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밖에 없는 딸…아빠 없는 결혼식…
“그래도 아빠는 마냥 기쁘기만 하다”
문익환, 박용길 부부의 네 자녀 중에 유독 문익환 목사의 눈매를 쏙 뺀 한 명이 있다. 문재린 목사의 황금동 교회 목회시절 ‘김천에서 얻은 구슬’ 둘째 영금(瑛金)이다. 현재 통일의 집 박물관 관장을 지내며 늦봄과 봄길의 뜻을 전하고 있다.
1977년, 수감 중인 늦봄은 하나밖에 없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신부의 할아버지인 문재린 목사에게 대신 손잡고 신부입장을 부탁하는 편지에서 아빠의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는 신부 입장에 동행해줄 것을 부탁했다(옥중편지 1977. 7. 8. 중에서)
“언제까지나 나를 ‘아빠’라고 불러다오”
영금에게
호근, 은숙, 의근, 성근이는 ‘아버님’ 이라고 편지하는데, 네 글은 ‘아빠’라고 시작되어서 내 나이 스물은 젊어진 것 같았다. 초등학교 다니는 네가 부르는 소리 같아서 말이다. 언제까지나 ‘아빠’ 라고 불러다오. 부쩍 성숙한 네 모습을 사진에서 보고 내가 정말 아버지 노릇을 못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라도 잘 먹고 잘 커서 행복한 소녀이기를 비는 아빠의 마음을 알 것 같으냐? (1977. 5. 14)
영금아
「꿈길」이라는 시에 ‘영금아, 성수야’라고 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아직 하느님 앞에서 서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비워 두었다. 결혼식을 올리면 물론 그 자리는 ‘성수야’로 채워지는 거 아니겠니? 다른 혼처들을 물리치고 성수와 결혼하기로 한 네 결단은 역시 내 딸다운, 아니 너다운 결단이다. 썩 잘한 결단이다. (1977. 6. 10)
딸의 결혼식이 있던 1977년, 문익환 목사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첫 번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부의 부모가 참석할 수 없는 결혼식이라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일까. 문익환 목사는 캐나다에서 열리는 결혼식이 잘 치러지도록 그곳의 친지들에게 세세한 부탁을 한다. 편지에서 안타까움과 분주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옥중에서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을 축복하며 시를 선물하고 사위를 위해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부디 부디 행복하여라”
성수, 영금에게
오늘이 7월 8일(금)이다. 이제 너희 결혼 날까지 스무하루가 남았구나. 내가 이렇게 부자유한 몸으로 있는데 무슨 경황에 결혼이냐고 조금도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울 까닭이 없다. 그동안 소식을 들어 알겠지만, 나의 60 평생에 지금처럼 흐뭇하고 보람찬 삶을 산 때는 일찍이 없었다. … 「사랑의 노래」에 아빠, 엄마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엄마가 정성껏 써서 네 폭짜리 병풍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겠다. 이제부터 서둘러도 선물은 추송(追送)이 될 가능성이 크겠지. 늦더라도 섭섭히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다오. 내가 7월 들어서 오늘에야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이니까…….
나의 하나밖에 없는 사위, 성수야
영금이를 많이 사랑해다오. 내가 너무 개성을 강하게 길러서 때로는 좀 거슬리는 일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품어 주기 바란다. 부디부디 행복하여라. 너희가 정말 행복해야 남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는 법이니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고. 행복이란 상대편이 행복한 것을 보면서 받는 인생의 ‘덤’ 이라는 것,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놀라게 되는 것, ‘wonder’도 명심해 두는 것이 좋을 게다. 아빠는 마냥 기쁘기만 하다. 너희 생각만 하면 쓰고 쓰고 또 쓰고 싶지만,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만……. 아빠 씀(1977. 7. 8.)
◇캐나다에 있는 친지와 지인을 모시고 치러진 딸 영금의 결혼식(1977.7)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문영금 관장이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추억하며 쓴 글은 「나의 아버지 문익환」 『장준하, 문익환 다시 읽기: 민주, 통일, 평화사상 탄생 100주년 기념』(2018), 「사랑의 빚, 그 위대한 유산」 『생활성서』(2021.3)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글: 박에바>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월간 문익환_5월 <문익환의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