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누룩으로서 계시된 ‘셋째 교회’

바우야

 

오랜만에 돌아오니 얼마나 좋으냐? 큰할아버지, 두 할머니의 사랑을 받는 하루하루 얼마나 즐거우냐? 이 작은 할아버지는 여기서 너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너도 컸지만, 보라도 많이 컸지? 나는 네가 보라 손을 잡고 오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런 노래를 불러 보았다. 

 

바우는 보라를 사랑하고

보라는 바우를 사랑하고

할아버지는 바우와 보라의 사랑이 그립고

하늘은 괜히 서러워 긴긴밤을 이 그리움에 하염없이 비를 뿜고

땅은 숨죽여 내리는 밤비를 가슴에 받아

목련꽃 웃음을 온몸에 달고 벌떡 일어서

찬란한 새날을 맞이하고.

 

지금도 눈만 감으면 서대문 구치소에서 들려주던 너의 목련꽃 웃음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온단다.

영미야

 

너를 안아 보지는 못했어도, 네가 그려 준 해바라기 그림으로 너는 하루 24시간 내 방에 나와 같이 있다. 그 그림이 벽에 붙으니까 다른 그림들이 모두 빛을 잃어버렸구나. 진짜 예술이란 이렇게 찬란한 것이라는 느낌이다. 앞으로 해바라기를 많이 그려 보아라. 햇빛에 불타는 고흐의 밀밭 같은 해바라기밭 그림이 네 손으로 그려질 날을 기다려 보고 싶구나. 밀밭은 온몸으로 타지만 해바라기밭에는 울고 웃고 한숨짓고 사랑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얼굴들이 있어서 또 다른 세계가 될 것 같구나. 꽃들 가운데서도 해바라기는 사람의 얼굴이 있어서 좋구나.

모든 예술은 음악의 경지를 지향한다지만, 나는 네 그림을 보다가 모든 예술은 그림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은 그지없이 슬프거나 기쁠 때, 주저앉을 정도로 놀랍고 아름다운 것을 만날 때, 숨이 멎어 버리지. 아무 소리도, 말도 나오기 전 숨이 멎은 경지, 표정과 몸짓만이 있는 상태, 거기서 모든 예술의 싹이 돋는다면, 그것이 미술의 세계가 아닐까? 나는 그림이 없는 시를 생각할 수가 없다. 시란 말로 그림을 그리는 거지. 너는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해바라기를 많이 그려라. 해바라기와 함께 네 예술이 피어날 것 같은 느낌이니까. 그리고 시를 많이 읽어라. 좋은 음악을 듣는 것도 좋겠지.

나는 이런 글을 읽은 일이 있다. 어떤 교향악 지휘자는 연주 전날이면 온종일 미술관에 들어가서 좋은 그림을 보고 나온다는 거야. 시인은 관념화될 위험성이 있다면, 화가는 보이는 대상에 매일 위험이 있지 않을까? 화가를 거기서 건져 주는 것은 서정성(Lyricism)일 것이기 때문에 시를 많이 읽는 것이 좋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봄길에게

 

벌써 서늘한 9월이군요. 당신 이제 땀을 덜 흘려도 되겠군요. 나의 건강은 접견 날 당신이 직접 확인해 주시오. 8·15 해방절 주일을 어떻게 지냈느냐 물었지요? 분단 37년의 슬픈 민족사, 앞으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수난사, 또다시 일본놈들에게 수모를 받는 것을 생각하면 밥이 목을 넘어갈 것 같지 않아 또 금식 기도를 시작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통일을 약속해 주는 꿈을 두 번씩이나 받은 것을 생각하고, 다시 단식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면 오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기로 하고 명상하는데, 정말 오래오래 기다리던 229장의 새 가사가 오는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그날은 또 하루 감사와 기쁨으로 넘치는 날이 되었어요.

 

1절: 잡는 손 마다하고 돌아서 왔건만, 내 님은 마다않고 찾아와 주셨네. 

이 굳게 닫힌 가슴 열어야 합니까? 문 두드리는 소리 내 넋을 흔드네. 

2절: 나 혼자 한 세상을 오붓이 살자고, 내 님을 뿌리치고 도망쳐 왔건만, 

손발이 찢어지며 가슴이 터지며 뒤쫓아오신 님을 나 어찌 내치랴. 

3절: 아득한 그 마음씨 아프게 울려와, 닫힌 문 활짝 열고 맞아들입니다. 

이 옹졸한 마음에 풀빛이 어려와 고운 정 키우면서 향기를 날리리.

