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장준하

김희숙 님 (고 장준하 선생의 미망인)

 

작년에는 테러를 당해서 집에 누워 있느라고 장 형 산소에 못 갔었는데, 올해에는 이렇게 갇혀 있느라고 또 못 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모든 통일은 좋다”고 외치다가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친 형의 말에 나는 법정에 서서 통일을 장 형 대신으로 주장했습니다. 

이번에 돌아와서 처음에 법정에 서던 날은 김구 선생님의 40주기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법정에 선 어제는 또 장 형의 14주기 날이었습니다. 어찌 이걸 우연이라고 하겠습니까?  모든 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섭리요, 손길로 이루어진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나야 장 형 대타로 통일 운동에 나선 사람이지만, 하느님은 이렇게 김구 – 장준하로 이어지는 통일 운동 선상에 나를 꽉 박아 세우시는군요.

장 형이 살아 있었으면, 이번엔 장 형이 갔다 오는 건데. 내가 갔다 온 일에 대해서는 소영웅주의니, 몽상가니, 미치광이니 하지만, 장 형이 갔다 왔다면, 그럴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그만큼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장 형과 나는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남과 북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삼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그걸 저는 “분단 50년을 넘기지 맙시다. 분단 50년을 넘기는 건 민족적인 치욕입니다”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남북 청년 학생들은 공동성명에서 1995년을 통일의 해로 삼자고 다짐했더군요.

1995년 통일되는 날, 우리 장 형 고향에도 같이 갔다 오지 않겠습니까? 그날까지 부디 부디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통일 염원 45년 8월17일 문익환 드림

 

다 써놓고 보니 가족 문안도 늦었군요. 지금 셋째네와 같이 계십니까? 요새 혈압은 어떻습니까? 호곤이는 싱가포르에 가 있나요? 둘째는? 그리고 따님들은. 아이들에게, 어느 놈에게나 편지를 쓰라고 명령하세요. 지금은 아무에게서나 편지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백기완 씨는 협심증으로 입원했다더니, 그날 산소에 간 걸 보니 퇴원했나 보죠? 계 선생님은 다리가 부러져 고생하셨고, 다시 부탁입니다. 건강하시기를.

 

어머님께

 

4층까지 걸어서 두 번씩이나 오르내리셨군요. 정신력이지요. 다음번에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셨다가 안에서 잡수시도록 하시죠. 그러면 두 번씩 오르내리실 필요가 없으실 텐데. 온종일 진술하려니까, 마지막 한 시간 동안은 이야기하다 보면 무슨 질문에 답변하는지를 잊어버리고는 실마리를 찾지 못해 헤매곤 했습니다. 이제 변호사 반대 심문 때는 쫓기지 않고 차분히 충분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빌면서.

 

아들 익환 드림

 

장준하 서거 14주년을 지나며 미망인에게 안부를 전하며 통일 운동에 장준하가 함께 못함을 아쉬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