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우리 딸 영금이가 엄마가 되어 간다는 소식은 나에게 너무나 가슴 뭉클하는 소식이었어요.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그 감격을 「신비」라는 짤막한 시로 읊어 보았소. 요새 시에는 ‘아––’ 하는 감정 노출은 잘 쓰지 않는 것이 좋지만, 마지막 둘째 줄의 ‘아––’는 어떻게 뺄 수가 없다는 느낌이구려. 정성껏 써서 보내 주시오. (물론 영금에게서 소식이 온 다음이겠지만) 액자는 거기서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환한
엄마 웃음에
반짝 아침 이슬이 빛나며
터져 나온
애기 웃음, 어느새
엄마 웃음만큼 자라
또다시
반짝 아침 이슬이 빛나며
터져 나올
아––
새애기 웃음소리
내 건강은 소식 들어 알겠지만, 간에 아무 이상이 없다니까, 안심이오. 신장, 간장에 이상이 없다면 나머지는 소화 기관인데, 그것도 이제는 완전 조정이 되었으므로 앞으로 영양 섭취만 제대로 하면, 부기가 내리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되는군요. 어제 보안과장이 와서 우유를 사 먹을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고 하니, 우유 같은 완전 영양을 먹으면, 그만큼 회복이 빨라지겠지요. 어머니 너무 걱정 마시도록. 오히려 저번에 뵈니까, 어머님의 건강이 좀 못해지신 것 같아 마음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었소. 시월에 뵈었을 때는 생기가 도시더니.
창근이 외삼촌이 보내주신 침낭이 무엇으로 어떻게 만든 것인지, 기막히게 좋군. 금년 겨울 걱정은 다락에 얹어 놓았소. 팬티만 입고 잤더니 땀이 너무 나서 위에는 얇은 내복을 입고 자는데, 날마다 내복을 갈아입어야 하겠군요. 한겨울에는 낮에도 그 속에 다리를 넣고 있으면 발 시린 줄 모르고 지낼 것 같아서 이제 겨울 날 걱정은 집어 치웠소.
어제 과장님이 햇빛 잘 드는 방으로 원하면 옮겨 준다고 해서, 생각 중이오. 방이 좀 작아도 옮기는 것이 아마 좋겠지요. 요새는 맛있는 소고기 통조림까지 떨구지 않고 먹고 있어서, 이렇게 잘 먹다가 나가서는 어떻게 지내나 싶은 생각마저 들어요. 평생 이렇게 많이 먹어본 일도 없을 거구요.
캐나다 소식 오래 못 들었지만 다들 별고 없으시겠죠? 영금의 대학원 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요? 결혼하느라고 공부에 적잖이 지장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그렇게 자주 편지를 주던 선희에게서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까, 직장생활이 바쁜가 보죠? 천만다행할 일이구요. 동환의 건강은 어떤지? 전번 날 꿈에 문 신부가 몸이 아주 안 좋은 것을 보았는데,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본래 약골인 함 신부도 걱정이 도구요. 추워지면 신경통이 도질 김대중 선생도 굉장히 안쓰럽구요.
‘나의 주기도’는 날마다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나의 기도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되어 적어 보았소.
나의 주기도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하늘을 우리에게까지 낮추시어, 푸른 하늘을 숨 쉬게 해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
빕니다.
당신의 이름을 우리에게서 무섭게 빛내주시기를!
그래서, 모두들 당신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소리 높여 찬양을 올리게 되기를!
늑대가 양 새끼와 어울리고
표범이 염소와 함께 뒹구는
당신의 나라, 하루속히 이룩해 주시기를!
그래서 모두들 어깨 펴고 평화와 자유를 노래하며
서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당신의 나라의 진군을 가로막는 오만한 사람의 뜻 꺾으시고,
의와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시기를!
그래서, 아침도 못 먹고, 점심 걱정, 점심도 못 먹고 저녁 걱정하는 사람 없이,
나 어린 것들이 깡패, 소매치기로 전락하는 일 없게 해 주시기를!
남을 억누르고 괴롭히던 사람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저희를 억누르고 괴롭히던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눈물겨운 광경이 벌어지게 해 주시기를!
약속해 주신 당신의 나라를 믿을 수 없어,
당신을 시험하고 자기를 시험하는 엄청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기를!
악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셔서, 당신의 나라 역군 되게 해 주시기를!
