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속에서 시작한 금식

9/3

아버님께



어제는 참 즐거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의 건강하신 모습을 뵐 수 있었고 거의 안아 볼 수 있어서 대한민국 천지에 나밖에 누리지 못하는 축복 같은 것을 흐뭇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집 장손 바우를 안아 볼 수 있어서 무한히 기뻤습니다. 한돌 반 될 때 떠나간 아비, 어미를 그리다가 만나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신통한데, 남기고 갈 식구들의 서운한 마음을 알아 “아빠, 엄마 손을 꼭 붙잡고 돌아올게”라는 말로 위로마저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그윽합니까? 얼마나 큰 마음입니까? 우리 가문을 이어 갈 장손이 저보다도, 호근이보다도 훨씬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버님, 어머님의 쌓으신 덕이 이제 더 크게 결실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없이 기쁩니다.



제가 금식기도 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고 과히 걱정 않으시면서 나가시는 것을 뵙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늘 아침 혈압도 금식 시작할 때와 똑같아서 거의 불가사의한 느낌마저 듭니다. 요가 덕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이번 금식 기도 기간에 이미 얻은 성과가 저로서는 너무 커서 감당하기 곤란할 정도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마태복음 5장, 시편 103편에서 또다시 새로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다만 기도로 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금식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느님께 떼를 쓰려는 심정이 아니었습니다. 기도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치는 몸부림, 한숨, 흐느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거기서 우리의 진정한 소원을 간취(看取)하시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금식하면서 기도한다고 할 때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당신의 마음이 울려오기를 다만 기다리는 것, 이것이 기도라고 믿고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느님의 마음은 계속 울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어제 가족을 만난 때문인지 “이 몸은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갈 이 몸이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던가 봅니다. 이 기도와 함께 이 몸 소중하게 보전하겠습니다. 마음 푹 놓으시고 저의 이번 금식 기도에 더 많은 진전이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의 대화를 아버님은 잘 못 들으신 것 같고, 충분히 사이들을 메우지 못했고, 어제와 오늘 사이에 깨달음이 달라진 것도 있어서 다시 차근차근 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번에 앞이 캄캄해 오는 절망적인 심정에서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본래 타고난 낙천가입니다. 아마 이건 아버님에게서 온 성품일 것 같습니다. 80여 성상을 절망하지 않고 절망을 뚫고 나오신 아버님이시니까요.



그 아버님의 분신, 이 낙천가 익환이도 이번에는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주변 정세를 보나 국내 정세를 보나 서광이 비쳐 들어올 데라곤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4강이 한 발씩 내밀어 이 조국을 눌러 짚고 있어서 꼼짝도 못 할 판인데, 우리는 남북으로 갈려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동서로 찢어진 채 언제 아물지 모를 형편입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이 금은 음성적으로 점점 더 깊어지고 벌어져 갈 뿐입니다. 그래도 저는 정부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부까지 포함해서 이 겨레가 송두리째 휩싸여 있는 절망, 그것 자체가 깜깜하게 느껴져서 금식 기도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용기를 준 것은 이동철 씨였습니다. 절망을 절망하지 않는 일, 그리고 바로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해서 그냥 한 걸음씩 절망을 밀고 나가는 일,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그는 저에게 실감 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은 하느님도 어떻게 못 한다는 확신이 저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힘을 얻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이 민족적인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고 몸부림쳤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저는 광야로 금식 기도하러 나가시던 예수의 깜깜한 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로마 대제국의 압제 아래서 내일이 없는 오늘의 절망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길밖에는 살길이 없는 겨레,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의 세력을 떨쳐 버린다는 것은 바위를 밀어내려는 개미의 노력같이 보이는 거의 절대적인 무력감, 그 앞에서 느끼는 절망감, 그 속에서 예수는 40일 동안 고투하셨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세력 하나에 눌려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 4강의 상충하는 힘에 눌려 있어서 우리의 처지는 어쩌면 예수님 당시 유대의 처지보다 더 절망적인지 모릅니다. 적어도 오늘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만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눈을 감고 광야의 예수를 주시했습니다. 저의 눈에 비친 예수도 아무 빛을 찾지 못한 채 광야에서 겨레들에게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한 태도가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절망을 밀고 희망이 아닌 내일을 향해서 그냥 오늘을 살 뿐인 겨레들의 옆을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11:1)의 말대로 바다에 빵을 뜯어 던지는 심정으로 하늘의 씨앗을 뿌리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의 생애는 십자가 위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끝난 것입니다. 그 말은 겨레의 절망할 수 없는 절망의 외침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서광이 어디서 언제 어떤 모습으로 비쳐올지 그런 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절망을 절망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서광 돌파구는 하느님이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일이 바로 믿음인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이라고 말했을 때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길을 나섰다고 한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의 겨레는 그 절망적인 오늘을 슬퍼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옆에는 그것을 한없이 슬퍼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슬픔의 밑바닥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누가복음 6장인 것 같습니다. 거기서 예수는 슬픔이 행복, 곧 기쁨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절망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냥 눈감고 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그 사태를 같이 슬퍼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뜨거운 마음, 인정, 그것을 같이 느끼는데 절망 자체마저도 끌 수 없는 기쁨이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집권자나 국민이나 우리의 절망적인 처지를 솔직하게 직시하고 같이 슬퍼하게 되는데 문제의 해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슬퍼하는 데서 서로 막혔던 마음이 통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진정한 민족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아버님을 뵙고 나서 절망에 대한 명상을 다시 하다가 깨달은 것은 절망 자체가 희망을 전제한다는 사실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에 절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절망이란 꺾인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절망이란 전혀 보이지 않는 희망을 향한 몸부림인 거죠. 그런데 예수에게 있어서도,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희망은 완전히 절망에 묻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이만큼 쓰겠습니다. 오후에 나와서 쓰다가 한 시간 복도를 활보도 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도 나누다 보니 저녁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 밤에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을 믿고 힘을 얻겠습니다.