 

여기서 임이란 한용운 스님의 임과도 통하는 거죠. 우리에게 있어선 임은 예수님이지만, 그 예수님은 고생하는 이웃이요 겨레인 거구요. 그들 속에서 신음하는 조국이구요. 나는 그동안 같이 갇혀 있는 죄수들의 암담한 가슴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초조했었는데, 이 가사를 얻고 보니까,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군요. 그들이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데,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열어 주지 않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셈이지요. 겨레는 통일의 문을 애타게 두드리는데, 그 문을 열지 않고 꾸물거리는 것이 나 자신같이만 느껴지기도 하구요. 정말, 그저께 당신 생일에는 닭고기가 나오는 날이어서 당신 생일을 잘 쇤 셈이었어요. 그날 접견 오지 않나 기다렸는데.

 

어머님

 

소녀티가 완연한 의젓한 보라를 무릎에 앉히시고 생신 케이크를 받으신 아버님은 흐뭇하신가 본데, 어머님은 좀 서운하신 표정이군요. 케이크 촛불은 아버님 대신에 어머님이 끄시는군요. 할아버지, 할머니 세 분이라 마음 든든한데, 보라도 흡족한 표정이어서 정말 좋습니다. 바우가 와서 얼마나 좋으세요? 조금은 시기가 납니다.

얼마 전 고린도전서 13장을 읽다가 또다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에 되게 한방 가슴을 얻어맞은 것 같아서 속으로 어머님께 이런 말을 중얼거려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눈을 감고 입을 꼭 다물고 새파랗게 굳어 버린 송장이 되는 거죠. 이제 곧 썩어 냄새날 송장 말이에요. 그러나 내게는 돌아갈 데가 있군요. 뼈까지 다 썩어 오로지 한 줌 흙으로 남아 어머니의 가슴에 묻히는 거죠. 어머니의 가슴은 나를 거절할 수 없거든요. 비록 내게는 사랑이 없지만, 어머니의 사랑으로, 아, 오직 어머니의 사랑으로 봐주는 이도 없는 한 송이 서러운 진달래라도 피울 마음이야 어찌 제겐 들 없겠습니까?

좀 사위스러운 말이지만 사랑의 감격을 이렇게라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지없는 슬픔으로 경험되던 사랑이, 그래서 사랑이 사랑으로 좀처럼 느껴지지 않던 것이 이제 차츰 기쁨으로, 그냥 감격으로라고 하는 말이 나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좀 아프게 살갗을 찢으면서 돋아난 표현을 강하게 요구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다시 8월 22일, 주일 찬송가 가사로서 표현을 얻었습니다.

 

1절: 어디로 가서 사랑을 숨 쉬며 살 수 있을까? 바다는 깊고 푸른데, 하늘은 높고 맑은데, 

잎새에 이는 바람에 나비는 춤을 추는데, 어디로 가서 사랑을 숨 쉬며 살 수 있을까?

2절: 공기가 없인 살아도 사랑이 없인 못 살아. 숨 막힌 이 몸 불질러 두 손을 모아 빕니다. 

막혔던 숨통 터지게 사랑의 숨결 주소서. 민들레 웃음 날리며 하늘을 노래하오리.

3절: 햇빛이 없인 살아도 사랑이 없인 못 살아, 애타는 이 맘 쏟아서 두 손을 모아 빕니다. 

잔디씨 같은 사랑을 이 땅에 뿌려 주소서. 봄비가 내려 적시면 고맙게 돋아나오리.

4절: 사랑의 품에 안기어 마음을 주고받으며 담장을 헐어버려라. 형제가 따로 없어라.

바다는 정말 깊구나. 하늘은 정말 맑구나. 앞뒤를 불러보아라. 여기가 천국 아닌가?

 

362장 곡에 맞추어 부릅니다. 이 찬송을 부르면 제가 지금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조금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감정적인 요소가 강해서 어떤 기분으로 멎어 버릴 위험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기분이나 즐기는 안이한 감정을 깨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야말로 전부를 투입하는 일인데, 그게 그리 쉬운 일입니까?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우리 앞을 가로막는 절벽과도 같은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기보다는 뭇 사람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있군요. 바라기는 그 사랑들이 제 몸속에 깊이 스며들어 저의 생에서도 우람한 사랑의 나무로 자라 주기를 빌 뿐입니다. 은숙이 온 다음에 접견 오시지 않나 하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 막 받은 편지에 내일 오신다기에 내일 접견한 후에 계속하겠습니다. 내일 바우를 안아 보겠다 싶어 벌써 기분이 다 이상합니다.

