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0813 문익환이 이어받은 장준하의 기다림

당신께





지금부터 46년 전 오늘, 8월 13일에 당신은 영실이를 업고 시골로 피난을 가 있었죠. 소련군이 곧 쳐들어온다고. 그 시골 이름이 뭐였던지 생각이 안 나네요. 거기 한국인 교회에 가서 신세를 지고 있었죠. 그 후 46년 동안 당신은 한 번도 그때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일이 없군요. 갑자기 그때 그 시골에 가서 어떻게 지냈던가 하고 궁금증이 생기는군요. 그러고 보니 그때 나 혼자 신경(新京:지금의 장춘. 1945~1946년 문 목사는 이곳 한인교회 전도사로 있었다) 중앙교회 사택에 남아 있던 때의 이야기를 나도 당신에게 들려준 일이 없었던 것 같군요. 그냥 살아남아 다시 만나 살게 되었다는 것만이 고마웠던 걸까요?



영실이 생각만 하면, 가슴속 깊은 데 면도날 자국이 나며 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아픔이 신경 하늘 어딘가를 떠도는군요. 인웅 씨가 그 어린것을 어디 갖다 묻어 주었지요. 그때 얼마나 시골에 가 있었죠? 그때 신경은 정말 분위기가 폭풍 전야 같았죠. 이제 곧 소련군이 들어온다, 소련군이 지금 어디까지 왔다는 둥, 그때 관동군 소위 한 사람이 거의 날마다 찾아와서 전황을 알려 주었는데, 그 사람 그 후에 어찌 되었는지. 한국 사람이었죠. 신경을 중심으로 공방전이라도 붙는다면 신경에 남아 있는다는 게 별로 안전할 거 같지 않아 궁리 끝에 진격하는 소련군 배후로 거꾸로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북쪽으로 시내를 빠져나갈 생각도 해보았구요. 그래서 북쪽 중국인들의 지역으로 가보았는데,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어 되돌아온 일도 있었죠.



내일, 그러니까 14일, 일본 왕이 다음날 특별 방송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로소 안심했지요. 그런데 나하고 같이 있던 청년 두 사람은 그 소식을 듣자 무슨 큰일이 있을 줄 알고 시골로 피난을 가다가 고생고생했다며, 그때 전도사님과 함께 있었더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더군요. 후에 만나서. 그때 중앙교회 노 집사로 장로까지 받고는 안수를 받지 못하고 있던 분이 있죠? 그분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그분이 우리 집에 왔다가, “이제 우리나라도 독립이 됩니다” 했더니 “정말이에요?” 하면서 좋아한다기보다는 어리둥절해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군요.



얼마나 기다리던 조국광복인데. 이 기다림 하나에만 목숨을 걸고 살아오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도 못 감고 죽어 갔는데. 허망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기다림이었는데. 아무리 허망하게 보여도, 아무리 좌절과 실망이 되풀이되어도, 그 기다림이라도 없다면 하루도 살아 낼 수 없이 된 사람들의 인생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분들은 오늘에 안주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지요. 오늘의 굴욕적인 삶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일본 지배자들의 은총을 구걸하면서 그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살아가는 것을 감지덕지하는 사람들의 생을 멸시하는 거죠.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싶은 거죠. 그들의 기다림은 이같은 예속에서, 노예들의 굴종에서 벗어나는 걸 말하는 거죠. 자유냐! 굴종이냐! 이리하여 기다림은 선택이 되는군요. 선택은 곧 기다림의 내용의 문제도 되구요. 기다림은 나의 장래의 문제만이 아닌 여러 대에 걸친 민족적인 과제라는 말이군요. 



여기까지 쓰고 보니까 1975년 8월 17일 장준하의 죽음이 내일모레이군요. 굴종의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으려고 목숨을 내걸고 일군 진영을 탈출해서 6천 리 죽음의 길을 넘어 중경으로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그의 피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대로 조국광복을 기다리는 몸부림이었거든요.



아 ─ 그냥 앉아 기다리신 게 아니군요. 기다림은 일어서서 난관을 헤치면서 걸어가는 거군요. 6천 리 장정에서 시작된 장준하의 기다림은 약사봉에서 끝나고 만 게 아니죠. 그 일은 대를 이어서 계속되는 전진일밖에 없는 거군요. 장준하의 기다림은 비단 다음 세대만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인 문익환이 이어받은 거거든요.



장준하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우리가 그의 집을 찾아갔던 일 기억나지요? 장본인이 보이지 않아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그의 부인이 하던 말! “문 목사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목욕하러 가셨어요.” 목욕재계하고 친구를 만나는 그의 경건한 자세에 내가 크게 탄복했었죠. ‘이 친구는 이렇듯 인생을 경건하게 사는구나.’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그것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군요. 그가 죽기 전에 죽을 걸 알기라도 한 듯 여러 가지 준비를 하잖아요. 김구 선생, 사친 무덤에 가서 성묘하고, 임정 때 쓰던 국기를 이대 박물관에 기증하고, 부인이 미사를 받을 수 있도록 혼배성사를 하고.



그는 그렇게 마음의 눈이 밝았죠. 그렇다면 목욕재계를 하고 나를 맞았다는 건 내가 자기의 통일운동의 맥을 이어가리라는 걸 예감했던 거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아니, 그의 그 맑고 간절한 마음에 내가 씌워서 이렇게 살아온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오늘 전대협 대표 둘이 판문점으로 걸어 넘어올 날이군요. 다들 장준하의 넋에 씌운 젊은이들이죠. 후세의 역사가들이야 바른 판단을 내릴 테지만. 전봉준 장군이 난적에서 혁명 투사로 명예 회복하는 데 한 세기나 걸렸는데, 지금은 역사의 속도가 빨라졌으니까 이제 금방이죠. 1995년이 앞으로 4년 남았군요. 이 민족의 길고 긴 기다림이 마침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군요.



민족통일, 조국광복, 민족자주를 부를 날이! 오늘은 이만. 



당신의 늦봄



1991. 8. 13. 





 1945년 만주에서 해방을 맞을 때와 장준하를 회상하며 민족의 긴 기다림이 끝나 간다는 생각을 표현