9월 4일 아침입니다. 어머니, 오늘 새벽 누군가 부르는 찬송가 소리에 눈을 떴더니 제 마음을 무척 어둡게 하던 비가 걷히고 활짝 개인 아침이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려니 “이 몸 감사합니다”라는 말부터 나오더군요. 그러고 보니 이 몸을 낳아서 길러 주신 어머님이 한없이 고마워져서 오늘은 어머님께 제 속을 털어 보이고 싶어졌습니다.



오늘 아침의 명상 시간에도 하느님은 어김없이 소중한 것을 가지고 찾아와 주셨습니다. 명상을 생활화해야 한다고 생각되는군요. 광야 40일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 이르는 그 사이의 예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어제오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는 겨레에게 하느님 나라의 희망의 씨를 심어 주면서 당신은 겨레의 절망을 홀로 지고 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십자가였구나 하는 것입니다.



절망 속을 헤매는 겨레의 곁을 도저히 떠날 수 없어, 머리 둘 데도 없는 뜨내기 생활을 같이 먹고 마시고, 아니 같이 굶주리면서 살아가면서, 같이 슬픔을 나누면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겨레의 절망적인 운명을 홀로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지고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아버님, 어머님 말씀대로 속히 서재로 돌아가 붓을 들어야 할 몸입니다. 그러면서도 몸은 같이 있지 못하면서 마음으로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이 저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상과 같은 생각을 하다가 저는 ‘희망’이라는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희망은 메시아를 거부했거든요. 기독교의 천년 왕국의 희망은 중세기의 암흑시대를 끌어들였구요. 마르크스의 희망은 공산 독재를 낳고 말았습니다. 20세기 과학의 빛나는 희망은 지금 인류를 멸망의 위기에 몰아넣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만 슬픔으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절망을 한 걸음씩 밀고 나갈 뿐인 것 같습니다. 그다음은 오직 하느님께 맡기고. 그것이 부활의 신앙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저께 교회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렸는데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를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로 이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주소는 어딘가요? 거기가 바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그런데 그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방인의 땅 갈릴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결코 결코 예루살렘이어서는 안되고, 예루살렘에서도 한참 떨어진 어두움 속 이방인의 땅 갈릴리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모이는 교회는 무엇인가요? 저는 그것을 정기적으로, 부정기적으로 모이는 퇴수(退守) 회관이지 교회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도 교회를 이원적으로 생각하는 잘못에 빠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는 모이든 흩어지든 예루살렘이 되지 않고 예수의 현주소인 갈릴리에 자리 잡고, 예수와 같이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하며 겨레의 슬픔을 안고, 겨레의 절망을 십자가로 지고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짊어질 십자가인 절망은 집권자까지 포함하는 온 겨레의 절망입니다. 교회가 이런 자세를 취할 때 비로소 화해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께 갈라질 때 어머님이 저를 믿으시고 그리 걱정 않으시면서 나가시는 걸 보면서 저는 크게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비가 오기까지 45분을 쉬지 않고 그야말로 기분 좋게 활보했습니다. 오늘 쨍쨍하게 맑은 하늘 아래서 따뜻한 햇볕을 받아 가며 기분 좋게 넓은 마당을 활보할 것입니다. 부디 건강한 가운데 열심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아들





당신에게



오늘 이 글을 쓰는데 당신의 아름다운 마음과 따뜻한 사랑을 담뿍 담은 207, 209신이 날아들어서 반가웠어요. 바우의 의젓한 사진도 좋았구요. 한빛 교회 주보의 「결단의 기도」는 읽을 때마다 콧날이 시큰해 오는군요. 이번 「결단의 기도」에는 나의 마음과 통하는 데가 많아서 더욱 그런 것 같았소. 208신은 내일쯤 날아들겠죠.



이제부터 쓰는 것은 기독교장로회 총대인 박용길 장로에게 하는 나의 소신이요. 언젠가도 썼지만 지금 나에게는 민주화도, 민족통일도 민족 화해로써 어디까지나 신앙의 문제가 되었소. 그전에도 이 둘이 나의 신앙의 실천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제 화해라는 신학적인 주제로 나의 신앙적인 반성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정말 여러 날 만에 따끈따끈한 햇빛을 맨살에 받으며 운동하고 들어와서 한잠 낮잠을 자고 다시 붓을 들었소. 



