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함께 자라는 인생

당신께 

 

전주에서는 거의 아침마다 쳐다보던 샛별이 오늘 아침에는 또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소. 그래도 이 민족의 양심은 샛별처럼 점점 더 밝게 빛나고 있으니 다행이지요. 양심선언이 이 민족사에서 얼마나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느냐는 것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닐까요? 어젯밤에는 송건호 선생의 12년 회고담을 담담하게 읽었는데, 그의 글에서도 양심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더군요. 쫓겨난 기자들이 어떤 불안 속에 빠져 허우적댔느냐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소. 현기증을 일으켜 쓰러질 정도라면 그게 얼마나 심각하냐는 걸 알고도 남는 일 아니겠소? 그런 불안 속에서도 모든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며 살아온 걸 지성적인 양심이라고 하는 거죠.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이성이라는 말이나 지성이라는 말이 양심과 동의어로 사용된 걸 알 수 있더군요.

그걸 보면서, 양심이란 변절하기 쉬운, 변절하면서도 그 변절을 그럴듯하게 정당화하는 기막힌 능력을 가진 이성이나 지성을 쓰러지지 않게 떠받들어 주는 힘이라는 걸 알 수 있었소. 이성이나 지성의 참모습을 흐리지 않게, 그래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맑음이요 날카로움이 곧 양심이군요. 그러나 날카로움만이 아니군요. 그 판단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도, 유혹의 손길도 뿌리치고,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용기요, 배짱이요, 어리석음인 거군요. 의지라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이성이나 지성이 양심이 아니듯이 의지가 곧 양심인 건 아니지요.

남이야 살든 죽든 저 하나 좋으면 다라는 생각으로 밀고 가는 의지의 힘이 얼마나 무서우냐는 걸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있지 않아요? 그러고 보면 양심이란 의지를 바로 세워주는 힘도 되는 거군요. 양심으로 선 의지만이 의지의 구실을 제대로 하는 거니까요.

이성이나 의지가 제구실을 한다는 건 무얼 말하는가요? 그건 한마디로 모든 일을 나 좋을 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송건호 선생 같은 분의 지성의 양심은 곧 언론 자유 아니겠어요? 누구를 위한 언론 자유지요? 자신들을 위한? 아니지요. 겨레를 위한 거지요. 외곬으로 그 외로운 길을 12년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의지는 또 누구를 위한? 그것도 겨레를 위한 것이지요.

물론 자기들 자신을 위한다는 면이 없는 건 아니지요. 자기들의 이름이 역사에 더러운 기록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이런 동기만으로 지조를 지킬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지요. 그러고 보면 양심에는 사회성을 띤 사랑의 동기가 있군요. 칸트의 도덕률을 양심이라고 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었소. 그것이 바로 칸트의 관념 철학의 한계인 거죠. 양심이 참 양심이 되려면, 그건 사회성을 띠지 않으면 안 되는 동시에 그 속에 사랑의 동기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소? 이걸 뒤집어 놓으면, 사랑이 사회성을 띤 참사랑이 되려면, 언제나 양심의 맑음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사랑은 맑은 마음, 맑은 양심과 순수한 신앙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써 보냈군요(딤전 1:8).

사랑을 이성이나 의지에서 분리해 생각할 수 없지만, 사랑에는 감정의 면이 강한 것 아니겠소? 헬라인들은 인간을 지·정·의로 나누어 보는데, 이 셋이 다 양심이 맑음으로써만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이 셋이 제구실을 하려면 셋이 셋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야 하거든요. 셋이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로 움직일 때라야 우리는 옹근 사람이 되는 거거든요. 그러고 보면, 양심이란 지·정·의를 하나로 통일하는 힘이요, 사람을 통일된 인격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해야겠군요.

동주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면서 살아갈 때, 그 다짐을 하고 그 다짐으로 살다가 죽은 동주는 그대로 양심인 거지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 거울 앞에서 너나없이 마음가짐, 몸가짐을 바로잡는 것 아닙니까?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으려고 살다가 간 장준하가 또 하나 다른 민족의 양심이요, 우리의 거울인 거죠. 오늘은 이만, 내일 계속하겠소.

 

1986. 12. 12.

