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통한 민족의 구원

당신에게

 

어제는 즐거웠소. 당신도 생기 도는 얼굴이었고.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게 차라리 보기 좋다고 느꼈지요. 오랜만에 보는 성심이도 건강해 보여서 좋았구요. 나도 퍽 건강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 기뻤구요.

오늘 새벽에는 당신, 안계희, 원(금순) 선생, 영금이와 같이 거의 직각으로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높이높이 올라가서 서울을 굽어보는 꿈을 꾸었군요. 그 공사는 원 선생 내외가 한 것이라는 것이었소. 오늘은 조반 후에 방 걸레를 치고 좀 방에서 가볍게 뛰다가 앉아서 지난 주 한빛교회 주보를 따라 혼자 예배를 드렸어요. 예배를 마치고 난롯가에 나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점심 배식이 시작되었군요. 난 점심은 안 먹지만 김치와 단무지는 받아 두었소. 오늘 점심은 귤 하나로 때웠구요. 오늘 아침 목회 기도 때에 죄를 고백하는 순서에 이르러 깊이 반성하면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나의 마음의 열도는 나의 말과 글의 열도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소. 나의 말과 글에는 그만큼 진실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마음은 백열로 뜨겁고 말과 글은 서릿발 날리듯 차가워야 하는 건데 말이오. 이렇게 혼자서 마음의 열도를 계속 유지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군요. 마음이란 아픈 마음들이 서로 부둥켜안는 데서 불이 댕기고 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 불타는 건데, 저 외롭고 서러운, 눈앞이 캄캄한 재소자들을 보면서도 마음의 열도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안타까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들의 어두움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안타까움, 그 둘레를 서성일 뿐인 이 허전한 마음, 정말 주체할 수 없군요.

김성재 목사는 빌립보서 2장 1~11절을 읽고 예수의 생을 닮은 생을 살자고 설교한 것 같은데, 나는 어제도 잠깐 말한 말구유에 관한 명상을 계속했어요. 어제도 말했지만, 예수는 왁자지껄하는 객줏집 말구유에 누우셨어요. 그곳은 거룩한 영역이 아니라 세속 사회인 거죠. 그것도 밑바닥, 그 밑바닥 사회에서도 인간 이하의 짐승들의 밥그릇인 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은 빌립보서 2장에서 말한,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 우리는 오늘 예수의 탄생을 거룩한 영역에서, 성당이나 교회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찾고 있는 메시아, 기다리는 구원은 무엇이겠소? 그것은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통한 이 민족의 구원이 아니겠소? 하느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새 인간, 새 사회의 탄생인 거죠. 그것은 곧 민족사의 새 출발점이기도 하고. 우리는 이 메시아의 탄생을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이나 교회가 아니라 짐승들의 밥그릇인 말구유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어딘가요? 우리는 교회를 나와서 목자들을 따라 그리로 찾아가야 할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제 교회에서 별의별 사람들이 드나들며 북적거리는 객줏집으로, 거기서도 말구유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요?

이상은 어제까지의 생각이었는데,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는 바로 거기가 교회가 있을 자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군요. 그리될 때 교회가 바로 말구유가 되는 거죠. 교회는 너무 자기 영광만을 추구해 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게 아닐까요? 메시아는 한없이 낮고 천해지셨는데, 교회는 너무 웅장하고 화려해진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예수의 겸비(謙卑)를 배신하는 것이요, 그 겸비의 뜻을 가리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큰 교회를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큰 교회는 큰 구유이니 더욱 좋은 게죠.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과 아름다운 예배로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중생 (이 말이 짐승이라는 말이 됨)이 모여서 배불리 먹이를 얻을 수만 있다면, 구유는 크면 클수록 좋은 거죠. 교회가 어중이떠중이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대는 객줏집의 말구유 구실을 할 때 메시아는 거기에 오시는 것이 아니겠소?

