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의 새 초점 전태일

당신께

 

내가 장준하의 대타로 나섰는데 이제 당신은 나의 대타로 나선 셈이군요. 대타인 내가 장준하가 못한 몫을 하듯이 당신도 내가 못 하는 일, 그 이상의 일을 하게 되는 거죠. 지금까지 통일운동의 기수들이 대체로 남자였는데 여성 기수로 나선다는 일, 이건 결코 내가 할 수 없는 일,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여성으로 기수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닌, 여성이기 때문에 통일 문제에 무언가 새로운 면을 찾아낼 사명도 있는 거죠. 임수경이 여성으로서 한 엄청난 기여 같은 게 부각되어야 할 것 같군요. 내 이야기보다 수경의 이야기를 부각시키도록 하는 게 어떨는지?

 

1989. 9. 22.

 

오경환 선생님께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제 마음은 윤동주를 생각할 때처럼 마음이 맑아지는 걸 느낍니다. 그러나 그 순수가 뜨거운 지열로 이글이글 끓고 있다는 것도 느낍니다. 그건 전태일의 뜨거움이지요. 그리고 그건 사랑이라는 말이 그 앞에서 무색해지는 그런 사랑이구요. 그런 의미에서도 그걸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지열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한 것 같지 않습니까?

70년대의 인권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번지다가 80년대에 들어오면서 통일운동, 민족자주운동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는데, 그 불티는 전태일에게서 튄 거라는 것 이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전태일은 민주도 통일도 자주도 외치지 않았죠. 오직 공순이들, 공돌이들의 생존권만을 외치다가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예수의 죽음이야 어찌 죽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박정희의 죽음이야 정말 죽음이지요. 그러나 전태일의 죽음이야 어찌 죽음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전태일이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죽어 버릴 수 없는 참 죽음이기 때문에.

 전태일의 죽음이 청계천 평화시장 공순이, 공돌이들의 생존권, 오로지 그것만을 위한 죽음이었는데, 그 불티가 번지다 보니 그게 민주화의 불길, 통일의 불길, 민족자주의 불길로 번진 것 아닙니까? 이게 참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주도 통일도 자주도 그 핵심은, 그 본질은 공순이, 공돌이가 대표하는 민중의 생존 자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이건 민주·통일·자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죠.

이리하여 전태일은 민족사의 새 초점이 되었습니다. 새 초점이 되었다는 건 새 발화점이 되었다는 말도 되고,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언제나 되돌아가서 새로 출발해야 하는 원점이 되었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전태일이 없는 민족사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가 없는 우리, 아니 그가 없는 나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전태일에게 오 선생님이 철학적·종교적인 조명을 대어 그 뜻을 밝히시게 되었군요. 철학적·종교적 조명이라기보다는 우주적인 조명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건 결코 경제·사회학적인 조명을 밀어내는 게 아니죠. 그것이 비추어 내지 못하는 구석을, 깊이를 밝혀냄으로 상호 보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원고를 받아 놓고 읽어 보지도 못하고 평양에 갔다 왔는데, 이제 그걸 책으로 읽게 되었군요. 오 선생님께는 두 손 모아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겠구요. 민족을 위해서는 경하할 일이라고 해야 하겠구요. 민족이라는 말 속에 희석되어 버리기 십상인 인간성을 위해서도 두 손 들어 환영해야 하겠구요.

 

안양 교도소에서 문익환 1989. 9. 22.

 

오경환 선생의 책을 읽고 전태일의 죽음이 민주화의 불길, 통일의 불길, 민족 자주의 불길로 번졌다는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