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

문익환 목사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범민련 본부에 쓴 마지막 편지

 

[편지 전문]

 

범민련 북쪽 본부 백인준 의장님 

범민련 해외 본부 윤이상 의장님

범민련 남쪽 본부 강희남 준비위원장님

 

 

지난해는 민족통일운동이 심각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해입니다. 그 시련은 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저는 범민련 남쪽 본부 준비위원장으로서 제 직책을 다 못 하고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감천만입니다.

 

제가 남쪽 본부 준비위원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통일운동을 그만두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쪽의 통일운동을 더 크게 묶어 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북쪽과 해외 통일운동 세력과 손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원만한 관계를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단의 장벽을 결정적으로 돌파해 내야 할 1994년 벽두에 서 있습니다. 금년에 벽을 뚫어 내지 못하면 1995년은 민족통일 원년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는 둘로 갈라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아주 갈라져 버린다면 우리는 이 벽을 돌파하지 못한 한을 천추에 남길 것입니다. 영원히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 찍히고 말 것입니다. 통일운동 자체를 하나로 묶어 내지 못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민족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겠다고 어찌 감히 말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7·4 공동성명의 3대 통일 원칙 가운데서도 민족 대동단결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상과 이념의 좌우를 거론하지 않아야 합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것이 아니라, 좌도 우도 다 같이 한겨레가 되어 분단의 장벽에 온몸 부딪쳐 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벽을 돌파해 낼 수 있습니다. 1991년 저 감격스럽던 범민족대회를 회상해 봅시다. 그때 대회장이셨던 강희남 목사님의 정부도 나오너라”, “7·4 공동성명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우익 단체도 나오너라”, 이 소식을 저는 감옥에서 듣고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그때 그 정신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7·4 공동성명을 받아들이고 남북 기본합의서를 지지하는 모든 개인이나 단체는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대변혁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어 내야 하는 변혁 가운데 민족통일보다 더 큰 변혁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통일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키는 통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변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변혁은 남과 북의 변증법적인 대종합이어야 합니다. 일찍이 없었던 새 세계를 창조해 내는 일입니다. 후천개벽입니다.

 

19901차 범민족대회 이후로 통일 열기는 요원의 불처럼 번져 가고 있습니다. 이인모 옹을 북으로 보내 드린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백에 여든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뻐 환영할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들의 뜻을 담아 낼 수 있도록 통일운동의 틀은 커져야 합니다. 이 또한 기뻐 환영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7천만 겨레의 통일 의지를 담아 낼 틀을 다시 짜고, 세 지역의 통일운동이 한 흐름이 될 수 있는 길 또한 진지하게 모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분의 답신을 기다립니다.

 

1994. 1. 18.

 

 

 

서울에서 문익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