 

(12월14일) 오늘 아침 6시에 일어나 아버님과 같이 기도를 드리고 6시 30분에 자리를 개키고 간단한 요가를 하고 계시록 1~2장을 우리 성경으로, 시편 119~120편을 히브리어로 읽은 다음 조반이 들어와서, 아침 준비를 하면서 큰 소리로 「뜨거운 마음」을 노래하였지요. 조반 후에 설거지, 변소, 세수, 방 걸레를 치고 앉아서 이사야 27장을 히브리어로 읽고, 구매 담당이 왔기에 이것저것 주문하고 복도에 나와서 난롯가에서 편지를 쓰는 거요. 오늘 아침부터 일과를 좀 바꾸었는데 훨씬 좋은 거 같군요. 어제까지는 조반이 들어올 때까지 요가를 하고, 조반 후에 성경을 읽었는데. 아침에 주보를 다시 보았더니, 조카 (나)종남이 세례받고 감사헌금한 것이 눈에 띄어서 정말 기뻤어요. 이제 약혼도 하고. 정말 기쁘다고 축하해 주시오.

유(관우) 형의 부음은 나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작년에 민족의 대비극에 충격받은 아픔만 아니었어도 유형의 서거는 말할 수 없이 컸을 테지요. 전에도 유형 없이 장(하구), 전(택부) 두 형을 만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구려. 그렇게 절실한 시 한 수를 남기려고 왔었던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유형이 우리에게 주고 간 마음은 그가 앉었던 빈자리에서 훈훈히 번져 오겠지요. 복음동지회의 신학이야 신학자들의 몫이겠지만, 복음동지회의 마음은 유형의 것이 아니겠소? 신학은 다른 신학자가 대신할 수 있지만, 유형의 마음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거지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마음으로 살아가 그 마음만을 푼더분하게 남기고 간 유형을 생각하면서, 또다시 사람은 자리를 영영 비우고 난 다음에야 그 가치가 드러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군요. 그의 아내에게 이 나의 심정을 전해주시오. 언제 나갈지는 모르지만 나가는 대로 찾아보아야 할 유택들이 너무 많군요. 벼르기만 하고 못 가본 이종훈 장로님의 유택을 비롯해서.

이제 어제의 명상을 계속해 써볼까요! 교회란 말구유가 됨으로써 메시아를 모시게 된다는 것이 말은 쉬운데,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이건 정말 전 교계가 뼈를 깎는 반성과 함께 과감한 체질 개선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 아닐까요? 교회가 한 조직체로서뿐 아니라 그 지체인 우리 개인 하나하나가 어떻게 체질을 개선해 나가야 할 건지?

요새 나는 질그릇이라고 생각하던 나의 몸을 말구유라고 생각해 봐요. 하느님의 마음을 담은 몸, 하느님의 마음이 스며 있는 몸, 하느님의 마음으로 뜨겁게 고동치는 몸으로 나의 몸을 소중하게 쓰다듬고 튼튼하게 가꾸다가 나의 몸은 한낱 말구유, 천하디천한 말구유, 그러나 이 말구유에서 새 생명, 새 뜻, 새 역사가 꽃피고 동트는 것을 보면서 할렐루야를 부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저번 날도 말했지만, 교회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오. 나의 몸이 나의 마음과 하나라면, 나의 마음에 예수의 마음이 와있을 때, 나의 몸은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 아니겠소? 오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하느님의 마음이 바로 우리의 몸에서 번지는 마음일밖에 없지 않겠소? 이렇게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에게서 성육신하는 일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뜻이 아니겠소. 이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일 뿐이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화끈 더워 오며 눈물이 핑 돌며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지요. 또 그것을 사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일이구요.

그런데 나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일, 나의 마음이 하느님의 슬픔으로 깊이 젖어 드는 일은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닌 거죠.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고요히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돼요. 마음을 열어 놓고 옷을 벗고 햇빛이 몸속으로 스며들기를 기다리듯이! 이때의 우리의 신앙 자세는 철저하게 수동적일 뿐이지요. 기다림, 바로 그것이 희망이오. 히브리어에서 희망이란 말은 ‘기다림’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이에요. 그때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이 거머잡은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버린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요. 나의 피로 물들어야 완성되는 너의 희망도, 너의 피로 물들어야 완성되는 나의 희망도 버리고 천만뜻밖의 것을 기다리는 거죠. 지푸라기를 버리지 않고 허우적거리다가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천만뜻밖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를 마다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겠소? 