 

[12월 13]

영미에게

 

인생은 고민과 함께 자라는 거다. 고민과 함께 깊어지는 거고 넓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정신을 잃지 않고 자기에게 배당된 나만의 구석을 찾아 살아간다는 일이 인생의 보람 아니겠니? 네가 지금 겪고 있는 자기 상실에서 오는 허전함, 그걸 염려해서 그림을 그리라고 내가 네게 권했던 거다. 그러나 그건 결코 오늘의 역사가 네가 지금 서 있는 그 역사적인 자리에서 후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지. 판화를 시작한 것은 썩 잘한 일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잃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네가 진정 벗어 버려야 할 개인주의다. 자기를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니다. 자신을 완전히 불살라 버리는 것이 인생을 가장 완벽하게, 한 점 후회 없이 사는 일이다. 이것이 너더러 분신자살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 테지. 요는 오늘 여기서 어떻게 나의 전부를 투입해서 사느냐는 거지. 살아 버리느냐는 거지. 내가 보기에 네게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닐까 싶었던 거다. 하종오라는 기막힌 시인이 있다. 그의 최근 시집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하고』를 사서 보아라. 그의 시들에서도 영감이 오겠지만, 그 표지의 판화, 아무리 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볼수록 가슴이 찌릿찌릿 울려서 난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곤 한다. 백인 신랑 얼굴이 없다는 거지? 그 얼굴이 차라리 암흑이었으면 어땠을까?

속마음의 소리를 따라 산다, 그것이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냐고 했는데, 여기도 개인주의적인, 또 주관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느니라. 그래서 나는 ‘땅의 양심’, ‘밥알들의 양심’을 말하고 있는 거란다. 서울에서부터 양심에 관해서 쓰고 있는데, 큰엄마한테 가서 읽어 보아라. 양심이란 개인적이요, 주관적인 목소리가 그 틀에서 벗어나려면, 굶으면 배고프다는 보편적인 몸의 진실이 내재화하는 데서 가능해지는 거다. 나의 생이 송두리째 이 몸의 진실로 화할 때 비로소 나의 목소리가 양심의 소리가 되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의 살 속, 뼛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인 거고.

양심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과정에서 배우는 거라는 네 말에는 문제가 있다. 무언가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네 친구들의 생을 밀고 가는 힘이라고 했지? 그게 양심인데, 지금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옳은 일은 시대와 환경과 전통 등에 제약을 받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인 일회성을 가진 거다. 일회성은 절대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상대성을 의미하는 거지. 오늘 여기서 저 보편적인 진실을 구체적으로 이루는 일이 무엇이냐는 데 이르면, 사람들의 견해가 같다는 거지. 배고파서 우는 아기의 울음소리, 그 소리를 듣고 뛰어와서 젖을 물리는 엄마의 마음. 이것이 양심의 뿌리라면 그것은 타고난 거지,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양심이 오늘의 복잡한 역사적·사회적 현실에서 나침반 구실을 하려면, 정말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특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서.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게 양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어 버렸구나. 특히 전자계산기가 생기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구나.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도 이미 전자계산기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는데, 그건 양심하고는 번지수가 다른 것 아니니? 양심적인 사람이나 양심이 개차반 같은 사람이나 상관하지 않고 컴퓨터는 넣어 주는 데이터에 대한 답변은 같은 거거든. 그러고 그 과학이라는 게 세계를 지배하는 백인들의 수중에서 조종되고 있거든. 모든 학문은 백인들의 기득권 수호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권익의 문제이지 양심의 문제는 아니거든.

이렇게 양심은 현대 과학의 목적이나 방법론의 견지에서 끼어들 틈이 없는 것,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 것 아니겠니? 양심의 통제에서 벗어난 과학, 정치, 경제가 오늘 인류를 무섭게 위협하고 있는 것 아니겠니? 지구촌이 몽땅 망하게 되었거든. 그래서 역사의 변두리로 밀려났던 양심의 소리에 사람들이 다시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거 아니겠니? 그 첫 사람이 아마 원자폭탄의 이론을 개척한 아인슈타인이요, 둘째가 그 이론으로 원자탄을 만들어 낸 오펜하이머일 거고. 정치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날카로운 양심의 비판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해야 하겠지. 그러나 과연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인류는 양심의 굴레를 씌울 수 있을 건가? 엄청난 문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만이 인류를 총파멸에서 구하는 길인 데는 별수가 없는 일 아니겠니?

네 마음의 기둥을 잃고 허둥대는 일에 대해서는 길게 쓸 지면도 없지만 쓸 생각도 없다. 나는 네가 그걸 이겨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떻게’의 길도 네가 능히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열심히 살아라.

 

큰아버지 씀

 

어머님

 

요새 너무 무리하시나 봐요. 집에서 쉬시며 저희를 위해서 고요히 기도로 힘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들을 너무 처량하게 만들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여기 큰아들이 이렇게 건재한데, 마음 탁 놓으시고 든든한 심정으로 기다려 주세요.

정말 희망찬 성탄 맞이하소서. 어머니께는 땅의 평화 외에 마음의 평화도 빌겠습니다.

 

큰아들 드림

 

 

아내에게는 송건호선생의 글을 읽고 생각한 양심, 이성, 지성, 의지등에 대한 생각을, 조카 영미에게는 인생을 어떻게 완벽하게, 후회없이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