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오늘 박 목사, 김상근 총무, 윤기석 목사가 와서 얼마나 반가웠고 얼마나 격려를 받았는지 모르겠군요. 기장은 그 엄청난 충격을 견디어내고 통일을 향한 자세가 섰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경북노회와 제주노회만이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지만, 경북노회 교사위원회는 박 목사를 강사로 지지대회를 열었다니.
난 어제부터 시사적인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고은의 만인보(萬人譜)와는 성격이 다른 만일보(萬日譜)라고나 할지. 乞 期待! 빗소리를 들으며 두 동생에게 나머지 지면을 넘기도록 하겠어요.
박형규 목사
박 목사가 늘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니까 동생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회고해 보면 김구 선생 다음 세대의 통일운동은 장준하, 박형규, 백기완, 이렇게 셋이 총대를 메고 나섰던 것 아니오? 장준하가 비운으로 가고 난 자리에 내가 들어섬으로써 다시 삼총사 팀이 형성된 것 아닐까요? 그 셋 중에 제일 늦게 뛰어들었으면서도 나이가 제일 많다 보니 과분하게 두 사람에게 형님 칭호를 듣게 되었죠. 나의 방북을 넌지시 암시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과 백기완이었다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해야겠군요.
저번 날 계(훈제) 선생한테 편지를 쓰면서 내가 평양 행을 결심한 것은 88년 6월 10일이었다고 했지요. 그러나 그보다 5년 전인 83년, 아버님이 혼수상태에서 “평양은 아직 멀었지?” 하며 헛소리를 하시던 소리가 나의 귓전을 떠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죠.
그리고 86년 5월 20일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하여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친 지 한 달도 못 되어 이동수 군이 내 눈앞에서 활활 타는 불길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 후로 학생들에게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싸워 달라고 호소해 보았지만 막무가내더군요. 죽지 않고 살아서 싸워야 한다고 외치던 사람으로서 죽음으로 죽지 말라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 그러던 차에 6월 10일 학생들의 판문점행이 깨지는 걸 보면서 결심하게 된 거요. 젊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을 막는 길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물론 분단 50년을 넘기는 민족적인 치욕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분단 50년을 넘기지 말자는 생각은 남북 기독교 지도자들이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삼기로 결의한 데서 받은 영감이었구요. 나는 금년 봄 대학에 가서 신입생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89학번들, 여러분은 분단 조국에서 졸업장을 받지 말자구. 여러분은 통일 조국에서 졸업장을 받자구” 이렇게 외쳤다오. 박수도 많이 받았죠. 김 추기경은 ‘통일은 그렇게 감정으로 되는 게 아니다’라고 충고하실지 모르지만, 분단 45년도 부끄럽고 억울하고 가슴이 터지는 일인데, 분단 50년을 넘기다니 이건 정말 안 될 일 아니겠소?
나 때문에 출국 정지를 당해서 억울한가요? 아니죠? ‘형님 가기 전에 내가 갔어야지!’ 적어도 이 정도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조정하 사모님도 인생살이가 훨씬 더 신났을 테고요. 제수 얼굴 한번 보게 해주슈. 기완이 동생한테 쓸 지면이 없어 내일 따로 쓰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큰 형 씀
영미야
네 시아버님 될 분에게 보내는 처방 둘. 첫째, 양파를 모든 요리에 넣을 것. 둘째, 따끈한 물에 발을 자주 담글 것. 머리의 병은 발바닥으로 빼야 하는데, 따끈한 물도 좋지만, Hot Bag이라는 것을 용품점에 가면 살 수 있을 거다. 그걸 뜨겁게 해서 발바닥에 대고 있으면 좋을 거다. 머리의 긴장을 풀려면, 뜨거운 물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는 게 좋다. 너도 건강해야지, 안 되겠더라. 언제 아버지하고 같이 파스를 사가지고 오너라. 내가 정밀하게 진단하고 치료해 줄게.
큰 아버지 씀 1989. 6. 8.
통일의 삼총사 중의 하나인 박형규 목사에게 젊은이들의 죽음을 막기 위함이 방북을 결심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밝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