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기도, 민중의 기도

보라에게

 

(1월9일) 설을 쇠고 한 살 더 먹었겠구나. 오늘 아빠와 같이 왔었으면 네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바우가 떠나간 집안에서 네 재롱이 어른들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을 할머니 편지에서 알 수 있어서 정말정말 기뻤구나. 앞으로 일 년 동안 얼마나 크고 귀여워지고 슬기로워질지. 나가서 너를 안아 주고 네 재롱을 받을 날을 가슴 부풀리고 기다리고 있단다. 그날이 빨리 오게 해달라고 아빠, 엄마와 같이 기도해라. 엄마 미국 갔다 온 다음 한 번도 볼 수 없어서 그립구나. 2월에는 꼭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집 보라 꽃 새봄에 더욱 활짝 피어라. 

 

할머니 보라 꽃에게

 

그 어둠침침한 접견실에서 나와 방에 돌아와 얇은 속내복 아래위 한 벌만 남기고 그 위에 퍼런 관복을 입고 나가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한 시간 운동하고 들어와서, 요가를 좀 하고 나와서 난롯가에 앉아서 붓을 들었소.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 얼굴이 전에 없이 불그스레 혈색이 좋은데, 그것이 접견실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니 서운하군요. 당신의 얼굴도 거기서는 빛을 잃는구나 싶었소.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밝은 얼굴을 푸르뎅뎅하게 보여야 하는 접견실이 좀 원망스럽기까지 하달까.

공주에 와서 당신의 너무너무 정성 어린 글발 330장을 받음으로 1981년이 갔군요. 그림에 시가 담긴 330신으로 해서 1981년은 갔지만, 결코 가지 않고 사랑으로 차 넘실거리는, 끝이 안 보이는 바다로 영원히 남을 것이군요.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그윽한 마음의 바다로 길이 출렁이리라고 생각해요. 세월이란 결코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벅찬 마음으로, 온갖 애환이 엇갈리는 너무나 인간적인 마음으로 길이 출렁이며, 역사의 언덕을 치며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어떻게 지나가 버리는 세월을 잡아 마음을 채워 길이 남게 할 수 있는지, 그 길을 당신은 너무 분명하게 보여주었구려. 당신의 330신으로 1981년은 지나갔어도 영원히 아름답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구려. 물론 그 외에도 너무너무 수확이 컸던 것 같소. 그저 하느님께 감사해야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일이 감사할 뿐인데도, 또 금방 마음이 어두워지고, 답답해지고, 괴로워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사람인지도 모르겠군요.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우리 자신을 구유로써 확인해 보았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천해져야 한다는 말이 될 것 같군요. 12월 편지를 쓴 다음부터 줄곧 지금까지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은 어떻게 천하지 않게 천해지느냐는 것이오. 이철용 씨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지만, 당신이나 나에게 있는 귀족적인 것은 우리가 천하게 되는 것을 결정적으로 가로막는 것이라는 느낌이군요. 우리의 교회는 너무 세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는지? 나의 시도 훨씬 더 천해져야 할 텐데, 그것이 정말 가능할 것인지? “개똥 같은 내일이야” 한마디 정도 가지고서는 안 되지요.

 

아버님, 어머님께

 

(1월10일) 금년은 부득불 이중과세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음력설에나 세배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부디부디 건강한 가운데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과 함께 기차 타고 같이 고향에 갔다 오실 수 있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오늘 새벽에는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6시 30분에 엎드렸다가 또다시 두 분의 기도 소리가 낭랑히 들려와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냥 “아멘” 하고 일어나면서 무엇을 깨달았는지 아시겠습니까? 두 분이 성령의 탄식 소리로 내 속에서 기도를 올리면, 나는 그 기도를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그 기도가 나의 삶의 힘이요, 목적이요, 뜻이요, 삶 그것이라고. 나는 그 기도를 나의 삶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그러고 나니 주의 기도가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라기보다는 주님 자신의 기도로서, 우리는 그 기도를 살아야 한다는 것, 생으로 그의 기도를 그와 함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성령의 탄식 소리로 우리의 삶과 생명 속에서 드리시는 기도에 우리는 그냥 “아멘” 하면서 그대로 살 뿐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은혜로 넘치는 성일이 되겠습니다. 너무 감격스러워 아침 설거지가 끝나는 대로 이 느낌을 알려 드리고 싶어서 서둘러 붓을 들었습니다. 복된 성일이 되기를 빕니다.