 

(9월5일) 바우가 시종 맑은 목소리로 접견장을 밝게 해주어서 지금도 기쁩니다. 어머님이 앞서가신 이들을 생각해서 어머님 몸을 천대하시면, 저희도 어머님 생각해서 또 먹을 것 못 먹고 우리의 몸을 천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들도 어머님이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시는 것이 기쁘실 거고, 더 오래 건강히 지내실 걸 바라고 계실 것이 아닙니까? 어머님의 건강은 곧 조국의 건강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버님

 

여전히 씩씩하신 아버님의 모습 흐뭇했습니다. 섣불리 요가를 하지 마세요. 서툴게 하시다가 혈압만 높아지기 쉬우니까요. 혈압을 누를 수 있을 정도가 되기까지 저도 많은 수련을 쌓아야 했습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건강해지겠다는 욕심까지 버리니까 여유가 생기고 요가가 제대로 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야 요가의 출발이 무욕(無慾)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라는 것이 ‘평화’의 최대의 적이거든요.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고, 몸과 마음의 하나 됨을 깨뜨리고, 가정과 사회의 평화도 깨뜨리는 거죠. 이렇게 저는 요가를 평화에 이르는 길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무욕은 함(석헌)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무위(無爲)와 통하면서도 그보다 적극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가는 정신 통일하는 일이라고 인도에서는 생각되어 왔습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념무상의 경지라고 생각하고 있구요. 그런데 저는 무슨 생각이나 물리치지 말고 하라고 합니다. 다만 무욕의 상태에서 하는 생각은 다 좋은 생각이요, 다 평화에 이르는, 평화의 씨앗이 들어 있는 생각이거든요. 평화의 누룩은 무욕에서 번져 나간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함 선생님은 무위를 말씀하시면서도 실상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들이 다 좋았던 것은 그는 무욕이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평화의 누룩으로서 계시된 ‘셋째 교회’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절망과 허무로 덮쳐 오는 하느님의 마음, 슬픔으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하느님의 마음이 제 마음 밭에서 어떤 풀잎으로 움이 돋을 건가 하고 오래오래 기다렸습니다. 저의 기도란 이 기다림이었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민들레 한 포기로 돋아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제 뜻, 제 과제가 된 거죠. 오늘 여기서 저의 구체적인 뜻이 된 거죠. 성경에서는 그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지만, 하느님은 오직 우리에게 슬픈 마음으로 오실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뜻은 구체적이요 일회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마음은 영원합니다. 보편적이기도 하구요. 적어도 한국말에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제3 교회의 계시를 받은 후 꼭 열한 달 만인 아버님 생신에 저는 아버님을 생각하다가 평화의 누룩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아버님의 마음을 통해서 오는 하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버님이 용정 중앙 교회 목사로 오셔서 동만(東滿) 노회(老會)의 기둥이 되시기 전까지, 동만 노회는 모이면 싸움이었습니다. 최대진 목사는 그야말로 오로지 싸움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 같았습니다. 동만 노회에 팽배해 있던 민족애를 깨뜨리려고 일제가 특파한 사람이 아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그 싸움이 아버님이 오시면서 싹 가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저는 평화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는 화해의 원동력이요, 내용이요,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적대감의 해소에 강조점이 있는 화해를 생각해 왔었습니다. 민주화도 민족 화해요, 통일도 민족 화해라고. 이렇게 민족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던 저의 관심이 평화의 문제와 함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평화가 세계 4강의 힘의 부딪힘에 언제 깨질지 모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남의 나라를 한 번도 침략한 일 없이 몇천 년을 살아온 평화 애호국인 한국이 언제 세계 평화를 깨뜨릴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었다는 사실이 몸서리쳐지게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평화는 세계 평화와, 세계 평화는 우리의 평화와 끊을 수 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 열강이 보유하고 있는 핵폭탄이 전 세계 인구 1인당 3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열강은 더 우수한 성능을 갖춘 무기 생산에 혈안이 되어 지구의 자원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광기(狂氣)요 죄악입니다. 교회는 세계의 이성으로서 이 광기를 제치고 인류의 양심으로서 이 죄악을 고백하고, 이 무서운 무력 경쟁에 투입, 소모되는 자원을 늘어만 가는 기아 인구 구호에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날 새벽에 울려 퍼진 ‘땅엔 평화’의 소식을 현실화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처럼 외국 군대가 들어와서 맞붙는 일이 이 땅에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구요. 더더욱 우리끼리 찔러 죽이는 6·25와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요. 이것은 우리의 비극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류 비극의 불씨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의 평화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평화야말로 우리의 사활을 결정하는 생명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는 결코 정치나 경제에 멎는 것이 아닌 훨씬 깊은 데서부터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인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욕심에서 발동하는 인간의 공격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무서운 것은 선악을 이데올로기로 휘두르는 욕심인 것 같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이라고, 나에게 나쁜 것은 모든 사람에게 나쁜 것이라고 신적인 권위를 부리는 욕심에서 아벨을 죽이는 카인의 공격성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모든 동물 가운데 동류를 찢어발기는 것은 잿빛 쥐와 사람뿐이라는 것이 어떤 동물학자의 연구에서 드러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원죄는 생물학적인 유전학과도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근원적인 악은 마르크스가 생각하듯 생산과 분배의 균등이라는 경제적인 해결책만으로는 제거될 수 없지요. 그 실례가 오늘 우리가 보는 공산주의 국가들이지요. 그렇다고 민주주의라는 정치적인 처방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평화는 깊이 종교적인 데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모든 종교가 협력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선 소련, 동구를 포함하는 소위 기독교권이 공격성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세계 평화의 반은 이루어지는 거죠. 세계의 한 구석인 한국에서 이런 말을 해보았자, 이건 달려드는 탱크를 막아 보려는 개미의 무모한 몸부림밖에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무에 빠집니다. 이것은 곧 하느님의 허무인 거죠. 그러나 그 자리, 곧 하느님의 허무가 우리가 일어설 자리요, 출발점이요, 용기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절망, 하느님의 허무를 건지는 것, 곧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의 슬픔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의 슬픔이 있는 한, 우리의 절망과 허무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힘을 우리는 콘스탄틴 대제 이전의 기독교, 곧 신약의 기독교에서 볼 수 있지요. 그때의 기독교는 죽으면서 로마의 공격성을 물리치고, 위장되고 강요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 속에 참 평화를 침투시킨 것입니다. 소리 없이 녹아 깊이 스며들면서 평화의 희망을 부풀리는 일을 제쳐 놓고, 오늘의 기독교는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안(병무) 박사의 말대로 평화란 평화를 향해서 걸어 나가는 길 위에서 경험할 뿐일지는 몰라도, 그것이 우리의 생명인 한,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평화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제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의도, 자유도, 사랑도, 평등도,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민족도, 심지어 국방까지도 평화를 유지하고 이룩하기 위한 것일 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국방도 6·25와 같은 비극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막기 위한 것일 때에만 정당성이 인정된다는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평화적인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거죠.

