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야!
편지 고맙다. 너희들의 편지는 무엇보다도 나를 기쁘게 해준단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할아버지 무기 구형 받은 걸 보고 놀랐니? 그날 난 몸이 그리 좋지 않았었다. 점심 한 공기 정도 먹고 나갔다가 밤 9시에나 돌아와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서 곤죽이 되어 있었는데, 한 30분 누워서 쉬었더니 기운이 완전히 회복되는 게 아니겠니?
내 몸은 막강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무기를 받았다는 게 기분이 좋아서 기운이 났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무기를 받았다는 소식을 저녁을 먹으면서야 들었거든. 무기를 구형 받으면 하늘이 깜깜해져야 무기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텐데, 그게 아니어서 무기를 헛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구나.
지게꾼 바우 사진 정말 마음에 들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찍은 네 사진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린이 사진 같아 귀엽기도 하고. 나라와 시원아가 빠져서 섭섭하지만 문숙이, 문칠이, 보라, 어지나와 같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 ‘통일의 그 날이 오면’이 라고 쓰고 긴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속에 그어 넣은 금들이 무엇을 말하는 거지? 갇혀 있는 할아버지 풀려나기를 비는 마음이니? 아니면?… ‘그날이 오면’이 네 그림에 있는 걸 몰랐구나. 통일의 손길, 발길에 채여 나가떨어지는 원수들의 모습, 그리고 민주 민권의 회복이구나. 잘 알았다.
코감기를 어떻게 고치느냐고? 폐경락을 다스려야지. 폐경락은 그동안 내가 자주 네게 해주었으니까 알 테지. 잘 모르겠으면 손목 맥박 짚는 데 계속 붙여도 된다. 그리고 가운뎃손가락 끝마디 안쪽 한가운데가 코니까 거기다 붙이면 될 거다. 같은 기도라도 할아버지 기도가 더 효과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으면 되는 거다.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는 기도 안 하기로 했으니까. 내 가족은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기도하는 나의 기도에 너희도 힘을 모아 다오. 세상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 천지거든. 우선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고. 건강한 가운데 동생들의 의젓한 언니 구실 잘해라.
문숙이, 문칠이!
문숙의 이름을 먼저 썼다고 문칠이 화를 내지 않을 테지. 한국이 캐나다보다 살기 좋다니 내 마음이 놓인다. 누구의 후손들인데 어련하려구. 문숙이가 벌써 국어를 꽤 따라갈 수 있다니, 오래지 않아 남들 앞질러 갈 수 있을 테지. 앞질러 간다는 말을 쓰고 보니 이 할아버지도 경쟁 교육이라는 교육 공해에 절었나 보구나. 미안하다. 집에 돌아가서 아빠, 엄마를 잘 도와 드리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 캐나다에서는 없는 일이어서 엄마, 아빠가 자녀 교육을 위해서 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니 정말 기쁘구나. 아빠, 엄마를 잘 도우면서 이 나라의 새싹으로 뿌리를 내리며 될성부른 나무로 싱싱하게 잘 자라거라.
보라야!
네 마음에도 통일밖에 없구나. 통일된 삼천리 강산 웃는 얼굴이구나. 교지에 실린 5학년 언니의 글을 읽고 마음이 상했구나. 북한 사람 모두 밉다는 글 실은 선생님이 문제지. 내가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구? 내가 너라면 나도 교지에 북한 사람 모두 사랑하고 싶다는 글을 써내겠다. 사랑해서 하나 되어 새 나라 만들어 가야 할 처진데 미워한다는 거, 이거 민족의 비극 아니겠니? 미워한다는 건 작은 마음이지. 사랑한다는 건 큰마음이고. 그래서 할아버지는 법정에서 민족 통일은 우리 민족이 커지는 거라고 했다. 우리 국토가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커진다는 것만이 아니란다. 우리의 마음이, 생각이, 뜻이, 경륜이 커진다는 말이다.
“이건 내 것, 저건 네 것” 이런 쩨쩨한 마음 털어 버리고 “이것도 우리 것, 저것도 우리 것” 하며 서로 도우며 하나로 어울려 사는 큰마음 없이는 통일이 안 되는 거 아니겠니? 반장이 되었으니 마음이 더 커져야겠구나.
어지나야, 시원아!
“통일이여 오라”가 아니라 “통일을 이루자”구나. 좋았어. 시원아 글씨는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그 마음도 통일을 비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지나가 그린 잠자리들에게는 휴전선이 없다는 거겠지. 휴전선 철조망에 앉았다가 북으로도 남으로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잠자리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서 쓰겠느냐는 거구나. 그래서 임수경 누나는 잠자리처럼 휴전선 넘어갔다가 온 것 아니겠니? 임수경 누나 얼마나 예쁘니? 너희 모두 수경 누나, 수경 언니처럼 예쁘고 예쁘고 크게 크게 자라라.
할아버지는 기쁘다.
1989. 9. 20.
무기 징역을 구형 받고 손주들에게서 받은 편지에 답장을 써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