우리의 생이 예수의 기도라고 할 때, 그것은 또한 민중의 기도라는 뜻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의 기도는 곧 민중의 애타는 염원의 표현이기 때문에.

큰아들 드림

 

또다시 할머니 보라 꽃에게

 

(1월 11일) 오늘 아침 의무과에 나가 체중을 달아 봤더니 놀랍게도 이틀 동안에 4.5~5 kg 불었군요. 아무리 계산해 봐도 그렇게 불만큼 먹은 것도 아닌데 말이오. 기현상이군요. 이제 정말 우유, 계란, 고기들을 먹지 않고 채식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 느낌이군요. 요가 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게 먹고도 충분히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군요. 사람의 몸이란 서양의 과학적인 의학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가 너무나 많은 것 같다는 것을 이렇게 나의 몸에서 느끼다니 감사할 뿐이오. 저번 접견 때도 말했듯이 희망이나 기쁨은 그 내용도 몸에 직결되어 있지만, 그것 자체가 뇌하수체와 편도선에 작용해서 사람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을 Readers Digest에서 읽고는, 희망이나 기쁨은 그것 자체로서 몸의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1월 13일) 희망의 내용이 아무리 나쁘고 하잘것없고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그것이 희망인 한, 그것은 우리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 대신 절망이란 몸을 죽이는 몸의 최대의 적인 거구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르케고르의 대명제는 그대로 몸의 진실이기도 한 것을 현대 의학은 기어코 밝혀낸 것이지요. 그런데 그 희망이라는 것들이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는 ‘죽음’ 때문에 모두 절망으로 끝나는, 희망이라고 믿고 안심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한편 모든 아름다운, 애타는 희망들을 부수어 버리는 절망도 있는 거요.

여기 갇혀 있는 재소자들이라고 희망이 없겠소?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밀려들 때의 희망들이 도시의 비정에 부서져서 떨어지는 곳이 바로 교도소라는 이름 좋은 곳이 아니겠소. 국제적으로 이 민족의 희망은 열강의 이권 쟁탈 행위에 눌려 박살이 나는 거구요.

남의 희망들을 부수고서야 성취되는 나의 희망은,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고 빛나는 것이라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구요. 무엇으로도 깨어지지 않는 희망은 예수와 함께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의 무덤인 죽음의 절망을 꺼지지 않는 뜨거운 염원만으로 폭발시킬 때에 비로소 거기서 빛으로 치솟는 것이라는 것이 저간의 나의 경험이었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일 뿐, 우리의 생은 예수와 함께 아직도 어둠과 절망 속을, 빛을 그리는 ‘잔디 씨 속의 완벽한 어두움’을 터뜨리는 염원으로 살아갈 뿐인 거죠. 저 나어린 재소자들의 암담한 절망 앞에서 내가 어떻게 혼자 기뻐할 수 있으리오. 오늘 새벽에 기도하다가 저 나어린 재소자들의 절망을 어떻게 좀 읊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지난번 접견 때 말한 비극적인 소설도 살인범을 소재로 하는 것이 될 거예요. (안)선호가 사주었다는 비극에 관한 책들을 읽어 보면 기독교인이 비극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 여기저기서 문제가 되어 있더군요. 소설이나 희곡이 죽음 이쪽의 인생을 그리는 것이라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철저한 비극을 못 그린다는 법이 없지 않을까 싶군요. 철저한 절망과 비극을 그리는 것은 그만큼 뜨겁게 희망과 기쁨을 열망하고 있다는 고백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겠소? 아, 전과자들의 암담한 절망 속에서 희망의 씨를 찾아내어 키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엇으로도 바스러지지 않는 우리의 희망이 되는 것일 텐데.