오늘 새벽은 영하 10도나 내려갔다고 담당들이 ‘추워’, ‘추워’하는데, 나는 보온대도 넣지 않고 따뜻한 자리 속에서 잠을 잘 수 있었군요. 내 몸이 상당히 더워진 것 같군요. 요새는 (안)선호 (아들 성근의 친구)가 보내준 비극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어요. 아주 좋은 책들을 보내 주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고맙다는 말을 성근이를 통해서 전해주시오. 어머님 머리 아프시다는 것이 고혈압일 가능성이 큰데, 식초를 잡수시는 게 좋지 않을지 몰라요. 아버님도. 저혈압에도 좋으니까, 당신에게도 좋겠지요. 요새는 구매에서 오뎅이 들어가는 생선묵을 사 먹을 수 있어서 좋군요. 

아버님 편지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전망이 밝아온다고 하셨는데, 내 짐작에도 오래지 않아 극적인 변화가 오리라고 생각되는군요. 대만은 결코 국민당의 기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북경 정부가 적당히 체면만 세워주면 본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국민당 인사들의 생각일 테니까. 공산주의가 아니라 삼민주의로 중국이 통일되어준다면, 그것은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죠. 지나친 희망적인 관측일는지? 그러나 중국민족은 그만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전통과 저력이 있다고 기대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단순히 정치적인 제스츄어로 천안문에 하나 남았던 모택동의 초상을 떼고, 손문의 초상을 거는 일은 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중국은 질적으로 변하면서 통일을 향해서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독립을 원하는 대만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반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세계사적인 면에서는 이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앞으로 서른한 그릇 밥 먹으면 81년도 가는군요. 모두 모두 즐거운 성탄과 복된 희망찬 새해를 맞을 것을 빌겠어요. 82년은 우리에게 무엇을 안겨줄 것인지? 기도하면서 기다려야지요.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을 빈다고 말씀 전해 주시오. 밥 서른한 그릇보다는 당신의 편지 열다섯 장을 받으면 이 해가 다 간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군요. 너무너무 지성이어서, 어느 주임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더군요. 집필 문제는 한 달에 한 번 편지 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모양이오. 그러면 82년도 새해에 새 몸, 새 마음, 새 얼굴로 만날 때까지, 하느님의 은혜가 모두 모두 그리운 이들 위에 내리기를 빌면서, 아쉬운 대로 붓을 놓으려오. 

당신의 사랑

 

호근에게

 

네가 입센을 보고 띄웠다는 편지는 오지 않고 말았다. 그 편지 속에 바우의 사진도 들었을 텐데. 나의 건강을 비는 바우의 그림 편지는 벽이 붙여놓고 늘 보고 있다. 그동안 너희들 공부에도 많은 진전이 있었으리라 믿고. 바우도 더 이쁘게, 슬기를 키우며 자라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바우의 그림 편지를 또 기다린다. 지난번 네 편지는 나의 콧날을 시큰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예술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는답시고 겉멋이나 부리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고, 허영심에 부풀어 있기 쉽고, 하찮은 직업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지 않은데, 진실 추구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자세가 보여서 기뻤다. 진실 이상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의식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닐까?

