 선생님, 함 선생님을 비롯한 동지들에게 격려를 보내는 바이오. 아버님이 애타하시는 가훈 문제는 좀 더 뜸을 들이고 천천히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느끼오. 어머님 건강하시다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 이제 정말 붓을 놓아야겠소. 할렐루야 당신의 늦봄
늦봄 아지랑이에 노고지리 목청 풀리듯.
P.S. 동환에게 이오덕 씨 책들을 보내주시오. 건강 위해 기도한다고도 전해주고.
전주교도소에서 두 번째 단식을 중단하다
해위 윤보선과 함석헌 선생에게 격려의 말씀을 쓰다.
시 세편을 쓰다. 1. 함(석헌)선생님, 2. 자문자답 (산문시), 3. 기도의 대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