당분간 추위가 없으리라 더니, 어제오늘 꽤 추워졌군요. 그리고 이 추위가 당분간 계속된다지요? 그래도 난 이제 겨울이 하나도 무섭지 않게 되었소. 그동안은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담요를 깔고 담요를 덮고 그 위에 또 이불을 덮고 잤었는데, 지난밤부터 담요 위에 이불을 깔고 이불을 덮고 구 위에 담요를 덮고 잤더니 어찌나 뜨뜻한지 모르겠소. 역시 솜이 털보다 훨씬 방한과 보온에 좋군요. 우리 문익점 할아버지가 역사상에서는 한때 역적으로까지 몰렸지만, 그가 이 민족에게 준 혜택이 얼마나 컸었느냐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소. 솜옷 없이 살던 민족이 솜옷을 입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구체적인 생 속으로 스며드는 복음인 거죠.

아버님이 케일 씨를 봉투에 넣어서 다니시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선전하고 나누어 주시던 일, 지금 건강 증진 기계를 뭇 사람에게 제공하는 일, 당신의 몸을 의학 발전을 위해서 바치기로 유서를 남기시는 일 등이 다 문익점 할아버지의 피를 받은 마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뿌리를 내린 데서 나타나는 행동이라고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요새 실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가고 있지만, 함흥의 이제마 선생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 볼 수 없군요. 사실은 실학자들 가운데 그만큼 우리의 생활에 혜택을 준 사람이 없는데 말이오. 그는 국방에 관한 연구를 해서 진언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제에 관한 연구를 해보았으나, 이것도 거부되니까 국민 건강을 위해서 의학 공부를 하여 유명한 사상(四象) 의학을 발전시켜서 항구적인 공헌을 한 것이었지요. 사랑이란 이렇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거죠. 실학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이제마 선생을 실학 연구가들이 언급조차 않다니. 

운동 시간이 되어 나가서 꼬박 60분을 뛰고 들어와 한 주일에 한 번 하는 더운물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하고 계속하고 있소. 뛰는 동안에 당신의 금, 토요일 편지가 와서 반가웠어요. ‘남을 위해’라는 말을 뛰면서 생각하다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과 같이’라는 말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마의 학정 아래서 고생하는 겨레의 곁을 떠날 수 없어 같이 고난을 겪으실 수밖에 없으신 예수의 애타는 기도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아니겠소? 어제는 60분을 뛰고 그 길로 의무과에 가서 혈압을 쟀더니, 140-110 이어서 놀라더군요. 보통 한 시간 뛰었다면, 상당히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거든요. 조금 숨을 돌려서 다시 쟀더니 130-90으로 완전 정상이었소. 한 시간을 뛰고도 별로 숨이 차지 않고, 혈압도 그 정도밖에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심장이 얼마나 좋으냐는 것을 말해 주는 거겠죠. 지금 내 옆에서는 된장국이 구수한 맛을 풍기면서 끓고 있소. 당신이 신학교 1학년 때, 된장국 살이 토실토실 올랐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안(계희) 전도사가 만들어왔다는 만둣국 얼마나 맛이 있었을까? 내가 나가면 안 전도사 도시 만둣국 만들어 오라고 예약해 두구려. 김 목사님이 위궤양 수술을 하셨다니, 단식 치료를 하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오 목사님께 고맙다는 전화를 해 주시오. 

영주, 영희의 훤칠한 모습을 보니까, 정말 마음이 아프군요. 속히 재결합이 이루어지기를 빌 뿐이오. 호근이네도 영금이네도 어지간히들 바쁜가 보죠. 성탄절이 지나는데, 카드 한 장 못 보내는 걸 보니까. 카드는 못 받아도 바쁘게 바쁘게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지요. 바우는 목 하나 더 컸다는군요. 두 할머니가 그렇게 지성껏 봐주셨어요. 제 애비, 에미 곁에 가자마자 그렇게 쑥 자랐다는 것은 제가 얼마나 애비, 에미를 그리워하고 있었느냐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아니겠소? 너무나 눈물겨운 이야기군요. 

저녁 배식이 되는군요. 모래쯤부터는 밥만은 관식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요. 아버님, 어머님, 건강하시다니, 정말 감사할 뿐.     이만.

