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야
고맙다. 네 인간미와 애정이 담뿍 담긴 편지가 할아버지를 정말 기쁘게 해 주었구나. 더군다나 네 생활이 상당히 변하고 즐거워지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더욱 기쁘구나. 아빠 엄마가 인간이 만드는 아름다움, 곧 예술의 세계에 몰두하다가 하느님이 만들어 가시는 아름다움의 세계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 네게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는 걸 보면서 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너도 컴퓨터 앞에만 붙어 있지 말고, 아빠 엄마와 같이 채소밭에 나가 채소 가꾸는 일을 거들어 보아라. 자연의 세계에서 느끼는 자라나는 생명의 아름다움 같은 건 컴퓨터에는 없거든.
사람은 일단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을 호흡하고 자연과 하나 되는 게 인간성을 찾는 일이 된단다. 그런 점에서 너는 참 다행이라고 해야지. 대도시 한복판 높다란 아파트에서 자연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애들이 얼마나 불행하다는 생각 해 보았니? 그 애들에겐 그만큼 인간성이 메말라 버리는 거란다.
난 올여름 더위를 모르고 살 것 같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땀이라고는 햇볕을 받으며 운동을 할 때밖에는 흘려 본 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사는 이 옥사는 3층인데, 난 맨 아래층이거든. 그리고 정남향이어서 햇볕이 들이 쬐는 일이 없고, 서늘한 가운데 요가를 하고, 독서를 하고, 편지를 쓰고, 저술을 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가고, 따분한 거라고는 모르는 세월을 보낸다. 할아버지, 우리 손주들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사시나 봐! 그런 생각이 들겠지? 그렇지는 않단다. 내가 어찌 너희를 잊겠니? 너희를 생각하는 게 네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인데.
난 요새 건강에 관한 책을 쓰면서 사람의 몸은 생리적으로 기쁨을 원하고, 기쁨은 아름다움에서 오고, 아름다움은 사랑에서 온다는 걸 썼단다. 이 할아버지는 너희를 생각하면, 행복감에 빠져들거든. 너희는 하나같이 마음들이 아름다워. 너희들만 생각하면, 내 마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용솟음쳐 나오니 말이다. 아! 자랑스러워라. 나의 손주들아.
난 어제 네 아빠에게 네가 컴퓨터에 너무 매달려 있어서 인간성이 메마를 것이 아니냐는 걱정을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하더구만, 난 지금도 그 점을 걱정하게 되는구나. 속에서 솟아나는 예술적인 창조력도 고갈시킬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구나. 컴퓨터의 시대를 살아야 할 네게는 그게 꼭 필요하겠지?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인간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거, 속에서 솟아나는 예술적인 창조력의 숨을 막아버리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신신당부하고 싶구나.
이 편지가 네 손에 들어갔을 때는 학기말 시험도 끝나고, 네 두 번째 편지가 날아오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채소를 더욱 많이 먹어 네 체질을 바꾸도록 해라. 할아버지 씀
봄길님께
돌아가는 발길이 무거웠겠지만, 나의 건강 상태는 극히 양호하니까 염려 말기를. 염려하지 말라는 건 무리한 주문이겠지만, 하느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지난밤도 자고 일어났더니, 오늘도 몸이 아주 가볍고 상쾌하군요. 머리는 맑고. 어제는 김하기의 소설집 “완전한 만남”을 한 절반 읽었는데, 참말로 좋군요. 다 읽고 내보낼 테니 읽어 보시오.
어제 한겨레 신문에는 이진 목사의 인천 광역 선거 결과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나왔더군요. 단일화한다고 반드시 이기는 게 아니라는 김대중 씨의 분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밝혀주거든요. 난 그냥 막연히 야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야권 바람이 일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것만이 아니었군요. 그걸 복사해서 이우정 씨에게 한 장 주시오.
어제 바우 편지와 함께 당신의 편지 23신까지 하나 빠짐없이 다 들어왔군요. 1인10역을 하는 당신에게 자꾸만 심부름을 시켜서 안 됐지만, 한다솜의 “하늘과 땅, 그리고 우리들”(침술책)을 사들여 보내 주었으면 고맙겠군요. 그리고 바둑 잡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는데, 큰 것을 이달 치를 사서 보내 주고, 일 년 구독을 해주시오. 그리고 다음 올 때, 안양에서 썼던 바둑판과 바둑알들을 가지고 와 주시오, 본격적인 바둑판과 알이 있는데, 저건 왜 버리지 않나 했는데, 그걸 다시 쓰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군요. 바둑책 2권과 3권도 보내 주구요. 바둑이란 너무 아름답고 황홀한 것이어서, 여기서도 틈틈이 빠져 봐야죠. 오늘은 이만 총총.
당신의 사랑
1991.07.02
손자에게는 편지 보낸 준 것을 고마워하며, 채소도 가꾸며 자연과 가까워지기를 권하고, 아내에게는 바둑책 등을 보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