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0805 진실만이 남아라!

당신에게





그 더운데 일부러 돈을 가지고 왔으니 당신도 엔간히 극성이구려. 그러나 (김)석중 님까지 같이 왔었다니 그 마음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이가 썩 잘된 것 같소. 첫날에는 상당히 거북하더니 하룻밤 자고 났더니 거의 의식되지 않을 정도. 아직도 밥을 씹을 때는 제 이 같지는 않아도, 이만하면 썩 잘된 것이라고들 하는군요. 해 넣은 이가 어떤지 알고도 싶고 해서 지난 토요일에 올 줄 알았는데 오늘까지 나타나지 않았군요. 아이들이 시간 내기가 여의치 않은 건지? 아무튼 오늘은 편지를 쓰기로 했어요. 그동안 날씨가 꽤나 덥더니 이젠 아침저녁으로 꽤 싸늘하군요. 오늘 새벽에는 담요 두 장을 덮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새벽에 오싹해서 눈을 떴더니, 눈뜨기 전에 본 꿈이 생생하더군요. 북간도 친구가 ‘북간도’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걸 젊은이들이 붓으로 쓰고 있는 거였소.  담요 한 장 더 덮고 생각했더니 ‘북간도’라는 시 한 수가 가슴에 안겨 오더군요.  명동 동거우 우리 집 뒤에 서 있는 5,6백 년은 되었을 큰 느티나무에서 조국의 모습을 보고 읊은 시, ‘한뫼의 신화’와도 통하는 같은 계열의 시요.



요새 나의 건강은 요가의 진전과 함께 날로 좋아져 가고 있소. 그동안 나는 아무리 고단해도 낮잠을 자지 못했소. 낮잠만 자고 나면 두통이 왔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은 점심 먹은 다음에 한잠 자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소. 깨어날 적마다 머리를 흔들어 보고는 머리가 아프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구려. 신기할 정도. 고마울 뿐이에요. 



7월 편지에 요가를 하는 나의 심경을 적었었는데, 그게 한 걸음 더 깊어지는군요. 시작할 때, 끝날 때, 또 도중에도 나는 이렇게 속으로 뇌이는 거죠. 





“몸도 가라. 마음도 가라. 오직 사랑만이 남아라. 진실만이 남아라. 



사랑이자 진실인, 진실이자 사랑인, 사랑의 진실이자 진실의 사랑인 슬픔만이 남아라. 



슬픔으로 울리는 사랑이여. 진실이여. 



진실을 숨 쉬는 사랑이여. 사랑을 숨 쉬는 진실이여. 



깜깜한 밤하늘에 별 떨기를 뿜어 올리는 진실이여. 



이 슬픈 땅 산허리에서 뿜어내는 아침 햇살이여. 



아침 햇살을 숨 쉬는 사랑의 눈물이여. 



진실의 반짝임이여.”





요가의 전 과정을 통해서 ‘진실만이-’ 하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남아라-‘  하면서 숨을 내쉬는 거요.  요가는 결코 무념무상이 아니거든요. 무언가 즐겁고 아름답고 좋은 생각에 몸과 마음을 모으는 건데, 이제야 겨우 그게 무언지를 알게 되었구려. 이제 겨우 요가 입문에 들어선 느낌이 드는구려. 나의 별을 향해서 시위를 떠나기 직전의 화살처럼 팽팽한 몸이 되면서, 또 그것을 보드라운 명지실로 풀면서, ‘진실만이 – 남아라 –‘를 속으로 뇌다 보면, 그것도 한 시간 이상을, 나의 온몸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요. 이렇게 공주 교도소는 나에게 너무나 큰 소득을 선물로 안겨주는군요. 성서 연구, 시 쓰기, 찬송가 가사 등. 지난 주일 날에는 애기 보라의 눈으로 하느님의 은은한 눈길을 쳐다보고, 보라의 손으로 하느님의 따뜻한 가슴을 만져 본다는 찬송가 가사를 한 수 받았어요.  또 곧이어 정국의 아버지에게 바칠 찬송가 가사가 한 수 또 와서 지난 주일도 수확이 컸어요.  정국 아버지의 세계에서는 하느님을 ‘하늘게비쟝 ’이라고 부르는데, 그 말이 너무 좋아서 그 말을 넣고 지었지요. 하느님 칭호가 세상에 많지만, 이 말만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하느님의 은혜가 정국 아빠의 세계에 한없이 한없이 내리기를 빌고 또 빌 뿐이오. 



