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도와 바우의 꿈

봄길 가을 코스모스에게

 

봄길도 산모퉁이 하나만 돌면 나서게 될 듯하군요. 걱정스럽던 겨울 추위도 이제 완전히 기가 꺾였군요. 추위에 체온을 빼앗기면서 단식을 한다는 일이 걱정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단식도 별 지장 없이 끝났고 회복도 아주 순조로운 것, 얼마나 다행인지. 사실 단식은 먹지 않는 것이니까 어디서나 대동소이하지만, 이 안에서 여기서 제공되는 것만을 먹으면서 회복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는데, 사실 너무너무 순조롭군요. 박(형규) 목사 부인이 지난 주에 우유를 넣어 주어서 하루 둘씩 먹어 보았는데 문제없이 소화를 시킬 수 있어서 우유 먹는 것이 예정보다 열흘이나 앞당겨진 셈이오. 날달걀도 하루 두셋씩 밥에 비벼 먹어도 될 정도가 되었으니까 이제는 몸에 살만 붙어가면 단식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한 몸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박(형규) 목사 부인, (김)지하 어머님이 귤을 많이 넣어 주어서 귤도 넉넉히 먹으면서 잘 회복되어가고 있으니, 모든 걱정은 접어놓고 할 일들이나 열심히들 하시오.

저번 접견 후로는 편지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 들어와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오. 호근이 편지도 잘 읽었고. 그런 편지 자주자주 읽었으면 좋겠소. 아버님 편지도 여러 번 받았구요. 선희 편지는 설날에 쓴 것이 수일 전에야 들어왔군요. 문규 아빠 (매제 강달현)가 날 만나지 못하고 가서 섭섭했다는군요. 나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강(찬순) 집사 차도가 있다는 말 무엇보다도 반갑고. (백)기완 씨 저혈압에 당뇨라니 좀 충격이군요. 이제 이 형님에게서 건강 만회법을 배워야 하겠는데, 내가 여기 이러고 있으니 어떻게 하죠? 너무 술 마시지 말고 건강관리 잘하라고 일러주시오. 몸도 저를 믿고 있는 건데 그렇게 학대하면 비명을 지르는 법이니까요. 너무 늦기 전에 SOS가 왔다는 것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철저한 건강 재건에 유의하라고 이 형님의 말을 전해주시오. 지난 토요일에 15일에 쓴 당신의 편지를 받았는데, 1월 편지를 그때까지 못 받은 모양이지요. 여기서는 발송했다고 하니까 배달 도중에 없어진 거라고 보아야겠지요. 사실 검열에 걸릴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으니까요. 안(계희) 전도사 어머님 세상을 뜨셨는데, 위로도 못 해 드리고. 잘 말해 주시오. 김 장로님도 (정돈 장로님이시겠지요) 몸을 너무 건사 못하셨으니, 그럴 테지요. 아무쪼록 원주병원에 가서 진단, 치료를 받으시도록 옆에서 주선해 드렸으면 좋겠소.

그동안 당신의 바쁜 나날이 외로운 가운데서도 하늘의 위로와 기쁨으로 보충되어 간 것 같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사드릴 뿐이오. 시간을 내서 붓글씨를 필사적인 심정으로 쓰시오. 남 못하는 작품을 하나하나 만들어 간다는 것이 공허한 생을 얼마나 기쁨과 보람으로 넘치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오. 정말 저번에 눈 오는 것 보면서 지은 시조, 참 좋았소. 목련, 배꽃을 연상한 대목은 훌륭하였소. 예스럽지 않은 새 감각을 살리면서 시조를 연습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오.

3·1 독립 만세 60주년이 눈앞에 다가왔군요. 언젠가 고은 씨가 「독립 만세」라는 시를 발표한 것을 읽은 일이 있는데 어머님께 읽어 드리시오. 그의 「소식」이라는 시도 좋지요. 그날을 맞을 생각을 하니 지금부터 가슴이 떨리는군요. 여러분께 문안을 전해 주시오. 나를 위해서 염려, 기도해 주신 일, 고맙고 고맙다고.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건투를 빌 뿐이오.

 

당신의 늦봄

 

아버님

 

이 편지가 집에 들어갔을 때는 아버님이 귀국하실 때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 기도하시는 시간에 언제나 같이 기도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우선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고 독서 명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 버리는 수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같이 기도하는 때마다 저는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아버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하느님, 제 아버지의 기도는 순수합니다. 그 기도는 하느님, 거절하실 수 없습니다. 저도 제 아버지의 기도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아멘’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무슨 기도를 드리실지 너무도 환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는 것도 이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아버님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한다는 것, 아버님이 제 안에서, 제가 아버님 안에서 기도한다는 경험에서, 제가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어, 제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제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을 깨닫게 된 셈입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이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서대문서 유치장에 들어가던 첫날 저녁에 잠자리 기도를 드리려고 엎드렸더니 제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지금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하느님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가 여기서 아버님의 기도 소리를 쟁쟁히 듣듯이. 그것을 바울은 탄식 소리 섞인 성령의 기도라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것을 여러 가지 형식으로 드리는 ‘주(主)의 기도’로 이 역사 속에서 날마다 듣고 있습니다. 그 기도가 때로는 내 가슴에서, 때로는 쪼깐이들의 눈물에서, 때로는 여기 갇혀 있는 죄수들의 한숨 속에서 들려오는 겁니다. 저는 그 기도에 ‘아멘’ 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이 거절하지 못하신다고 믿으면서.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기도’라고 믿기 때문이죠. 이렇게 아래서 올라가는 사람의 기도와 위에서 내려오는 하느님의 기도가 맞부딪쳐 불꽃이 튀는 곳에서 우리는 인류의 빛을 보는 거죠. 이러고 보면 우주는 그대로 기도의 용광로인 것 같습니다.

