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가 가르쳐준 기독교 신앙

당신에게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 대 되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군요.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11년 전에 산중고혼이 된 장준하의 넋 앞에 마음을 굳게 다짐하면서 오늘의 나의 글을 쓰기로 했소.

장 형, 그에게는 민족이 전부였소. 그에게 있어서 민족에 우선하는 것이 있을 수 없었지요. 그의 생의 거점인 기독교 신앙도. 이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장 형이었소.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생의 자세요, 역사의 밑거름이었다고 해야 하겠지요. 전혀 땅 위에 드러나지 않는 나무의 뿌리라고 해도 되겠지요. 

기독교인으로서 무엇도 민족에 우선할 수 없다는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마저 민족에 예속시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기독교의 신앙이나 복음은 민족의 장벽, 국경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니까요. 그런데 장 형은 나에게 그 말을 왜 해야 하느냐는 것을 가르쳐 주었군요.

기독교 신앙,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소?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대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 가는 사람, 헐벗고 얼어 죽어 가는 사람, 병들었는데 돈이 없어 치료도 못 받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억울하게 갇혀서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존과 자유를 되찾아 주는 일 아니겠소?

그러므로 최고의 가치는 사람의 생명인 거죠. 그 외의 아무리 가치 있는 것도 생명에 우선할 때, 그것은 곧 우상이 되는 것이요, 관념이 되고 마는 거죠. 오늘 우리가 지금 아무것도 민족에 우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오늘 이 땅에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요, 복음을 실천하는 일인 거죠. 오늘 이 민족의 생존과 자주를 세우는 길이 바로 일본의 재침략을 막음으로써,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을 침략 전쟁의 참화에서 막는 일도 되는 것이거든요. 민족 문제를 바로 풀고 바로잡는 일이 바로 우리가 사는 길인 동시에 세계 평화의 한구석이 무너지는 걸 막는 일인 거지요.

우울한 며칠을 보내는데도 나에게는 기쁨을 주는 일이 마련되어 있었소. 요새는 비둘기뿐만 아니라 참새들까지 내 창턱에 올라와서 지저귀게 되었다오. 어제 저녁에는 참새들에다가 비둘기까지 한 쉰 마리가 내 창 앞에서 북적대니까 쥐가 감히 나오지를 못하는 것 아니겠소. 정말 쾌재를 불렀다오. 쥐들이 쥐구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가는 쏙 들어가곤 하는 걸 보면서. 

이만하면 내 마음도 꽤 진정되어 있는 것 아니겠소. 젊은이들에게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펴고 나가자고 하던 말을 나 자신에게 들려주면서, 이 편지를 서둘러 끝내려오. 내일 또다시 만납시다.

 

1986. 8. 18. 늦봄

 

해방절을 우울하게 보내다가 먼저 간 친구 장준하를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추수리며 그가 가르쳐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