평화와 자유의 나라, 하늘나라는 길이 당신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이룩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당신께만 있는 줄 알아
길이길이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주님이 이 기도를 인류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소. 예수님의 인격과 생애를 압축해 놓은 것 같고 우리 생의 뜻을 환히 밝혀 주는 것 같지 않소? 지난 1년 8개월 동안, 아니 그전부터 나의 마음에 검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생각, ‘하느님은 과연 계신가?’, ‘하느님이 정말 역사의 주이신가?’, ‘하느님은 정말 정의와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가?’ 이런 불신의 의혹을 주기도와 함께 이제 겨우 극복한 것 같은 느낌이오.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결정적인 깨우침을 받았구요. 하느님은 의심해도 내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정의’와 ‘사랑’은 어떻게 의심할 수가 없었소. 그런데 그 ‘정의’와 ‘사랑’이 내가 있기 전부터 있었고 내가 죽은 다음에도 있을 영원한 것, 나를 초월한 것, 시간적으로 나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나를 초월하는 것, 그러니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더군요. 그리고 그것은 인격적인 뜻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그 근원에는 인격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지 않겠소.
그 근원에 계시는 분을 하느님으로 믿는 거지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정의’와 ‘사랑’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룰 힘도 주셨다는 것이 바울의 신앙이었죠. 빌립보서 1장 6절을 보면 하느님이 몸소 그것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바울은 믿었던 거죠.
그리고 그것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나의 믿음이 된 것 같소. 그런데 그 ‘정의’니 ‘사랑’이니 하는 것이 윤리적인 개념이거나 도덕의 조항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꿈틀거리는 힘이라는 것을 믿게 된 것 같구려. ‘정의’란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을 보고서 못 보는 척할 수 없는 마음의 꿈틀거림이죠. 미디안으로 도망치기 전의 모세에게서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40년 동안 그의 가슴에서 꺼지지 않고 불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사랑’이란 억울한 일 당한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따뜻한 체온이라면 되지 않을는지? 나의 속에서 아우성치는 ‘정의’의 외침, 몸부림치는 ‘사랑’의 몸짓을 배신하면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닌 거죠. 이것이 구체적인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말의 내용이기도 하구요.
나는 최근에 미국 서부 인디언의 역사를 쓴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를 밤을 새워 가며 읽었소. 흑인들의 ‘뿌리(Roots)’를 읽은 충격의 계속이라고 할까요? 나는 정말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소. 실존적인 차원에서 말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원죄’를 실감할 수 있었소. 그 원죄 앞에서 종교가 어쩌면 그렇게 무력할 수 있을까요?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깊이 반성하게 되었소. 열심히 기도합시다.
요새 슈나이츠(Schneiz) 씨가 넣어 준 『이사야와 정치』를 읽기 시작했소. 만나면 고맙다고 전해 주시오.
은희가 ‘새가정’에 연재하는 것, 아주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소. 계속 좋은 글이 나올 것이라고 乞期待. 함혜련 씨에게 좋은 시집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전화라도 해주시오. 우리 나라 초 헤비급 시인이 되었다고 찬사를 보내 주구요. 다만 감탄할 따름이요.
아 참, 김재준 목사님께서 보내 주신 격려의 글월, 그대로 읽지는 못했어도 이심전심으로 알 수 있었소. 대신 감사의 글월을 올려 주시오.
강찬순 집사 생각하면 가슴 아프군요. 요새도 늘 기도하고 있소. 저번 날 새벽에 병상에 기도해 주러 들어가다가 깨는 꿈을 꾸었죠.
김관석, 박형규 목사에게 건투를 빈다고. 조남기 목사에게도. 양성우, 고은은 어찌 되어 가고 있는지? 모두 궁금한 것뿐이오. 목요 기도회, 금요 기도회, 한빛 교회, 갈릴리 교회에 문안해 주시오. 그분들의 기도가 소나기처럼 내 위에 쏟아지고 있다고.
주께 영광. 77년 크리스마스 곧 다가오는군요.
Joy, 사랑
호근, 은숙
「라 보엠(La Boheme)」 성공을 빈다. 에스더는 민족정신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하만의 죄악상에 초점을 두어라.
의근의 청춘사업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좋은 사람을 찾고 기다려라.
성근의 직장 생활, 인생 체험에 도움이 되기를 빈다.
딸 영금이 임신하여 첫 손자를 기다리다.
김재준 목사, 강찬순 집사(한빛교회),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양성우 시인, 고은 시인
미국 서부 인디언의 역사를 쓴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를 읽으며 충격을 받고 신앙인으로의 반성을 표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