나에게 있어서는 민주화와 민족통일은 둘이 아니라 같은 하나. 민주화는 갈라지기 쉬운 집권층과 국민을 주권재민의 민주원칙을 실현함으로 민족을 통일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몸담고 있고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민족통일과 별개의 문제가 아닌 거죠. 그것은 민족통일의 첫 단계인 거죠. 민주화와 민족통일, 흔히 생각하는 대로 결코 선후의 문제가 아니에요. 국토통일만으로는 민족은 통일되지 않아요. 갈라진 민족을 통일하는 길은 민주화뿐이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오. 그것이 나에게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 내용인 화해의 실천이 될 것이오. 한국 교회는 이 민족의 모든 비극의 원천인 조국 분단, 민족 분열을 화해의 신앙으로 극복하는 일, 우리 민족의 사활이 걸려있는 문제에 이제 온갖 관심과 힘과 슬기와 신앙의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지금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한국 교회가 이 과제를 외면하고 하는 어떤 아름다운 일도 하느님이 오늘 우리에게 메워주신 역사적인 사명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 사명에 전력투구할 때, 나머지 일들도 의미를 얻게 되는 거죠. 이것이 오늘 이 겨레의 절망을 십자가로 지는 일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어요. 조국분단, 민족 분열이야말로 이 겨례의 절망의 근원이기 때문이지요. 화해를 말할 때 그것은 결코 복음의 준엄성을 잊어버리자는 말은 아니요. 화해라는 시각에서, 화해를 향해서, 모든 것이 마땅한 신학적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제 나의 기도는 기독교 장로회가 이 민족적인, 역사적인 과업을 짊어지는 민주 구국의 교단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타고 있어요. 그리고 기장도 능히 그것을 해낼 수 있고 해 내리라고 믿어요.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장에 밖에 기대를 걸 데가 없는 것 같군요. 그렇게 될 때, 기장도 이사야42, 49장에 있는 만방을 비추는 한국의 빛이 될 것이오.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이 되는 거죠. 기장 동지 여러분에게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일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다고 전해 주시오. 기도가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지, 이런 처지에 놓이기까지는 잘 모르는 법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민족 수난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가는 기장의 동지 여러분에게 부활의 영광이 빛나고, 그 빛이 민족의 어두움을 비추는 날이 속히 오기를 빌 뿐이오. 이 편지를 안(병무) 박사나 박(형규) 목사에게 보이고 비판을 받아서 당신의 글로 적어 보내 주시오.  나의 신학적이 발전에 절대 필요한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정국의 아버지에게 전해줄 말: 부디 그 버려진 돌들 옆을 떠나지 말고, 만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달라고. 그것은 하느님의 기대를 져 버리지 않는 일도 되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죽기까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거죠.



부디 성심이를 정성껏 보살펴 주어요. 생각하면 은숙이와 채원이가 우리에게 그렇도록 소중한 선물들을 안겨주었는데, 너무 당연한 일로 덤덤히 지나고 말았는데, 꼭 무슨 큰 죄나 지은 것 같구려. 정신없이 바빴다는 핑계로서는 마음에 걸리는 가시가 빠지지 않는구려. 당신은 본래부터 나의 건강 관리에 대해선 믿음이 있으니까. 아버님, 어머님의 걱정이나 덜어드리면서 같이 기도해 주면, 그것으로 나는 기쁠 뿐이오. 





문바우 – 잘 다녀오너라. 약속대로 아빠 엄마 손 꼭 붙잡고 돌아오너라. 몸도 크고 마음도 더 커가지고, 백목련 꽃웃음을 날리며.





성심에게



축하, 축하, 축하. 우주의 생명의 신비의 절정이요, 정수인 새 생명을 몸에 받아 자기의 피와 살로 키워가는 특전은 잘 났다고, 내로라고 우쭐대는 우리 남성들은 아무리 부러워해도 안 되는 여자만의 특전이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 경건한 마음으로 불러오는 배를 안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임부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종교적인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 기도하라고. 그리고 늘 많은 산소를 들여 마시도록 해요. 애기의 뼈, 살, 피가 되는 성심의 핏속에 산소를 많이 공급하는 거지. 아름답고, 즐겁고, 착하고, 진실한 마음을 기도와 함께 들여 마시면서. 필요한 비타민도 섭취하고. 또 무슨 말을 할까? 할 말이 태산 같은 것 같았는데, 막상 쓸려니까 말이 막히네. 그냥 이 벅찬 마음을 보낼 뿐이다. 



바우, 보라의 귀엽게 자라는 그동안의 세월 대부분을 이렇게 떨어져 살아야 하다니. 또다시.






절망을 이기기 위해 금식기도를 하며 통일을 염원한다는 내용. 기독교 장로회가 민족의 통일 과업을 짊어지는 교단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임신한 며느리 성심에게 보내는 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