요즘 Heschel 의 ‘Prophets’와 곽(노순) 박사의 논문을 읽고 있어요. 헤수분의 책은 기독교 학자들의 어떤 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예언자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주어서 감명이 깊어요.  같은 유대인 학자이면서도 부버는 서구의 논리로 하씨리즘 (유대 경건주의 운동)을 풀이해 주는데, Heschel의 논리는 철저하게 성서적인 논리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러면서도 종교 일반, 서구의 철학과 이천 년 기독교 사상을 종횡무진으로 파헤치니 놀랄 뿐이군요. 어젯밤에는 ‘예언자들의 영감과 시인들의 영감’에 관한 대목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소. 곽 박사의 논문은 분량은 대단치 않은데, 분석의 날카로움에 있어서 서구의 어느 학자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군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어도 따라가기가 힘들군요. 미국에 Research Fellow로 들어가서 몇 해 연구할 수만 있다면 세계 학계에 꽤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군요. 연구는 인명, 지명, 종교행사 등의 유래를 설명하는 구절들에 관한 것으로서 얼뜻 보기에 별로 큰 의미가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성서는 전부 유래에 관한 설명인 거죠. 성서의 세계를 여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군요.  엄청난 보화가 들어 있는 창고도 그것을 여는 열쇠는 작아도 되는 거고, 실제로 작거든요. 그래서 그의 연구는 ‘방법론’.



점심시간이 되었군요. 점심을 먹고 나와서 계속하지요.



‘빵 있는 자유, 자유 있는 빵을 민족에게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점심을 먹는데, 당신이 속초 쪽에서 쓴 수, 목요일 글발이 날아 들어와 반가웠어요. 천관우 씨가 통위 의장이 되었다니, 난 이제 뒷구석에 물러앉아 손뼉이나 치고 있어도 되겠군요. 통일에 관한 글을 전국적으로 모집하기까지 한다니 세상이 많이 달라졌군요. 아무튼 역사의 자장이 결정적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구려. 반가운 일이지요. 8.15를 우리의 생의 분수령이라고 한다면, 8.15 저쪽보다 이쪽이 점점 더 길어져 가고 있군요. 너무 늦기 전에 통일과 함께 새로운 분수령을 넘어야 할 텐데.



늘 바우 이름으로 편지를 쓰는데 내용은 당신에게 하는 말이어서 이번엔 바우에게 좀 이야기하려고 당신에게는 이만.





사랑





바우야!





용서. 늘 네 이름으로 편지를 내면서도 너한테 하는 이야기가 없어서. 네가 얼마나 의젓이 커가고 있는지는 사진을 봐서, 또 할머니 편지를 봐서 잘 알고 있다. 할아버지는 네가 자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른단다. 주사 맞으러 온 애들이 우는 것을 보고는 「나의 살던 고향」을 불렀다면서? 오래지 않아서 네 손을 잡고 교회로 갈 날이 오기를 빈다. 너도 기도하겠지.



얼마 전 혼자 조용히 자리에 누워 있으려니까, 네가 바로 내 옆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단다. 그리고 네가 “할아버지, 바다는 왜 깊지?” 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바다는 슬퍼서 깊은 거지”라고 대답해 주었지. 이렇게 말한 것은 육군교도소 접견실에서 나와서 갈라질 때 네가 그렇게 슬프게 울었기 때문이지. 너는 때 묻지 않은 순진한 마음으로 이 겨레의 슬픔을 울어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던 거란다. 그래서 한창 너와 나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갔단다. 산은 왜 높아? 산은 슬퍼서 높지. 하늘은 왜 넓어? 하늘은 아주 아주 슬퍼서. 별은 왜 슬프지? 별은 맑고 맑아서 슬프고…. 할아버지, 나 울고 싶어졌다. 바우는 슬퍼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지. 눈물을 속으로 삼켜야 한다. 속으로 삼킨 눈물이 발밑에서 솟아나 흐르다가, 다른 바우들의 눈물과 어울려 흐르다가 나무뿌리 풀뿌리들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모래알들의 슬픔도 쓸어안으며 바다로 가서 큰 슬픔이 되는 거야. 하늘의 슬픔, 땅의 슬픔이 천둥번개로 빗발쳐 쏟아지면, 그때 한 번 크게 용을 쓰는 거지. 그러다가도 잡아두드리던 바위를 얼싸안고 쓰다듬어주는 큰 슬픔이 되는 거다. 앞을 가로막는 절벽을 들이받으며 무너지라고 있는 힘을 다해 때리다가도 그 앞에 무조건 항복하고 엎드려 용서를 비는 큰 슬픔이 되는 거다. 그래, 할아버지. 난 이제 안 울게. 아 – 바다는 좋아. 할아버지, 언제 날 바다로 데려다줄래?  이런 이야기를 너와 주고받다 보니 어느 샌 지 내 눈에는 눈물이 솟아 있었지 뭐냐? 네가 보기나 할 것처럼 얼른 눈물을 닦았지. 약속할게. 여기서 나가는 대로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바다로 가자고. 그렇게 좋아하는 바다에 5년씩이나 못 가봐서 나도 좀 미칠 것 같은 기분이니까. 내가 나가기까지, 아니 그 후에도 언제까지나 너는 우리 가정의 희망이요 기쁨이거든. 할아버지는 네 노래가 정말 듣고 싶구나. “바우가 새 봄을 기다리듯이”로 시작되는 찬송가 가사도 하나 되어 있다. 여기에 곡을 붙여서 너랑 같이 부를 날이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바우가 성악가가 되어 독창회를 열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야지. 난 바우가 아니니까 그때 왕창 울거야, 너무 좋아서! 