평화와 민족주의의 관계를 빠뜨릴 뻔했습니다. 제2차 대전 이후로 세계는 치열한 민족주의의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 퍽 중요한 일입니다. 민족 하나하나의 자유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유지되는 세계 평화는, 로마의 평화처럼 약소민족들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유지되는 위장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도 민족주의로밖에는 해결될 전망이 없습니다. 일본의 침략 근성이 그 마각을 드러낸 이 마당에선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주의가 세계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중동이 바로 그 좋은 예라고 하겠지요. 그 이유는 약소국들이 강대국들의 무력 경쟁에 휘말려 들었기 때문이지요. 뱁새가 황새 흉내를 내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약소국들은 강대국들 이권의 각축장이 되지 않고 강대국들 충돌의 도화선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약소국끼리 사이좋게 협력해서 같이 일어서면서 평화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서 강대국들을 평화로 유도해야 합니다. 금번 전 대통령의 아프리카 방문이 이에 이바지하는 것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며칠 전에 장효문의 서사시 「전봉준」을 읽었습니다. 우금치 고개가 5 km 거리에 있는 여기서 읽으니 더욱 감개가 깊습니다. 저는 그걸 읽으면서 그때 전 장군과 같이 일어났던 농민들의 가슴에서 불타고 있던 것은 바로 평화에 대한 열망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열망이 일본의 군국주의에 분쇄됨으로써 결국 아시아의 평화, 세계 평화가 깨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결코 재현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평화의 누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북간도의 교회가 두만강을 건너 이북 땅에 평화를 누룩으로 퍼뜨릴 수 있기를 빌면서. 이런 거대한 과제를 앞에 놓고 우리는 다만 기도할밖에 없이 되는군요.

 

성근이 무대에 서는 연극, 호근이 연출하는 오페라를 가볼 수 없어 유감 천만이지만, 여기서 박수를 보낸다. 읽고 싶은 책 목록을 적을 지면이 없는데, 「한국 전쟁」이라는 책이라도 한 권 보내주면 좋겠다. 

 

1982.9.

 

평화와 화해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