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소중하게 여겼던 아버님의 마음

봄길님께

 

어제 단식 12일째인데, 혈압이 135-85 완전 정상이니, 어찌 된 일인지, 의사도 어리둥절하고, 나도 어리둥절, 오직 놀랄밖에. 민족사의 이 중대한 고빗길에서 모두 정말 小我를 버리고 大義를 살리려고 마음들 비우고 마음들 모으기를 비는 마음뿐. 10년 공부 나미아미타불이 아니라 30년 공부 나미아미타불이 되어서야 원통해서 어디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어야죠.

민호 형님 조각 사진을 보면서, 어디에 내 20대의 조각이 섰나 하고 깜짝 놀랐다구요. 세상에 그렇게 같을 수가! 어머니에게서 민호 형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내가 그 형님을 그렇게 쏙 빼닮았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들었는데, 친형제도 그렇게 닮을 수 없는데, 이건 그야말로 쌍둥이 형제처럼 닮은 게 아니라, 한 판에 찍어낸 두 얼굴이군요. 북간도 사람들에게 문익환의 젊을 적 얼굴을 보고 싶으면, 연변대학 교정에 서 있는 림민호의 조각을 가 보라고 하면 될 거로구만요.

그 형님은 일찍이 사회주의에 투신했고, 우리는 기독교의 길을 갔기 때문에 내왕이 없어서, 말로만 듣던 형님의 얼굴을 초대면 하면서 난 거기서 상징적인 의미마저 찾고 싶어지는군요. 그 형님이 문화혁명 때 비참하게 죽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군요. 그래도 이제 명예 회복이 되어 조각마저 서게 되었고, 두 아들이 연변대학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지요.

난 요새 건강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렇게 즐거운 수가 없다오. 오래 속으로 익혀오던 것들이 붓끝에서 술술 풀려나오는 걸 보는 일도 즐겁지만, 아버님과 오랜만에 대화하는 일 또한 여간 즐겁지 않군요. 어머님은 몸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으셨죠. 그런데 아버님은 굉장히 건장한 몸이셨는데도 그렇게 몸에 대해서 마음을 쓰셨잖아요? 부모님을 거쳐 하느님께 받은 몸에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는 걸 못 참으셨죠. 그런데 아버님은 그 흠을 약물로 치료해 보려고 하셨죠. 지금도 집에는 아버님이 사 두셨던 온갖 약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니, 아버님은 몸을 소중히 여기셨지만, 몸을 믿지는 못하셨죠.

그러나 아버님이 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리고 그 마음이 내게 와 있구요. 그래서 이번 건강에 관한 책을 아버님과 대화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오.

바쁜 사람에게 또 하나 귀찮은 심부름. 진주교도소에서 읽던 생리학책이 집에 있을 텐데, 찾아서 보내 주시오. 검은 뚜껑에 얇은 책이에요. 못 찾으면, 종로서적센터 의학 서적부에 가서 하나 사 보내 주어도 되구요. 몸의 생리에 관해서는 동양 의학 서적은 너무 비과학적이어서, 거의 전적으로 서양 의학에 의존해야 할 것 같아서.

지금 영금에게 써야 생일날까지 들어갈 것 같아, 이만 총총.  당신의 늦봄

 

영금아

 

생일을 축하한다. 난 네가 아빠 엄마에게 쓰는 마음에 늘 마음 뭉클함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건 나에게 죄책감마저 느끼게 한다. 난 네게 너무 마음을 써주지 못했고, 너무 엄격하기까지 했다고 늘 가슴 아파하는 심정이거든. 그뿐만 아니라, 넌 자기의 달란트를 다 묻어 버리고, 가정일에 파묻혀 지내는 게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란다. 그러나 넌 그게 행복스러우니 다행이지. 

요새는 문칠이 문숙이 자라는 걸 보면서, 네 것을 다 희생하면서도 자녀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구나. 성수도 지나 보면 지나 볼수록 좋고 미덥고 정이 가는구나. 정말 정말 시집 잘 갔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잘났다고 머리를 쳐들고 기고만장들 하는데, 성수는 말없이 자기 맡은 일에 신명을 다하고 있고, 누구하고나 스스럼없이 잘 지내고, 늘 낙천적으로 사물을 보고, 초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도 알고, 불평할 줄 모르고. 그런 사람 만나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니?

요새 시어머님 때문에 몸은 고달프고 마음도 바쁘겠지? 마지막 가시는 길에 있는 효도를 다 하리라 믿는다. 산소 쓰는 일은 전날 엄마에게 말해 두었으니, 알아서 잘 처리하길 바란다. 시아버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이제 시아버님 혼자 되시면, 두 살림을 합쳐야 하지 않겠니?

경황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맞는 생일이지만, 복된 생일이 되기를 빈다. 앞으로 한 해 더욱 복되고 즐거운 나날이 되기를 빌면서. 안동에서 아빠 씀

1991.07.03

 아내에게는 건강에 대한 책을 아버님과의 대화 형식으로 쓰는 이유를 설명하고, 딸에게는 생일을 축하하며 안쓰러운 심정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