너의 진실 추구에 영향을 줄 이야기는 삼가기로 하겠다. 그건 어디까지나 네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한 가지만 충고하고 싶은 것은, 어떤 편견이나 선입관에 결코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네가 그리스도에게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라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한없이 기쁜 일이지만, 그것이 네가 찾는 진실을 선입관으로 물들인다면 그건 불행한 일이다. 말로 표현된 것치고 상대적이 아닌 것이 없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예술까지 포함해서)은 모두 ‘불신실’일지 몰라. 그러나 그 모든 불신실 속에서 들려오는 진실의 신음을 우리는 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의 현실을 흑백 사진 필름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한국의 특수성이 아니라 세계의 보편성을 보고 싶다고 했지. 보편은 반드시 특수성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불신실 속에서 신음하는 진실을 보편적이라고 할 때, 그 모습은 시대와 환경을 따라 하나도 같을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런데 우리는 신음을 들으려면 역사의 음지를 찾아가야 해. 진실의 신음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넌 지금 독일의 진실을 찾으면 되는 거야. 넓게는 유럽의 진실이고. 그것은 유럽 문화의 음지에 가서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슈비츠를 가봐야 한다. 동서 베를린의 분계선도 가봐야지. 암스테르담에 가서 안네 프랑크의 무덤과 그가 일기를 쓰던 집도 가 봐야 한다. 그리스도의 진실도 거대한 기독교 세계의 양지가 아니라 음지, 곧 천대받으며 밀려다니던 소수, 이단자들 속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사실 구미의 정통 기독교, 기독교 문화란 제3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가 되어 있다. 대국적으로 보면 구미의 소위 기독교 문화의 음지는 제3세계라고 해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세계의 신음하는 진실은 제3세계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지. 독일의 진실, 유럽의 진실을 찾아 그 현실을 투시하다 보면, 유럽의 음지인 제3세계의 진실이 반드시 보이리라고 생각한다. 너는 거기서 한국의 특수성을 오늘날 세계의 보편성으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마지막으로 서구 문명은 기독교 신앙도, 헬라 철학도 정신만 찬양하고 육체를 죄악시하고 천대해 왔지. 따라서 육체적·물질적인 것이 정신의 음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서구 문명의 위선성 (불신실)이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전 세계의 신음은 몸의 신음이다. 신음하는 몸의 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일용할 양식’이 주기도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일,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그 한마디에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일용할 양식은 생명이요, 건강이요, 행복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의요, 자유요, 평화요, 사랑이다. 또 그런 내용을 지닌 일용할 양식인 거고. 오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빵 있는 자유’, ‘자유 있는 빵’이 민족통일이라고 할 때 빵은 곧 정치이기도 하지.

역사에 거짓을 끌어들이는 것은 마음이지 몸이 아니다. 몸은 땅처럼 철저하게 진실해. 그렇기 때문에 거짓에 빠지기 쉬운 간사한 마음이 몸의 진실을 찾아 이를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 주고 북돋워 주는 데서 우리는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크리스마스에 고백해야 하는 성육신 신앙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니? 적어도 몸의 진실이 모든 진실의 터전이요 출발점이 되는 거지. 진실을 너 자신 스스로 찾는 데 한마디 충언을 한다는 것이 꽤 길어졌구나. 그래도 진실이 무엇이냐는 것은 말하지 않으려고 애는 썼건만.

여기까지 썼는데, 네가 집으로 보낸 편지가 배달되어 궁금증을 풀었다. 카나다 고모의 성탄 카드, 편지, 가족사진도 와서 기뻤고. 오늘 아침 요가를 하다가 깨친 것. 마음은 간사하지만, 내 몸의 진실이 소중한 만큼 남의 몸의 진실도 소중한 줄 알아주는 것은 마음일밖에 없다는 것. 몸과 몸의 진실이 마음을 매개로 해서 비로소 사랑의 불꽃이 튕긴다는 것. 몸의 진실이 헬라적이라면, 마음의 진실인 사랑은 히브리적이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유럽에서 보는 제3세계는 어떤 것일까? 특히 아프리카는? 여유가 생기면 그쪽으로 눈을 돌리고 귀국 전에 아프리카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 황인종은 백인들보다도 원시적인 힘과 순수성에서 멀어져 있다. 우리는 그걸 찾아야 한다. 은숙의 성악 수련은 어떻게 되어 가는지?

 

1981. 12. 아빠

 

아버님, 집필이 취소되었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많은 것을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 달에 한 번 쓰는 이 편지에 알맹이는 다 들어 있으니까요. 오래 막혀있으면, 그만큼 터질 때, 강력한 것이 되기도 하구요. 아버님 준비하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들 드림.

 

성탄절을 앞두고 민주화와 민족통일이 우리 민족의 구원이라는 생각, 교회의 역할에 대한 생각 등을 표현. 친구 유관우의 소천에 대한 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