3월 접견 때 뵙겠습니다. 제 건강한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철 덜 든 아들 드림

 

바우야!

 

나는 옷 입은 채로만 너를 안아 주었었는데 지난 1월 30일 새벽, 하느님이 너를 세상에 보내 주신 알몸을 따뜻이 안아 주는 꿈을 꾸었단다. 그것은 분명히 병사 7방이었다. 문득 눈을 뜨니까 문가에 푸른 죄수 옷을 입은 사람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퍽 추워 보였단다. 누가 일러주는 것도 아닌데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되었어. 그래서 이불자락을 들쳤더니 그분은 말없이 내 자리 속에 들어와서 내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니겠어? 거의 살이 붙어 있지 않은, 그러나 나는 그분의 체온을 전신에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의 몸이 줄어들더니만 알몸 갓난아기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아기의 엉치, 등어리, 어깨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이건 바우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였다. 정말 정말 기뻤다. 그런데 네 할머니가 이불자락을 들치더니 ‘바우가 여기 있었군!’ 하는데 눈을 뜨니 꿈이었단다.

서운했지만 이런 꿈은 하느님이 특별히 주시는 꿈이라고 생각되어 정말 기뻤다. 일어나 자리를 개키고 방 걸레를 치고 세수하고 밖을 내다보았더니, 흰 눈이 땅을 덮고 있었고, 흰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흰 눈의 청순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지 뭐냐. 이제 땅은 저 흰 눈의 향기를 받아 두었다가 이슬 머금은 풀내음, 개나리, 진달래, 민들레, 호박꽃 향기를 내뿜게 되겠구나. 가을이 되면 감, 귤, 사과, 개암 열매 속에 향긋한 냄새로 담기겠구나.

그러면서 내 얼굴을 쓰다듬었더니 그 청순한 흰 눈의 향기는 내 손바닥에서 나는 거였지 뭐냐? 그것은 네 몸에서 나는 향기였지. 이런 소리는 내면적인 경험만이 아는 소리지. 너도 크면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게 될 거야. 나는 이 기막힌 경험, 이 숨 막히는 기쁨을 지금 네게 적어 보내지 않으면 꼭 미칠 것만 같다. 지금은 청순하기만 한 네 향기가 앞으로 어떤 꽃향기로 피어나고 어떤 열매로 열릴지, 그건 하느님도 모르실지 모르지. 하느님도 조금은 놀라실 일이 아닐까? 예쁘게 예쁘게 잘 자라거라.

 

1979. 2. 19. 멍청이 같은 할아버지 씀

 

바우 엄마 : 호근의 편지를 그대로 들여보내기 안 되었으면 내용을 베껴서라고 전해 주었으면.  예술가의 감각에 비추인 서구 문명, 무대 예술의 새 면목을 알고 싶군.

태근, 영미 : 졸업 축하한다. 한 단계 뛸 때마다 무언가 인생의 매듭을 짓는 계기로 삼는 게 좋지. 영미 12월5일 편지 고마웠다. 영미의 그림이 든 편지를 받아봤으면 정말 좋겠다. 쑥쑥 자라거라. 마음까지도.

호근 : Royal Opera Theater 그림 엽서 편지를 받아 벽이 붙여놓고 네가 거기 가서 돌아다니겠구나 상상해 본다. 부디 몸조심, 말조심, 행동거지를 조심하면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기 바란다.

의근 : 너무 무리해서 떠나기 전에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유럽에 가서 독어, 불어를 master 해라. 성심에게 문안해라.

성근, 채원 : 결혼 생활에 타성만큼 무서운 적이 없다.

성수, 영금 : 꽤 바쁘게 지내는 모양이지, 보는 것 같다. 그동안 할아버님을 잘 모셔서 고맙다. 가족 중에 영금이가 나를 제일 잘 믿는 것 같은 느낌이다. 네가 믿는 대로 나는 천하태평이다. 하루하루 보람찬 나날이다. 시를 적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기는 해도 그만큼 시를 영글리는 기회도 되겠지. 아무리 바빠도 가끔 가려운데 긁어주는 편지를 다오. 아무리 태평이라도 이 안에서 편지 받는 즐거움 같은 것은 없다는 걸 기억해다오. 건투를 빈다.

Faye : 미켈란젤로의 전기 소설 참 좋았어. 같은 Signet Series에 같은 작가 (Irving Stone)가 쓴 “I. Michelangelo, Sculptor”라는 작품을 구해 주었으면 고맙겠소. 미켈란젤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예술가 중의 하나거든. 그의 작품 사진첩도 다시 보고 싶군. 송건호 씨의 다른 책들도 보고 싶고. 하느님의 은혜와 힘과 지혜가 모두 모두에게!!!        

늦봄

 

모든 식구들에게 한 마디씩 당부의 말을 보냄

단식을 끝낸 후의 건강 회복에 대하여, 아버지의 기도에 대한 생각, 손자 바우를 꿈에 본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