바우 할아버지





아버님께





아버님, 어머님 이야기를 중심으로 명동 역사에서 시작해서 민족 수난사 엮는 일을 나가서 할 일의 첫째로 꼽고 있습니다. 언젠가도 쓴 것 같지만 주고받는 이야기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육성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진실 그대로를 남겨 보고 싶습니다. 기뻤던 일뿐만 아니라 슬펐던 일, 성공한 일뿐만 아니라 실패한 일, 자랑스러운 일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일까지 아버님, 어머님의 너무나 인간다운 모습을 남겨 보고 싶습니다. 거의 한 세기를 뻗는 기다림의 역사를 남겨 보고 싶습니다.



역사는, 아니 인생은 어쩌면 끝없는 기다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시편 130, 131편을 읽었더니 끝에 가서 “기다리라”는 말이 있어서 새삼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기다린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기다림이 아니지요. 씨를 뿌리고 싹이 돋기를 기다리고, 김을 매면서 자라기를 기다리고, 물을 주면서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까닭은 씨 속에 있는 생명의 지성소에는 우리의 손이 닿을 길이 없기 때문이지요. 생명의 지성소 문이 안에서 열리기를 우리는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역사에도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지성소가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래서 역사도 기다림인 거죠. 기다림은 열리는 것을 보는 놀라움이구요. 기다림은 하느님과 함께 와장창 놀라는 일이지 강요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빨강 꽃이 피기를 바랐다가 노랑 꽃이 피었다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그만큼 더 놀라는 것이 기다림의 인생이요 역사인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또 때를(전도서) 기다리는 일인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때를 분간해서 밭을 갈고 씨를 심고 김매고 물을 주는 일이 곧 기다림인 것 같습니다. 90년 가까이 얼마나 애를 태우고 조바심하며 기다리셨습니까?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민족통일이건만 그것을 지금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하느님께 기도하는 길밖에 없겠지요. 저는 하느님께 ‘내 아버지, 어머니의 기도는 거절하시면 안 됩니다. 그분들은 너무나 순진하십니다. 그분들의 기도를 당신은 거절 못 하십니다’고 늘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예수의 기도를 거절하실 수 없듯이, 정국의 아빠 기도도 거절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그런 뜻인 줄 압니다. 속히 뵈옵고 아버님, 어머님 이야기를 엮어 보고 싶습니다.



부디부디 건강하시기를……. 



1981. 8. 5. 



못난 아들 드림







성심에게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 이제 자리도 잡혀가겠지. 가을 학기부터 어디 나가서 배우고 닦은 걸 가르쳐야지. 가르치는 것은 곧 배우는 일이거든. 언제 어디서 어떤 새것이 얼굴을 쑥 내밀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놀라움을 기다리면서 가르쳐야 해. 물론 가르치는 일만이 아니지만. 피아노는? 전일 꿈에 피아노를 말끔히 새로 고쳐다 놓고 너희들이 자랑하는 즐거운 모습을 보았구나. 전축은 30만 원이나 주고 찾아왔는지? 아파트가 늦어져서 어른들이야 좋지만. 



아버지 씀





전 세계에 널려 있는 친지들 모두 모두 할렐루야! 늦봄






천관우 (통위 의장이 됨)



아내의 요가에 대한 조언, 부모님의 생애를 바탕으로 만주의 한인 역사를 기록하고 싶은 소망, 바우에 대한 그리움 등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