 

또다시 할머니 보라 꽃에게

 

(1월 15일) 그까짓 일 가지고 그렇게 자학하다니. 나가면 업고 다녀야겠다고 입버릇처럼 교도관들에게 말할 정도로 당신의 지성,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극진한 사랑에 거의 압도당해 있는데도. 오늘 새벽에는 우리가 평양에 가 있는데 당신이 납치당했다고 해서 갈팡질팡 허둥대며 헤매는 꿈을 꾸었군요. 어제는 동환에게서 신년 카드가 왔소. 유럽은 혹한이 밀어 닥쳤다는 소문인데, 바우는 괜찮은가 몰라, 좀 걱정이 되는군요. 나는 갑자기 체중이 너무 불어서 요새는 맹렬히 한 시간씩 뛰는데, 그동안 2kg 정도 줄일 수 있었소. 그런데 어제, 오늘 한 시간을 그야말로 맹렬히 뛰고 나서 곧 혈압을 쟀는데 똑같이 120-80이라니, 도대체 내 몸은 요새 어찌 된 영문인지 그냥 어리벙벙할 뿐이오. 수요일 저녁부터 관식 밥으로 완전히 복구하였는데, 소화는 완벽해요. 오늘 저녁에는 된장국에 두부를 썰어 넣어서 먹을 거로구만요. 내주쯤엔 계란 반숙을 하루 하나 정도 시험해 보려고 하지요. 단식 후에 일체 약을 먹어서는 안 되는데, 영양제도 금물인지 전문가에게 문의해서 알려 주시오. 당신의 사랑

 

영미에게

 

글로 그림을 그리려다 보면 화가가 부럽기 그지없었는데, 너는 내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화가가 되었구나. 그러나 네가 화가가 되는 데 내가 작은 영향이라도 끼쳤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아마 내가 화가를 몹시 부러워했기 때문인지 모르지. 화가도 사람의 내면을 그리려면 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좀 부러울걸. 내가 화가인 너에게 영향을 주었다면, 앞으로는 네가 그림으로 나를 자극할 차례구나.

보내준 그림 두 장은 벽에 붙여 놓고 늘 감상하고 있다. 사람의 복잡 미묘한 내면을 화폭에 올리면 이렇게도 되는구나 하면서 무언가 느끼려고 하는데, 좀 더 시간을 들여 감상해야 하겠지만 현재 내 느낌으로는 좀 더 자유분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보라색을 많이 써서 그런지 상당히 이색적인 느낌이 드는 그림이라고 느끼고 있다. 수채화를 한 장 보내 주었으면 정말 고맙겠다. 어제 신년 카드를 받고 기뻤다. 크리스마스인데 카드 한 장 안 보내 준다고 조금은 노여웠는데, 이제 다 풀렸다. 아빠 엄마가 얼마나 바쁜지 알고도 남는다. 아빠 책 쓰는 것은 어찌 되어가는지 모르겠구나. 창근, 태근의 이름이 없는 걸 보니까 여자친구를 찾아 뉴욕으로 갔나 보지? 네 편지는 정말 마음이 담겨 있는 편지였다. 그런 편지는 받고, 또 받고 싶다. 영어투가 된 한국말이 한두 군데 눈에 띄기는 하지만, 우리 말을 어쩌면 그렇게 잘 썼나 싶어서 흐뭇했다. 영혜 피아노도 이제 많이 발전했겠지. 영혜가 영어를 재잘거리는 소리 좀 들어보고 싶구나.  키는 얼마나 컸는지. 나를 생각하면서 212장을 같이 큰 소리로 불러다오. 

Be Happy, all of you.  Big Uncle.

영주, 영희에게, 이 큰아버지에게 한 번 안겨보지도 못하고 다 커버렸구나. 아빠 엄마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라. 하느님께서 너희의 기도는 꼭 들어주실 거야. 큰엄마 7월에 가면 만나 보겠지. 이쁘게 이쁘게 커라.

큰 아버지.

 

부모님과 함께 기도하다가 주의 기도가 주님 자신의 기도로서, 우리는 그 기도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얘기, 희망과 절망에 대한 생각, 조카 영미가 보내준 그림에 대한 고마움등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