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0724 쌀알 하나에 담긴 우주

당신에게





뜻밖에 또다시 붓을 들게 되었군요. 이빨 때문이오. 이제쯤은 7월 편지를 받아 보고 알았겠지만, 여기 와서 또 이 한 대가 부서지는 덕분에 치과 의사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지난 22일에 치과 의사가 와서 보고, 부서진 이들을 때우고 씌우고, 왼쪽 어금니 뺀 자리에 새로 해 넣고 하자고 해서 시작한 일이 예상 밖에 커졌구려. 모두 다섯 대를 손질하는데 35만 원이 든다는군요. 한 대당 7만 원이 드는 셈이지요. 자두 씨 하나 깨물어서 이 한 대 부서진 것이 계기가 되어 35만 원이나 내던지게 되었다 싶으니 좀 아찔했지만, 시작한 일 안 할 수도 없는 형편이구려. 금으로 하면 6만 원인데, 백금을 섞어서 하니까 7만 원이 든다는군요. 의사가 나이를 묻고는 그거면 평생 쓸 거라는군요. 죽을 때까지 쓴다는 말이겠지요. 이 하나만은 자랑할 수 있었는데 감옥살이 4년에 이가 엉망이 되었구려. 나의 몸에 남은 민족 수난의 흔적으로 하느님 앞에 가지고 갈 것은 이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해달라고했지요. 공주교도소에서 한 이를 가진 채 땅에 묻히겠다는 좀 센티한 심정이라고나 할지. 갑자기 35만 원을 뽑아내자면 힘들겠지만, 어떻게 무리해 봐주시오. 이 편지가 도착하는 길로 송금해 주면 좋겠소. 어차피 교도소가 책임을 지고 이는 먼저 해 넣고 돈이 오는 대로 갚아야 할 형편이니까. 오늘, 내일 아마 새 이로 와작와작 씹어 먹게 되겠지요. 건강은 여전히 좋구요. 창근 아빠 (동생 문동환) 보내준 책을 한 달 이상이나 걸려서 정독했지요. 지금은 황석영이 쓴 ‘어둠의 자식들’을 정말 재미나게 읽고 있어요. 재미나다는 말은 그들의 생을 모욕하는 말이 되겠군요. 한국 리얼리즘 문학에서 중요한 한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요? 무척 더웠지만, 그 대신 곡식들이 잘 자라겠구나 싶으니, 더운 것이 도리어 고맙게 느껴져서 별로 견디기가 어렵지 않았소. 지난밤에 비가 좀 뿌려서 오늘은 좀 나은 것 같지만. 병충해를 막기 위해서 한바탕 소나기라도 왔으면, ‘사람 좋고 곡식 좋고’가 되련만.



지면이 좀 있기에 지난 주일 저녁밥을 받아 놓고 경험한 이야기 한 토막 적어 볼까요? 또 한 그릇 농민들에게 따끈한 빚을 진다고 하면서 밥을 받아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흰 쌀알들이 잡곡을 밀어내고 온통 밥그릇을 독차지하지 않고 오히려 잡곡들 속에 용납되어 묻혀 있는 것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어지는 것이었소. 농민들의 간절한 염원들이 담긴 쌀알 하나하나 너무 소중하게 느껴져서 이 소중한 낟알들이 이 한 그릇에 몇이나 될까 생각하니 그걸 셀 수 없다고 느껴지더군요. 그러니 무한인 거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 쌀알 하나하나에서 천둥 치며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 이어서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쏟아지는 맑은 소리, 땅속에서 잔뿌리로 물 길어 올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며 쏟아지는 찬란한 광경이 눈앞에 전개되더군요. ‘아, 쌀알 하나하나에는 우주가 있구나! 하늘과 땅, 비와 바람,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사람들의 정성 어린 마음과 생명의 손길이 빛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소. 그런 생각이 들자 숟가락을 들 수 없는 심정이 되더군요. 그러다가 우주의 정기, 우주의 생명과 마음을 한 알 한 알 정성껏 그리고 맛있게 맛있게 씹어 먹었지요. 이렇게 해서 나의 몸은 농부들의 손을 거쳐 오는 우주의 몸이 되고 마음이 되는 것이었소. 황홀한 경험이었소. 이제 튼튼한 새 이를 가지고 더 잘 씹어 이 몸을 농부들의 간절한 염원의 화신, 우주의 생명과 마음의 화신으로 만들어야지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몸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이렇게 공주교도소 1사 2방은 또다시 무덤에 가서도 못 잊을 나의 마음의 고향이 되었구려.



당신의 편지는 19일 쓴 것까지 왔어요. 특히 윤의 어머니 글발 정말정말 반가웠어요. 전원생활로 돌아갔다니 나가면 한번 같이 가봐야죠. 어머님이 내 걱정을 많이 하신다는데 이렇게 황홀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들 걱정은 왜 하실까. 걱정 놓으시라고 말씀드리시오.



바우, 보라의 다정한 모습, 의근, 성심의 마음으로 활기를 띤 우리 집, 교회 등 자못 그립군요. 창근, 문규, 이제는 대학 진학이 결정되었겠군요? 창해의 물방울 하나처럼 이 시대를 살며 예술에 정진하고 있는 호근, 은숙의 나날이 쌀알 하나하나처럼 영글기를 빌고 있어요. 특히 안(병무) 박사의 건강을 위해서. 점심 배식 소리가 들려 오는군요. 7월 9일 당신의 편지, 정말 좋은 산문시였소.





1981. 7. 24. 사랑






이 건강이 악화되었고 저녁 밥을 먹으며 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